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17)42장경(2)

<사십이장경>은 일상의 수행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덕목을 간추려 설해 놓은 경전이다. 특정 부류의 곧 출가자나 재가자를 구별해서 설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 교훈을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하고 있다. 더욱이 소승적인 차원을 넘어 자비와 인욕의 행을 설하고 보시를 권장하며 참회를 강조하는 대승적인 수행 정신을 알기 쉽게 설해 놓고 있다.

부처님께서 복은 항상 자비를 베푸는 데 있으며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화를 가져온다고 하시면서, 악한 자가 어진 자를 해치려는 것은 마치 하늘에 대고 침을 뱉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불도를 배우기 위해 힘써서 중생들을 널리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덕을 베풀고 재물을 베풀어주는 착한 일을 한다면 얻는 복이 한없이 클 것이라고 설했다. 설사 남이 악으로 대하더라도 자기는 선으로써 대하라고 가르쳤다. 깨달음의 길을 생각하여 순간도 쉬지 말 것이며 흡사 뗏목이 강의 양쪽에 닿지 않고 흐르듯이 수행해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중도의 실천도 강조한다.

또한 부처님은 수행에도 자기의 근기에 맞게 하는 조현지법(調絃之法)이 있다고 하면서 극단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하라 하였다. 조현지법이란 거문고 줄을 알맞게 조여 놓고 곡조를 연주해야 제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너무 느슨하게 해 놓으면 거문고의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으며 또 너무 팽팽히 조여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줄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 했다. 여기서 중도(中道, Madham ma- pratipad)라는 말씀을 하였다.

이 중도의 뜻이 불교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불교를 사상적으로 표현할 때 중도사상이라 하기도 한다. 대승소승을 막론하고 중요시되는 불교의 근본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중도이다. 중도란 치우치지 않은 중정(中正)의 도(道)란 뜻으로 곧 양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중도설은 불교의 각 종파와 경전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방법으로 설해지기도 한다. 가령 {아함경}에서 설해지는 팔정도(八聖道)의 실천에 있어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활태도를 버리고 중도에 의하여 지혜를 완성하여 열반을 얻으므로 팔정도를 중도라 한다. 또 12연기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는 것은 常見(중생의 생명의 주체인 아(我)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생각)과 斷見(사후에 아무것도 없는 滅無로 돌아간다는 생각) 또는 有無에 치우친 생각에서 떠나는 것을 중도라 했다.

또 대승의 중관파(中觀派)에서는 반야바라밀을 근본 수행으로 삼으면서 모든 집착과 분별을 떠난 공해진 경지의 무소득 상태에 있는 것을 중도라 한다. 또 중국의 천태사상에 있어서는 삼관(三觀)을 설하면서 공으로 보는 관점인 공관(空觀)과 현상의 가상을 기준하는 가관(假觀)에서 공관·가관을 함께 초월하면서 ‘공(空)’이 ‘가(假)’이고 ‘가(假)’가 ‘공(空)’인 양변을 회통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하며 이것이 곧 중도라 한다. 우리 불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곧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다는 중도의 사상을 설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의 낙을 버리는 것이 중도라 하기도 하고 이것을 부처님의 근본법륜의 중도대의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두 변이 있으니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여 욕망은 허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도의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이 두 변을 버리고 곧 중도를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온갖 욕망으로 애욕에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고로움으로써 현성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한전의 『오분율가』, 남전의 『율부』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다.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

초기경전 (16)42장경(四十二章經)

“마음의 때가 다하면 영혼이 오고가는 곳, 생사가 나아가는 곳을 알게 되리라(心垢盡乃至靈魂所往來生死所起向).”

부처님이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예, 밥 한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르는구나.”

세번째로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예, 숨 한 번 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장하다, 그대는 도를 바로 알았구나!”

이상은 <42장경>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42장경>은 무척 간단명료한 경이다. 짧은 경문을 통하여 수도자들의 수행관을 밝게 명시해 놓은 경전이다. 전문이 모두 42장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42장경>이라 한다. 이 경은 흔히 <유교경(遺敎經)>과 치문에 나오는 <위산경책(僞山警策)>과 더불어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고 한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가장 먼저 번역된 경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이 경의 서문에는 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이 경이 중국에 전해 온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후한의 효(孝) 명제 때이다. 왕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이마에서 금빛을 발하고 있는 이상한 신인(神人)이 그의 궁전 앞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꿈을 깬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이 신인이 누군인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신하 중 한 사람이 그 신인이 천축(天竺)의 성인 부처님일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황제는 곧 사람을 파견하여 월지국으로 보내 불경을 얻어 오게 하였다. 이때 필사해 온 것이 이 <사십이장경>이었다 한다.

