전환기의 인식

많은 사람들은 한국사회가 혼란스럽다고 한다. 세대간의 대립이 있고, 계층간의 차이가 심화되고, 빈부의 격차도 심해지고, 요즈음은 남녀간에도 상대적으로 남성들의 기가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언론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 관점의 대조를 이루고 있어 국론의 분열이 심히 우려되기도 한다.

지난해 말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에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이 뽑혔다고 한다. 우리의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가 하면 한 경제단체의 회장은 올해의 경영 화두를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 답했다니, 가히 이 시대상황이 어떤가는 알만하다. 국가원수가 탄핵 소추되고, 탄핵의 역풍이 부는 가운데 총선이 치루어졌다. 그 결과 한국사회도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정치의 중심축이 40대로 젊어지고 많은 여성들이 그룹을 이루어 정치의 선봉에 서 있다. 지역정당을 탈피했다고 하기엔 다소 미흡하긴 하지만 전국정당이 나타나고, 민주노동당이 국회의 제3당이 되었다. 총칼의 구테타나 국회의 다수의석보다는 촛불이나 감성의 여론이 정치방향을 결정한다. 네티즌들의 극렬한 언어가 정치판에서는 설득력을 얻는다. 이런 전환기의 모습은 이제 스쳐 지나가는 일과성의 바람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학교수의 입에서 구테타라는 말이 나오는걸 보면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열린우리당 당선자 중 재야 및 학생운동권 출신과 개혁당 출신을 합치면 대략 40∼50명 선이 되고, 민주노동당 당선자 10명을 합치면 원내의 진보적인 성향의 의원은 50∼60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들 숫자의 위력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몰라도 변화는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데다 막강한 대통령의 힘, 의회에서의 과반이 넘는 거대 여당의 힘, 젊은 세대, 시민 단체의 힘, 거기에다 매스컴까지 힘을 실어주지 않는가.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른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새로이 전개되는 사회를 무작정 긍정하거나 무작정 부정할 수만도 없다. 혼란스러움, 합리주의, 유일체계, 논리 중심, 자기 획일성의 모더니즘에 의하면 오늘의 이 혼란은 필연적인 귀결인지 모른다. 이제 우리 사회의 대상적 차이로서의 의견 불일치는 체계 다원성으로부터 바라보는 대상해석이 이루어진다면 해법은 열릴 것도 같다.

이토록 우리 사회가 척박하고 천박해진 것도 따지고 보면 타살아생(他殺我生)의 경쟁만 있었지, 상생(相生)의 마음으로 복기(復碁)하는 마음가짐이 없었고, 경쟁의 치열함과 승패의 황망함만 존재하였지, 반성과 대화의 기운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할 만큼 성숙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사회는 이미 전환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이제는 지난 시간의 반성 위에 진정한 상생과 대화를 논할 때가 되었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5월 제42호

전쟁의 정당성과 필요성

요즈음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는 화두는 단연코 미영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공격에 나섰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의 명분에 쉽게 동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이 진짜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규뉴스 시간의 절반에다 이라크전쟁특보까지 TV와 라디오, 신문은 온통 전쟁뉴스로 도배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쟁이 발발 초기에는 속전속결로 쉽게 끝날 것 같았는데 시간이 경과할수록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영연합군의 공세는 육지와 공중에서 점점 도를 더해 가고, 이에 후세인의 이라크도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는가 하면, 세계인의 반전 여론도 또한 기세를 더해간다. 이렇게 가열되어 가는 전쟁분위기에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제재나 중재를 해야 할 UN은 그 권위와 능력을 상실하였으니 이제 최후의 승자와 패자를 가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분위기로는 모두가 패자가 될 가능성이 한층 짙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를 예상해 보건대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는 미국도 주변 국가들의 반대에 대처해야 함은 물론 자국내의 반전여론 등을 무마하는 등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파괴된 이라크의 재건과 걸프전 이후 십여년간의 경제제재로 인해 피폐된 이라크 민중들의 민심을 되돌리는 일이나,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기까지는 천문적인 투자와 시간이 필요 할 것이다.

인류역사상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오지 않았는가. 이 전쟁의 역사를 통해 얻은 결론은 전쟁의 당위성이나 정당성은 결코 그것의 필요성보다 우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미국이 전 세계인의 반전여론을 뒤로 한 채 사담 후세인의 사냥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들의 국익을 위한 필요성 때문이지 결코 합리성과 정당성의 논리로는 설득이 불가능하다. 1992년 걸프전 때에는 거의 모든 서방국가들이 미국을 지원하여 명분과 실리 등 모든 면에서 유리한 입장에서 싸웠지만 이번 전쟁은 UN의 결의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그 뜻은 국제사회에서의 명분보다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에 급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국익차원에서 그동안 이라크내의 석유 유통권을 쥐고 있다가 전쟁을 통해 미국에게 넘겨줘야 할 운명이니 결사 반대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삼십여년 전 월남전이 한창일 때 우리나라도 영국의 작가 럿셀 등 세계의 반전주의자들의 따가운 여론보다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하지 않았던가. 오늘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파병의 찬반논쟁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찬성론자들은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는 필요성이고, 반대론자들은 ‘정당성이나 명분의 결여’로 귀결된다.

