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길들여진 얄팍한 인간

요즈음은 어떤 좌석에서 어떤 주제의 이야기가 나와도 허술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다들 한마디씩 거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교육이든 국제정세든 간에 저마다 전문가처럼 말한다. 다들 자기 나름의 주장이 분명하다. 여기엔 기본적으로 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매스컴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는 다른 매스컴보다 인터넷의 영향이 그 무엇보다 큰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일컬어 ‘인터넷에 길들여졌다’ 또는 ‘인터넷에 중독되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다 보니 크게 깊이 있고 체계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간단히 한마디씩 던지는 말로서는 일견 전문가와 구분이 힘들 수도 있다.

인터넷의 위력은 지난 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문’ 때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가.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역기능도 또한 만만찮다. 지난 달 중순 모 일간지의 기사에서 읽은 이야기다. 미국 미시간대학 의과대학 교수이자 블로거(blogger)인 ‘브루스 프리드먼’은 이제 더 이상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는 못 읽겠다고 털어놨는데, 이유인즉 ‘인터넷에서 수많은 단문(短文) 자료들을 훑다보니 생각하는 것도 스타카토(staccato)형이 되었다’며, 블로거에서도 3~4단 정도의 단락이 넘는 글은 이제 부담스러워 건너뛰게 된다고 하소연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터넷에 중독되다시피 한 사람들은 인터넷의 여러 기능 중에서도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찾아주는 검색기능에의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가 일상의 문제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화두가 ‘Know how(어떻게 해야 하지?)’였는데, 작금의 정보화사회에서는 ‘Know where(지식 정보가 어디에 있지?)’로 바뀌었으니까 그 정보를 찾기 위하여 책을 뒤질 필요도 없고 얻은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검색엔진이나 웹사이트가 다른 정보채널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들의 목표는 분명하다. 세계 최대의 검색엔진 ‘구글(google)’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은 ’세계의 모든 정보를 우리의 뇌 혹은 그보다 더 영리한 인공두뇌에 직접 연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인터넷에 중독된 인간의 두뇌가 ‘생각하고 고뇌하고 사색하는 인간의 기능’을 앗아간다는 사실이다.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책을 뒤지고 선지식에게 물어보고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 본래의 모습과 사유방식을 변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시체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검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두뇌작용과 사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IT혁명은 지금까지의 깊이 있고 폭넓은 사고를 통한 인간 대신 어쩌면 사유공간이 좁아진 얄팍한 인간형을 새로이 탄생시키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최근 학생들의 과제물이나 취업 때의 자기소개서도 고민할 필요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 이미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자기 기호에 맞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특히 현대와 같이 속도 개념 즉 촌각을 다투는 시간을 생명으로 하는 시대에선 누가 더 빨리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여 활용하는가 하는 것도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도 경박하고 조급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참고 견디며 기다릴(堪忍待)’ 줄 아는 인간의 미덕이 사라질까 두렵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인욕(忍辱)은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니 안락에 이르는 길이다. 인욕은 몸을 지켜주니 성자의 기뻐하는 바다….’ 라고 하셨으니 인터넷을 통해 조금 빨리 이루고 남보다 앞서 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영원한 안락과 깨달음을 저해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김형춘 香岩(반야거사회장,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8월 제93호

인생의 가치

요즈음엔 예술도 상품가치로 평가된다고 한다. 예술품을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그 작품을 만든 작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좀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만 세태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도 뒷맛이 씁쓰레하다. 외국의 유명한 경매회사를 통해 한국의 박수근 화백이나 김환기 화백 등의 작품이 높은 값에 거래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정작 예술이 상품가치로 평가된다고 하니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좀더 나아가면 종교나 철학도 상품가치로 평가되지 않을까 두렵다.

이미 과학이나 기술, 의학 등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지적재산들이 상품가치로 평가되고, 기업이미지나 상표, 인터넷의 도메인 등도 화폐가치로 환산된 지 오래다. 지난해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황우석 교수 파문도 따지고 보면 국제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파장의 큰 몫을 차지한 것으로 안다.

