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自存)과 하심(下心)

얼마전 한 고등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하여 축하의 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꼭 주입시켜주고픈 내용을 찾다가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이제 여러분들은 곧 대학생이 되고 성년의 나이에 이르게 된다. 지금부터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야 한다. 먼저 ‘내 인생은 내가 산다’는 의지를 굳게 하고, 나의 문제는 내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하며,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하고싶은 말이었다. 언제까지 부모가 뒷바라지를 하고, 보호자나 주위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누가 뭐래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수밖에 없지 않은가.

해마다 이맘때면 대학에도 신입생이 들어온다. 이들에게 나는 한결같이 ‘대학은 내가 나를 찾고, 내가 나를 키우는 곳’이라고 말한다. 자아를 발견(자각)하고, 자아를 확충(발전)시키고, 자아를 형성(완성)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찾는 작업이 우선이다.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적 자아를 찾는 작업은 뒤로 미루고 ‘스스로에 대한 자기평가’를 해보라고 권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환경은 어떠하며, 가족관계나 경제적 여건은 어떠하며, 나의 지적 능력이나 기능적 능력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며, 나의 대인관계나 인간적 면은 어떠한지 등을 스스로 확인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이 시점에서 나를 키워나가는 출발이 순조로울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를 발전시켜야할지를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아의 발견 없이 자아의 올바른 확충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자아확충 또는 자기발전의 연장에서 자아는 스스로 형성되어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정립될 것이다.

이렇게 ‘내가 나를 찾고 내가 나를 키우려’면 몇 가지 전제가 되어야 할 게 있다. 그것을 나는 ‘자기에 대한 성실(誠實), 자기에 대한 애착(愛着), 자존(自尊)과 긍지(矜持)’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 성실하고 애착을 갖고 자긍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말이 쉽고 행하기 어려운 덕목도 드물 것이다. 성실의 ‘성(誠)’은 ‘무위무간단(無僞無間斷)’이라 하여 ‘거짓 없고 쉼 없다’는 뜻이니,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다. 자기에 대한 애착을 잘못 해석하면 ‘이기적’이라 하기 쉬우나 넓은 의미의 ‘이기(利己)’는 ‘이타(利他)’와 다르지 않다. ‘자존(自尊)’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의미인 동시에 자기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자긍심은 거드름이 아니다. 자존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이고 명예는 남이 나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 옛 어른들은 ‘자존 한 근이 명예 천 근보다 무겁다’고 했다. 스스로 자기를 인정하여 높이고 품위를 지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거나 열등의식을 갖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을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찾고 키운 연후에 자존과 긍지를 갖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충분히 내실이 기해진 다음의 자존과 긍지, 자기에 대한 성실, 자기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스스로를 찾고 키울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되리라 믿는다.

이처럼 자기를 가꾼 뒤에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것이니, 이때의 삶의 지혜는 ‘하심(下心)’만한 게 없다는 말이다. 자기를 낮추어 상대를 높이니 상대의 적대감을 없애고 호감을 갖게 하니 이보다 쉬운 방법이 없을 것이다. ‘너니 나니 하는 아산(我山)이 무너지니 도는 스스로 높아지고, 누구에게나 하심(下心)으로 넙죽이 절하는 생활이 되니 만가지 복덕이 모여든다’는 경전의 말씀대로.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 /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3월 제76호

자연과 생명

올해 봄의 우리나라 가뭄은 기상관측 이후 가히 최악의 사태에 이르렀지만 장마라고 하는 계절적 기상현상이 그래도 생명체들의 씨를 말리는 것만은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밀어닥친 집중호우와 태풍까지 곁들여 이젠 물난리를 겪게 되었다.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가뭄이 들어도 걱정 장마가 져도 걱정. 옛 이야기에 나오는 나막신 장수와 우산 장수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과 다를 바 아니다. 최근 지구환경 문제의 핵심과제인 온난화 현상이나 사막화 현상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지구 오존층의 파괴가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양의 동서나 남ㆍ북반구나 문명국가와 미개국가를 가릴 것 없이 때로는 홍수가 때로는 가뭄의 재앙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인간의 삶의 터전을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룩해 놓은 알량한 과학 지식으로는 속수무책이다. 다급해지면 속죄하는 심경으로 하늘만 쳐다볼 뿐. 오늘 아침 모 일간지에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문학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는 물론이고, 예술이나 종교가 생존을 앞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최근의 날씨와 관련지어 자연과 생명이 당하는 고통이 안쓰럽다고 하였다. 다시금 생명과 환경과 문화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몇 년 전 류시화 시인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연설문을 번역하여 엮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문명 비판적인, 반문명적인 메시지와 함께 그들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낸 글이라고 생각했다. 제도적인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자연주의자로서, 대지를 사랑하고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아이들에게도 늘 자연에 가까이 가도록 해서 부드러운 심장을 갖도록 했다. 따뜻한 대지, 부드러운 공기, 재잘거리는 시냇물,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밭,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벌 한 마리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인디언은 대지의 일부이며, 대지는 그들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그들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그들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의 꽃의 수액과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가 하나이기에 그들 모두는 같은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조용한 외침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증명하기에 족했다.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정령이 만들어 놓은 대로 세상의 만물에 만족하고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그렇지 않다. 강이나 산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헐고 바꿔버린다. 문명인들은 그것을 창조라고 하고 건설이라고 하지만 인디언들의 눈에는 철없는 파괴로 보일 뿐이다.

