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씨앗을 이고 나온다

아득한 옛날 농사를 처음 짓기 시작할 때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나무 열매나 잎을 따먹고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다가, 물 좋고 따스하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정착하여 곡식과 채소의 씨앗을 뿌리면서 농경사회가 시작되었으리라. 씨족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화목하게 모듬살이를 하는 것을 지켜본 조물주가 기특하게 여기고는 곡식과 채소를 심은 논밭에는 잡초가 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잡초가 없는 논밭에는 곡식이나 채소가 잘 자라 농부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잡초가 없는 논밭에서 농사를 짓다보니 농부들은 별 할 일이 없었고 자연히 게을러지게 된 것이었다. 이를 지켜본 조물주는 인간들이 이렇게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잡초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고 한다.

곡식이나 채소가 제대로 자랄 때를 맞추어 20일에 한번 꼴로 잡초의 씨를 뿌렸으니 농부들은 당황하여 급기야 김매기를 시작한 것이다. 곡식이나 채소의 씨앗을 뿌리고는 퇴비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 되었다.

문제는 이 잡초의 생명력이었다. 농부가 가꾸고자 하는 곡식과 채소는 잡초와 경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농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곡식과 채소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잡초의 생존력이 강했으면 “잡초는 머리에 그 씨앗을 이고 나온다”는 말이 나왔을까. 잡초는 태어날 때 그 씨앗을 머리에 달고 나와서는 곧장 대를 이을 씨를 뿌려 종의 번식에 나선다고 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 강인한 생명력, 그 대단한 종족 보존력은 가히 자연계의 어느 생명체가 이를 따를 수 있겠는가. 분명 이 강인한 생명력은 본받을 만한 가치도 있지만 농부로서는 이 잡초의 강한 생존력이 곱게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 인간사회에서의 잡초도 문제다. 선량하게 태어나고 올바르게 자라서 인간의 양식이 되는 곡식과 채소에 비유될 사람도 있지만 사회의 독버섯이나 무용지물인 잡초가 되어 해악과 폐해를 끼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부정적인 인간군상들이 선량한 사람들보다 더 설치고 요란한 모습을 보여온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평화와 행복, 진실과 선량함, 사랑과 아름다움인데도 우리 사회는 소수의 잡초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전쟁과 불행, 거짓과 악. 미움과 추함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해도 잡초는 잡초다. 잡초가 곡식이나 채소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듯이 인간사회도 말없는 다수의 선량함이 요란한 소수의 사악함을 제압해야 한다. 농부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땀흘리듯이 우리사회도 사악한 부정적 인간군상들의 악업을 제거하기 위한 근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열반경에서 ‘악업(惡業)의 씨앗을 만들지 않는다면 미래에 받아야 할 악과(惡果)는 없을 것’이라 하셨으니 악업의 씨앗인 악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바로 수행의 길이 아닐까.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행세를 하고 그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재빨리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알아서 기기도 한다. 또 맞대어 싸우기 싫어서 양보하기도 한다. 우는 아이 젖 주는 식이다. 떼를 쓰면 귀찮아서도 지고 만다. 그 조건이 합리적인지 옳은 건지 그른 건지는 뒷전이고 우선 큰 소리를 막아놓고 보자는 식이다. 길거리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 접촉사고라도 나면 우선 고함부터 질러놓고 보라는 조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즈음의 정치 판이나 경제·사회·교육·종교계의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큰소리치는 사람이 옳고 욕설까지 하며 설치는 사람의 말이 정의로운 것 같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자기들을 위해서 큰소리로 욕구를 분출하고 있다. 목소리가 작고 조용조용히 부드러운 말로 상대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 잘못을 알고 스스로 열세로 인정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하기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강자는 항상 큰소리를 쳤고, 약자인 소시민의 목소리는 언제나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 판에서 큰 목소리는 소리만 컸지 아무 실체도 없고 힘도 실리지 않은 것 같다. 그 말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일관성이 없어서 언제 또 딴소리가 나올지 모르고, 언제 또 용두사미처럼 꼬리를 감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찍이 큰소리로 카리스마를 앞세워 대중을 선동한 역사가 많이 있었고 이들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네 현실과는 다르다. 그 큰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나오는 소리도 아니고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는 더욱 아니다. 이들의 큰소리는 사람의 감정을 부채질하여 이성을 마비시키고 이지력을 약화시키는가 하면, 야성을 불러일으켜 지성을 파괴하는 등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겠다. 이런 것들은 고함이고 괴성이지 말이 아니다.

이제는 좀 작은 목소리로 말해보자. 작은 목소리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시비를 가려서 상대를 설득시키는 태도를 취해보자. 그리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폐부를 찌르도록 하고 그 말이 두고두고 귓전에 울리도록 해보자. 듣고서 한참 뒤에야 다시 그 말을, 그 목소리를 음미해 보면서 피식이 웃어보자.

이 시궁창 같은 정치판을 비롯한 현실 사회에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를 낼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감히 종교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히만 계셔도 될 한 스님의 정치적 발언 파문으로 우리 불교계 뿐 만 아니라 나라 안이 뒤숭숭하다. 그 말씀의 진의야 어떠하던 간에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언론에 시비의 빌미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제발 좀 자중자애하면서 꼭 필요할 때 그것도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세인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말만 했으면 좋겠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말을, 그것도 크게 소리내어 왜 손해를 보고 뜻있는 사람들을 세밑에 우울하게 만드는가. 입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2월 (제3호)

김형춘님은 창원전문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은 창원문성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다. 반야거사회 회장이다.

자존과 힘

봄비가 ‘국민의 정부’를 씻어가고 새봄과 함께 ‘참여정부’가 탄생하였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중심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당찬 계획과 함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지구촌의 도처에는 건강한 나라, 희망에 찬 국민의 발목을 잡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으니 걱정이다.

가까이는 북한 핵 문제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사활이 걸려 있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이 긴박한 가운데도 국론의 통일은커녕 반미시위와 친미시위가 잇달아 일어나고, 우리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마저 경거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저 멀리 중동에서는 전운이 점점 짙어가고 석유 값을 비롯한 불안스런 경제적 파고가 점점 더 높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우리 사회에서는 겁 없이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우고, 능동적으로 북미간의 사태에 대해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국제사회에서 먹혀 들어갈 수 있는 참된 지도력을 가졌는가. 아니면 세계 11위의 수출대국의 경제력을 믿는가. 월드컵 4강의 스포츠 강국의 힘을 믿는가. 우리가 동족이라고 믿고 있는 북한의 핵의 힘을 은근히 믿는가.

일본은 우리보다 무엇이 부족하여 미국이 눈만 흘기면 그들의 정책에 무조건 동조하는가. 영국은 왜, 독일은 왜, 왜 중국과 러시아는 제대로 할 말을 못하는가. 냉엄한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걸 아는가. 어제의 혈맹이 반드시 내일의 맹방이라고 믿어도 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힘이다. 힘만이 정의이자 진리다. 힘만이 우리의 자존을 지켜줄 유일한 무기다.

지금은 나라 안팎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다. 허세도 부리지 말고 좀은 겸손하자. 그런 자세로 묵묵히 참고 힘을 기르자. 힘을 전제로 하지 않은 자존은 위선이요 허세다. 진정한 자존은 힘의 뒷받침이 되었을 때 그 의미를 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3년 3월 (제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