이처럼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화폐단위로 환산하는 이면에는 옛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근본이 물질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인의 거의 대부분이 물질주의(物質主義), 자연주의(自然主義) 인생관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 즉 자연이라 보아왔고, 인간을 인간되게 한 것은 육체로서의 자연이며 그때의 자연이란 곧 물질을 의미한 것이다. 넓은 의미의 자연법칙이 인간의 생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육체의 법칙이 생리의 법칙을 이끌어 내고 생리적 조건이 그대로 심리적인 작용의 규범이 된다고 보았다. 이 심리적인 규범 안에서 우리들의 정신은 여러 가지 활동과 사상 내용을 만들어 낸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도덕과 윤리, 학문과 진리도 큰골에 의한 의식작용에 지나지 못하며, 모든 문화ㆍ사상ㆍ학문은 마침내 신체로서의 자연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19세기 중엽 유물론(唯物論)이 기승을 부릴 때에는 물질 이외에는 존재가 없으며, 이 우주가 물질 및 물체로 되어 있는 것같이 인간도 하나의 물질현상이며 발달된 생물이 곧 인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에 뿌리를 둔 사조가 물질주의, 곧 자연주의 인생관이며,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부류에는 공산주의ㆍ실증주의ㆍ실용주의ㆍ경험주의ㆍ과학정신론 등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입장은 단순하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나고 자라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며, 물질세계를 어떻게 잘 이용하고 정복할 것이냐에 생의 의미를 두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이 인간을 본위로 삼고 인간을 자연의 부속물이나 신의 피조물이 아닌 인간중심주의, 즉 휴머니즘 또는 정신주의 인생관이 있지만 그 세력은 물질주의에 비하면 극히 약하다. 이들의 신념에는 ‘자유와 이성’을 강조하여 자연을 지배ㆍ정복하여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권위’를 위해서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귀중한 것이며 이성은 거의 만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기에 최대의 노력, 최선의 결실이 인간의 행복과 희망과 장래를 약속해 준다고 보았다. 대개 이들은 도덕과 윤리의 신봉자들이 되고, 오늘날 대륙의 철학적 사조로 느끼고 있는 ‘실존주의’가 바로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주의 인생관이나 휴머니즘적인 이상주의 인생관으로서는 유한(有限)에 대한 무한(無限), 유(有)에 대하여 무(無), 생(生)에 대한 사(死)가 우리의 생활과 현실인 이상 종교와 인생관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겠다.

인간의 삶에 물질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처럼 자유와 이성의 정신세계를 뺀다면 이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다 인간의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대도 저버릴 수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는 것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의 태도 즉 가치관을 견지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함이 아닌가.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4월 제77호

인도에의 항변(抗辯)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나라, 인도.

넓은 국토, 10억이 넘는 인구, 다양한 인종, 복잡한 언어 분포, 이질적인 종교, 극심한 빈부 격차, 교육의 차이, 수천 년을 내려온 사회신분제도 등 그야말로 어느 것을 보고 인도를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인도인들은 다양성과 이질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전통을 계승하여 왔고, 그 점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여기는 인도야!” 라고 큰소리쳐도 서투른 부처님 제자는 ‘아니야! 인도는 변해야 돼! 0.7% 부처님나라로는 안 돼!’라고 항변하고 싶다. 이처럼 거대한 나라의 많은 문제점들이 하루아침에 해소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안다. 이러한 현실 여건 속에서도 느리고 힘든 과정이긴 하나 인도가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으로 확인하였다. 국민 대다수가 아직도 오랜 전통사회의 생활양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바 특히 종교와 카스트제도는 인도인의 생활을 지배하는 가장 큰 요소로서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종교 없는 생활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것 같다. ‘종교를 위한 삶인지, 삶을 위한 종교인지?’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부분 아리안족이 인도대륙을 침공하여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것 이다. 기원전 2천년에서 1천5백년 사이 아리안은 인더스 유역에 침입하여 드라비다인을 정복하였고, 점차 동쪽으로 갠지스 유역을 따라 기원전 8세기 경에는 벵갈 지역까지 이동하여 정복자로서 ‘카스트’의 상층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들 아리안은 지배계층으로서 피지배 원주민과 차등을 강조하면서 피부색ㆍ직업 등에 따라 계층을 나누었고, 또 카스트 안에서도 다시 수많은 ‘sub-caste’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들 ‘카스트(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불가촉 천민)’는 ‘마누(Manu)법전’에 명기된 이래 전통적 관습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제약하는 악습이 되고 만 것이다.

수천 년 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온 카스트제도는 이미 법적으로 폐지되었고 근대적인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붕괴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인도인의 생활저변에 남아 있다. 문제는 이 악습의 뒤편에 종교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3천여 년 전 인도에 들어와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를 만들고, 그 토대 위에서 지배계급으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아리안들의 비인간적 횡포라고나 할까.

힌두교인들은 신들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고유의 신성을 지닌 채 여러 형상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고 믿고 있단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 역시 현세의 육신에 머물지 않고 끝없는 윤회를 반복하면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에겐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최고의 축복이란다. 이러한 믿음은 비인간적인 카스트제도에 대해서도 무비판적인 수용을 초래한 것이다. 이들은 비록 현재의 삶이 누추하고 천한 카스트에 속할지라도 전생의 업보라고 여기고 응전을 포기하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어쩌면 다시 천민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의식이 이러니 신분상승이나 평등은 아예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잘못된 제도와 사회적 모순을 뜯어고치지는 못할지언정 종교가 그것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되겠다. 인도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카스트제도의 완전타파와 긍정적인 내세관은 존중하되 현세관을 재조명하는 방향으로의 종교개혁이 필요하겠다.

최근엔 이따금씩 카스트제도에 반대하는 데모도 있다고 하니 하루빨리 이 제도의 늪에서 헤어나야 할 것이다. 그 한 방편으로 룸비니의 ‘대성석가사’나 쉬라바스티의 ‘천축선원’처럼 한국 불교계에서 더 적극적인 인도 포교에 나서서 0.7%에 불과한 불자의 수를 빨리 늘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도와 인도인을 위함도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들 부처님 제자들은 한없이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두 축인’지혜와 자비’는 인간 평등의 바탕 위에 존재하니까.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보현보살’ (끝)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4월 제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