효명제가 사신을 월지국으로 보내 불경을 얻어 오게 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설해지고 있다. 중국의 불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출삼장기(出三藏記)>나 그후에 저술된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 등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을 후한 명제 영평 10년(서기 67년)으로 보는 설이 생겼다. 달마 스님이 선(禪)을 가지고 온 때는 서기 527년 양나라 무제 때이다. 그러니까 선종의 선이 중국으로 수입되기 이전 460년 전에 불경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경을 번역한 사람이 <역대삼보기> 등에 가섭마등과 법란 두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한역으로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고려대장경>, <송장경>, <원장경>에 수록된 것과 명장에 수록된 송나라 진종 때의 주 <42장경> 그리고 송의 중기 11C에 선종인 조동종에서 수축이 주한 불성 『42장경 주』와 도패가 지은 <불조삼경지남(佛祖三經指南)>에 든 것 등이다. 마등과 법란이 번역한 원형과 자구(字句)가 상이한 것도 있고 형식과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 경도 여러 경전에서 인용하여 뽑은 인초경임이 형식과 내용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각 장을 따라 경 이름을 붙인 것이 유교의 십팔 장으로 되어 있는 효경(孝經)과 비슷하며 내용에 있어서 <유교경> <법구비유경>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에 설해진 내용과 같은 것이 많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 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든 이 경을 불조삼경에 넣어 중국 초기 불교에서는 대단히 중요시 여긴 경인 점은 분명하다. 이 경에 설해진 내용도 아함부에서 설해 놓은 ‘고(苦), 공(空), 무아(無我)가 주된 내용이다.

<35장>에 ‘사람은 태어남으로부터 늙음에 이르고, 늙음으로부터 병에 이르고, 병으로부터 죽음에 이른다. 그 괴로움은 한량이 없다. 마음은 괴롭고 죄는 쌓인다. 그러면서도 생사 또한 쉬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설하여 인생의 괴로운 상황을 말하며 또 하늘과 땅과 산과 냇물 등 천지만상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무상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더욱 절실하게 나타낸 것이 사람의 목숨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한 말이다.

<18장>에서는 무아를 설하여 몸 속의 4대(四大, mah bh ta) 곧 지(地)·수(水)·화(火)·풍(風)의 화합물인 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그리고 이 같은 어리석음과 고뇌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31장>에서 설명하면서 ‘사람은 애욕으로부터 근심을 낳고, 근심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이 없으면 근심도 없고, 근심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고 하였다. 애욕을 고뇌의 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경은 애욕을 두려워해야 할 인과를 향나무가 스스로 타는 것에 비유하고 또 칼날에 묻은 꿀을 혀로 핥는 것에 비유하고 혹은 횃불이 손을 태우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애욕을 끊고 공을 지키면 도의 참모습을 보리라.’ 이 말씀은 곧 도의 눈을 상실하는 근원적인 것은 애욕에 있다는 것이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

초기경전 (15)본생경

불교의 경전 가운데 『본생경(本生經, Jataka)』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다. 팔리어와 범어의 어원으로는 자타카(Jataka)라는 말인데, 이 뜻은 부처님의 전생에 있었던 이야기라는 뜻이며, 또 그것을 모아 놓은 경이라 하여 본생경(本生經)이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불교의 경전에서만 취재된 것이 아니고 고대 인도의 일반적인 설화와 우화 비유 등에서 취재되어 종교적 의미로 승화되어 다양한 상징성을 띠고 설해지는 법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부처님의 제자와 신도들은 떠나간 부처님의 덕을 기리고, 그 인격을 사모하여 부처님을 오래오래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어 여러 곳에 사리탑을 세우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의 유물인 바루, 의복, 치아, 손톱 등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유품을 안치하는 탑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계셨던 곳에 기념하는 건물을 세우기도 한다. 녹야원이나 기원정사가 세워진 것 등이 그 예이다. 녹야원(鹿野苑)은 최초로 설법을 하신 곳이고 기원정사(祇園精舍)는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던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곳을 성지라 해서 순례하는 풍습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수하는 운동이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법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과 아울러 부처님의 위대함을 과거 전생까지 소급해 설명하는 전생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말하자면 한 인물의 전기가 과거의 전생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미화시키는 배경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이 생존하여 계셨을 때, 자주 부처님을 뵈옵고 생생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모은 역사적인 사실의 이야기가 먼저 결집이 되고 난 뒤, 그런 다음에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처님을 직접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의 시대에 와서 부처님에 대해 다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었으므로, 나름대로의 부처님에 대해 생애를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 상상력이 작용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부처님을 초인적으로 설명하는 이야기와 신비적으로 꾸미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부처님을 성인으로 대하는 추앙심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보통 인간보다는 비범한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믿게 되면서 부처님의 그 비범한 큰 힘은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믿게 된다.