이제는 사담 후세인을 사냥하고, 이라크를 민주화시킨 뒤에 중동을 리모델링 하여 이곳에서 패권을 장악하여 자국의 경제불황을 극복하고 세계의 보안관 자리를 영속화하겠다는 부시 독트린의 전개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역시 전쟁은 정당성보다는 필요성이 우선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3년 4월 제29호

저축의 역설(paradox of thrift)

저축은 미덕인가 악덕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약과 저축은 경제생활에서 으뜸가는 미덕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예부터 큰 부자는 하늘이 점지하고 작은 부자는 근검절약하면 된다고 하였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여겨왔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소비‘가 미덕이고 ‘저축’이 악덕이라는 말이 나왔다. 저축이 악덕이면 왜 어릴 때부터 자녀를 교육할 때 절약과 저축을 그렇게 강조하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저축을 장려하는 각종 정책을 펴고 홍보에 힘을 기울이는가.

이런 저축이 왜 악덕인가.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에 의하면 한 경제권 안의 경제상황을 좌우하는 것은 ‘수요(需要)의 크기’라고 한다. 수요는 크게 보아 소비, 투자, 정부지출로 구성되는데 소비자의 소비지출, 기업의 투자지출, 그리고 정부 부분의 지출이 총수요의 주요한 요소들인데 그 중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총수요의 2/3를 차지하는 것이 소비지출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저축을 늘린다면 소비가 줄어들 것은 뻔한 일이고 따라서 총수요도 줄어든다. 총수요가 줄어들면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고용수준도 점차 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실업이 늘고 경제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자연히 보수적이 되어 소비를 줄이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경제는 더욱 위축되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더욱 과감하게 소비를 해야 할텐데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려 한 것이 이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서 ‘저축은 악덕’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대개 선진국에서의 불경기는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저축에 관한 한 지독히도 보수적이고 일상화된 짠돌이다. 얼마 전 두 일본인 교수와 이즈음의 경제상황 이야기가 나왔을 때다. 경기가 불황에 접어들어 어렵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기 무섭게 일본인들은 초 긴축 절약생활을 한단다. 특히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저소득층의 생활보호대상자들은 매월 일정금액의 돈이 통장으로 입금되면 겨우 연명할 정도만 지출하고 저축으로 꽁꽁 묶어 둔단다. 내수가 살아나지 않고 경제가 더 어려워지자 마지못해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현금 대신 일정금액의 상품권과 같은 것을 지급하였더니 이번엔 가게에 가서 꼭 필요한 만큼의 물건만 사고는 나머지를 현금으로 받아다가 역시 장롱 속에 넣어두거나 아니면 아예 어음처럼 현금으로 할인하여 저축을 한다고 했다. 이러니 저축이 ‘미덕’이 되겠는가.

‘저축의 역설’은 이처럼 사람들이 저축을 늘리려 할 때 오히려 저축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저축을 늘려 소비를 줄이고 그렇게 되면 총수요가 줄어 생산활동이 위축되고 결국에는 소득이 감소되는 결과를 빚는다. 이제 소득이 줄어드니 저축을 늘릴 수가 없다. 이 과정을 가리켜 ‘저축의 역설’ 또는 ‘절약의 역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불과 30~40년 전 개발이 한창일 때에는 거의 강제로(?) 저축을 하게 하는 ‘국민저축’제도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소비가 미덕’이라며 떠들다가 고도성장의 끝자락이 보이자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며 자조 섞인 자성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경제 또한 ‘소비와 저축’의 조화에서 그 묘를 찾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수(內需) 만으로 자국의 경제가 돌아 갈려면 적어도 인구가 1억은 되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인구도 자원도 한계에 와 있으니 걱정이다. 이런 때일수록 위정자들의 노력과 면밀하고 용의주도한 경제 정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정부는 국민과 야당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 하고, 국민은 이를 신뢰하고 힘을 모으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한데 걱정 또 걱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나누고 배려하고 보시하고 절제함을 강조하셨다. 많이 가진 자는 베풀고 배려하고 나누는가 하면 적게 가진 자는 근검절약하고 저축하라는 뜻이리라.

香岩 김 형 춘 글. 월간반야 2009년 2월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