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의 역설(paradox of thrift)

저축은 미덕인가 악덕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약과 저축은 경제생활에서 으뜸가는 미덕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예부터 큰 부자는 하늘이 점지하고 작은 부자는 근검절약하면 된다고 하였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여겨왔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소비‘가 미덕이고 ‘저축’이 악덕이라는 말이 나왔다. 저축이 악덕이면 왜 어릴 때부터 자녀를 교육할 때 절약과 저축을 그렇게 강조하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저축을 장려하는 각종 정책을 펴고 홍보에 힘을 기울이는가.

이런 저축이 왜 악덕인가.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에 의하면 한 경제권 안의 경제상황을 좌우하는 것은 ‘수요(需要)의 크기’라고 한다. 수요는 크게 보아 소비, 투자, 정부지출로 구성되는데 소비자의 소비지출, 기업의 투자지출, 그리고 정부 부분의 지출이 총수요의 주요한 요소들인데 그 중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총수요의 2/3를 차지하는 것이 소비지출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저축을 늘린다면 소비가 줄어들 것은 뻔한 일이고 따라서 총수요도 줄어든다. 총수요가 줄어들면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고용수준도 점차 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실업이 늘고 경제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자연히 보수적이 되어 소비를 줄이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경제는 더욱 위축되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더욱 과감하게 소비를 해야 할텐데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려 한 것이 이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서 ‘저축은 악덕’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대개 선진국에서의 불경기는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저축에 관한 한 지독히도 보수적이고 일상화된 짠돌이다. 얼마 전 두 일본인 교수와 이즈음의 경제상황 이야기가 나왔을 때다. 경기가 불황에 접어들어 어렵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기 무섭게 일본인들은 초 긴축 절약생활을 한단다. 특히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저소득층의 생활보호대상자들은 매월 일정금액의 돈이 통장으로 입금되면 겨우 연명할 정도만 지출하고 저축으로 꽁꽁 묶어 둔단다. 내수가 살아나지 않고 경제가 더 어려워지자 마지못해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현금 대신 일정금액의 상품권과 같은 것을 지급하였더니 이번엔 가게에 가서 꼭 필요한 만큼의 물건만 사고는 나머지를 현금으로 받아다가 역시 장롱 속에 넣어두거나 아니면 아예 어음처럼 현금으로 할인하여 저축을 한다고 했다. 이러니 저축이 ‘미덕’이 되겠는가.

‘저축의 역설’은 이처럼 사람들이 저축을 늘리려 할 때 오히려 저축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저축을 늘려 소비를 줄이고 그렇게 되면 총수요가 줄어 생산활동이 위축되고 결국에는 소득이 감소되는 결과를 빚는다. 이제 소득이 줄어드니 저축을 늘릴 수가 없다. 이 과정을 가리켜 ‘저축의 역설’ 또는 ‘절약의 역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불과 30~40년 전 개발이 한창일 때에는 거의 강제로(?) 저축을 하게 하는 ‘국민저축’제도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소비가 미덕’이라며 떠들다가 고도성장의 끝자락이 보이자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며 자조 섞인 자성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경제 또한 ‘소비와 저축’의 조화에서 그 묘를 찾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수(內需) 만으로 자국의 경제가 돌아 갈려면 적어도 인구가 1억은 되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인구도 자원도 한계에 와 있으니 걱정이다. 이런 때일수록 위정자들의 노력과 면밀하고 용의주도한 경제 정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정부는 국민과 야당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 하고, 국민은 이를 신뢰하고 힘을 모으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한데 걱정 또 걱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나누고 배려하고 보시하고 절제함을 강조하셨다. 많이 가진 자는 베풀고 배려하고 나누는가 하면 적게 가진 자는 근검절약하고 저축하라는 뜻이리라.

香岩 김 형 춘 글. 월간반야 2009년 2월 제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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