이따금 시골에 가면 경지정리니, 직강공사니, 하천정비라는 이름으로 마을 앞의 개천 공사를 잘못하여 큰 물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촌로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엇이 인간을 위하는 일이며, 자연과 생명을 위하는 일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구 위의 유일한 생산자는 식물이요, 동물은 완벽한 소비자이며, 최대의 소비자는 인간이라고 한 어느 환경론자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니 소비자라는 말 대신에 파괴자라고 하면 무리일까.

최근에 또 불사 문제로 안팎이 뒤숭숭하다. 생각해 볼 일이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7월 (제8호)

자연 중독증(中毒症)

어쩌다 주위의 권유로 자그만 텃밭을 마련한지 10년이나 되었다. 처음엔 그저 심심풀이로 한번씩 놀러 다녔지만, 노모께 들키고 나서는 어쩔 수없이 주말이면 끌려 다니다시피 몇 년을 다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우리 내외가 실제로 좋아서 텃밭을 찾곤 한다. 때로는 힘에 겨워 짜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꽤나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심어놓은 작물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싹이 텄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곡식이나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릴 듣고 자란다’고 했는데, 우리는 아직 주말이나 휴일이 아니면 가지 못하니까 때로는 과일이나 채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지난 여름의 가뭄 때에는 작물이 타 들어가지나 않나 염려되어 주중에 잠깐 들를 때도 있었다.

우리 텃밭 옆에는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텃밭을 가꾸는 동창생 내외가 있다. 며칠 전 환담하는 자리에서 그 댁의 아들딸이 부모 더러 ‘자연중독증’에 걸렸다고 하더란다. 흙이 좋고 나무가 싱그럽고 공기가 맑은 데다, 자라나는 푸성귀를 보면 텃밭을 떠나기가 싫다는 것이다. 틈만 나면 텃밭에 와서 시간을 보내니 가히 자연중독증 환자라 할 만하다.

‘인간’이란 영어단어 ‘human’이 흙을 뜻하는 라틴어의 ‘humus’에서 왔다고 하니 사람이 흙을 떠나서는 온전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삶의 흔적인 ’문화‘라는 말의 영어단어 ’culture’도 ‘땅을 경작하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인류 역사가 오랜 세월에 걸친 농경시대를 거치면서 땅을 경작하고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고, 생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갔으니 흙과의 관계는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는 인간을 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농부는 고향을 떠나야 돈도 벌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할 수 있었다. 농부의 육체노동은 가장 부끄러운 것이 되었고, 그나마 농촌을 떠나 기업이 바라는 값싼 노동자가 되어도 고향을 지키고 흙을 파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지식 전문가나 정치가의 언어노동은 가장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생명을 길러내는 흙은 천시되고 탐욕을 길러내는 돈은 숭상되었다. 농업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농촌에 남아서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하는 ‘1차 산업’이 되고, 금융과 서비스업은 선진국을 상징하는 ‘3차 산업’으로 추앙 받고 있다.

사람이건 자연이건 모두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되고, 돈을 좇아 뿌리도 없이 떠도는 자본의 뜨내기들에 의해 자연은 도처에서 신음소리를 내고 문명도 급기야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자연의 저항인가 생명의 반란인가. 광우병으로, 조류인플루엔자로 인간에게 선전포고를 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설익은 도회인은 다시 흙을 찾았다. 고향에 돌아온 듯, 엄마 품에 안긴 듯이 안온한 마음으로 흙에 다가가니 가히 중독이 될 만도 하지 않은가. 삶의 지혜와 기술은 사람이 땅에 뿌리를 박고 흙을 만지면서 자연을 책임 있게 돌볼 때에 다시 평화를 주고 우리 후대에 온전히 전승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땅을 돌보고 가꾸는 농사야말로 어쩌면 가장 고결하고 책임 있게 사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이즈음 농촌에는 순수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지만, 하도 푸대접받고 소외당하는데 대한 앙갚음으로 농민운동을 직업처럼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참으로 가슴아픈 현실이다. 경제논리로 따진다면 우리네 농촌과 농업이 설자리가 있을까.

매스컴에서는 단 하루도 먹거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 않는 날이 없다. 가능하다면 육식이나 화학식품보단 이 땅에서 얻어지는 농작물을 섭취하고 살 때에 우리의 육신과 정신은 가장 깨끗하고 온순하며 활기 있고 밝아질 것이라 믿는다.

香岩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10월 제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