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인간관계’를 벗어날 수 없고, 인간관계의 성패는 어떻게 자기를 표현하고 얼마나 남을 잘 이해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표현과 남의 이해’는 내가 수십년 해 온 우리 ‘국어 교육의 목적’이다. 아니 국어뿐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잘 표현하고 남의 생각과 느낌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국어나 외국어를 배운다는 말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사상·감정을 얼마나 잘 나타내고 어떻게 잘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다.
이 ‘자기 표현과 남의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말하기’와, ‘듣기·쓰기·읽기’등을 배운다. 그러니까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말하기와 쓰기(짓기)’를, 남을 이해하기 위해 ‘듣기와 읽기’를 공부하는 셈이다.
그런데 해방 후에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국어를 배웠고, 60년대 말부터는 내가 안다고 생각한 알량한 지식을 남에게 가르쳐 왔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고개가 갸우뚱거려 지는 게 있다. 사실 ‘말하기나 듣기, 읽기와 쓰기’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교육현장에서는 8·15 광복 후부터는 문자의 이해, 즉 읽고 쓰기를 하는데 급급했기에 ‘읽기와 (짓기 제외) 쓰기’에 우리의 국어교육이 치중했고, 이후 90년대 중반까지는 말하기와 쓰기(짓기 위주)를 강조했다. 초·중등교육을 막론하고 연구학교·시범학교에서는 유행처럼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자신있게 표현하는 문제를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발표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와서는 ‘듣기와 읽기’등 남을 이해하기 위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 대학입시를 위한 수학능력시험이나, 일반 평가에서도 ‘듣기’를 강조한다. 국어 뿐아니라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국어교육의 흐름과 세태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까. 왜 이즈음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을려고 하지 않을까. 질문은 해 놓고 답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공격적인 자기 표현은 있는데 상대방의 답이나 변명은 무시해 버린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입은 있고 귀는 없는 것 같다. 이러니 화해나 상생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세태가 이러니까 늦었지만 남의 이야기를, 상대방의 주장을 끝까지 듣는 태도라도 길러 주기 위해 ‘듣기’ 교육이 강조되는 것 같다.
중생의 삶에서 상대가 없는 경우는 없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자기 표현과 남의 이해는 공존해야 한다. 수행자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기 속의 또 다른 자기와의 무언의 무한한 대화.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을 깨달음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닌지.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11월 (제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