『아함경』을 위시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여섯 가지의 신통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신통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탁월한 수행자들의 위력을 묘사하면서 수행의 공덕을 찬탄하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이 얼마나 큰 기적과 신통을 발휘했느냐는 역사적 사실의 확인보다는 후세에 와서 부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부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신통을 부릴 수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경전 속에 나오는 장면에 보면 부처님과 제자들이 기적을 나타내는 모습이 있다. 그만큼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커지면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100년쯤 되자 부처님의 본생에 대한 이야기가 부처님을 설명하는 중요한 의미가 된다. ‘본생(本生)’이란 말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본래의 생이란 뜻으로, 곧 과거세인 전생을 뜻하는 말이다. 이 본생의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의 인간적 모습을 띠고 있던 부처님이 초인적이고 신화적인 인물로 부상되면서 부처님 설법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수준이 더욱 높아져, 불교의 교리가 더욱 심원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동시에 이러한 과정이 후대에 와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낳게 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된다.

부처님의 행적이 과거 전생에까지 소급되어 비약적으로 상상되고, 이 윤회사상은 부처님의 역사상의 한 생애가 과거 생의 오랜 인행(因行)과 관계지어져 설명된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이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하여 고행한 금생인 한 생의 사실만으로는 성불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며, 이미 과거의 무수한 생 동안에 수행을 한 인행시(因行時)의 공덕으로 금생에 성불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인행시의 수행 모습을 기술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반 민중에게 부처님에 대한 감동과 감명을 더 깊게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기술된 것이 바로 ‘자타카(Jataka)’, 즉 『본생경(本生經)』이다.

이 『본생경』은 그때까지 민간에 성행하고 있던 전설과 설화들을 결합하여, 한편으로는 민간신앙과 밀착하게 된다. 민간설화가 각색되어 『자타카』에 유입되고 그것이 다시 경전의 체계를 갖추어 비유와 인연설화로 불법을 설하는 매체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루어진 {본생경}은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직접 설한 형식을 취하여 불교 경전의 한 부류를 이루어 초기불교의 사상을 엿보는 중요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 『자타까[본생경]』은 22편에 547장의 전생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먼저 서게라는 삼보에 귀의하는 게송이 나오고 그 다음 세 가지 인연이야기가 나온다. 「먼 인연 이야기」와 「멀지 않은 인연 이야기」 그리고 「가까운 인연 이야기」가 나온다. 「먼 인연 이야기」란 아주 오래된 전생 이야기를 말하고 <가까운 인연 이야기>란 가까운 전생 이야기를 뜻한다.

「먼 인연 이야기」에서는 ‘수메다’라는 바라문이야기가 나온다. 흔히 선혜 보살이라고 한역되어 알려지고 있는 부처님의 먼 전생 이야기를 뜻하는 내용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부터 4아승지 10만 겁 전의 옛날에 아마라바이티[不死城]이라는 도시가 있었고 거기에 ‘수메다’라는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훌륭한 가문의 집안에서 태어나 7대로 내려오면서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한 일이 없이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았고 더없이 아름답고 뛰어난 얼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일은 돌보지 않고 오직 바라문의 학예만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 집의 재산을 관리하던 집사가 쇠로 만든 장부를 가지고 와서 돈과 금, 은, 진주와 그 밖의 보물을 넣어둔 창고를 열고 “도련님, 이만큼은 도련님의 어머니 재산이고, 이만큼은 아버지의 재산이며, 이만큼은 조부의 재산이고, 이만큼은 증조부의 재산”이라고 설명하면서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상의 재산 몫을 이야기 해 주고 “이제 이것을 도련님이 맡아” 달라고 하였다. 이에 현명한 수메다는 ‘이만한 재산을 모아 두고도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 그 밖의 조상님네는 세상을 떠날 때는 한 푼도 가져 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가져 갈 종자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그 나라 임금님께 알리고 북을 치면서 온 도시 안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모아 보시를 행한 뒤에 자신의 집을 떠나 고행의 길에 들어갔다.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수메다의 이야기를 한다.

이상은 「먼 인연이야기」의 서두에 서술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먼 과거 전생이야기를 수메다를 통하여 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의 재산을 전부 보시하고 출가 고행의 길을 떠났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타카}의 이야기들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보살행 실천을 뜻하는 이야기이다. 베풀어 주는 마음, 보시하는 마음에서 선근이 심어지고 이 마음에서 성불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3년 11월 (제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