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생명

올해 봄의 우리나라 가뭄은 기상관측 이후 가히 최악의 사태에 이르렀지만 장마라고 하는 계절적 기상현상이 그래도 생명체들의 씨를 말리는 것만은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밀어닥친 집중호우와 태풍까지 곁들여 이젠 물난리를 겪게 되었다.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가뭄이 들어도 걱정 장마가 져도 걱정. 옛 이야기에 나오는 나막신 장수와 우산 장수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과 다를 바 아니다. 최근 지구환경 문제의 핵심과제인 온난화 현상이나 사막화 현상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지구 오존층의 파괴가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양의 동서나 남ㆍ북반구나 문명국가와 미개국가를 가릴 것 없이 때로는 홍수가 때로는 가뭄의 재앙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인간의 삶의 터전을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룩해 놓은 알량한 과학 지식으로는 속수무책이다. 다급해지면 속죄하는 심경으로 하늘만 쳐다볼 뿐. 오늘 아침 모 일간지에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문학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는 물론이고, 예술이나 종교가 생존을 앞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최근의 날씨와 관련지어 자연과 생명이 당하는 고통이 안쓰럽다고 하였다. 다시금 생명과 환경과 문화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몇 년 전 류시화 시인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연설문을 번역하여 엮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문명 비판적인, 반문명적인 메시지와 함께 그들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낸 글이라고 생각했다. 제도적인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자연주의자로서, 대지를 사랑하고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아이들에게도 늘 자연에 가까이 가도록 해서 부드러운 심장을 갖도록 했다. 따뜻한 대지, 부드러운 공기, 재잘거리는 시냇물,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밭,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벌 한 마리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인디언은 대지의 일부이며, 대지는 그들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그들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그들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의 꽃의 수액과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가 하나이기에 그들 모두는 같은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조용한 외침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증명하기에 족했다.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정령이 만들어 놓은 대로 세상의 만물에 만족하고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그렇지 않다. 강이나 산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헐고 바꿔버린다. 문명인들은 그것을 창조라고 하고 건설이라고 하지만 인디언들의 눈에는 철없는 파괴로 보일 뿐이다.

이따금 시골에 가면 경지정리니, 직강공사니, 하천정비라는 이름으로 마을 앞의 개천 공사를 잘못하여 큰 물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촌로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엇이 인간을 위하는 일이며, 자연과 생명을 위하는 일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구 위의 유일한 생산자는 식물이요, 동물은 완벽한 소비자이며, 최대의 소비자는 인간이라고 한 어느 환경론자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니 소비자라는 말 대신에 파괴자라고 하면 무리일까.

최근에 또 불사 문제로 안팎이 뒤숭숭하다. 생각해 볼 일이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7월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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