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2)백유경

불경 가운데서 『이솝우화』만큼이나 재미나는 설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 경이 있다. 여러 가지 비유로써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일상의 지혜를 닦게 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바로 『백유경(百喩經, Satavadana-s?tra)』으로 백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였다 하여 ‘백 가지 비유경’ 『백유경』이라 한다. 경의 전문을 모두 읽어 보면 98가지의 짧은 이야기가 모아져 있는데 한결같이 어리석음을 풍자해 놓은 이야기이다.

불경 가운데서, 비유문학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부처님의 교훈을 순전히 비유로써 설해 놓은 것을 아파타나(阿波陀那, Avad?na)라 한다. 『12부경』 혹은 『12분경』이라 하여 불교 경전을 문체 및 기술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12가지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비유경』은 그 중의 하나로 이 경은 세상의 비유와 우화로써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한 경에서 군데군데 비유를 말한 것과 한 경 전체가 비유와 우화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백유경』은 『법구 비유경』과 더불어 제목에 비유란 말이 들어 있어 경 전체가 비유설화임을 밝히고 있다.

전부 4권으로 되어 있는데 5세기에 인도의 승려 상가세나(僧伽斯那, Sanghasena) 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제자 구나브리디(求那毘地, Gunavrddhi) 에 의하여 서기 492년에 한문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설법의 대상이 평범한 일반 보통 사람으로 전문적인 수도인만이 아닌 것이 특징이며, 따라서 사변적인 논리나 교리적인 난해성이 전혀 없는 경전이다.

여러 가지 비유의 우화 중에는 11세기 소마데바라(Somadeva)는 사람이 지은 유명한 설화집인 『카다아 사릿 사가린(katha- sarit-sagara』(‘전설이 흐르는 바다’라는 의미)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인도 고전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또 그리스의 우화 작가 이솝이 지은 『이솝우화』와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옛날 어떤 미련한 부부가 있었다. 그는 어리석어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다른 부잣집에 가서 삼층으로 지어진 누각을 보았다. 높고 넓으며 웅장하고 화려하여 보기에 퍽 시원해 보였다. 그는 무척 부러워하여 이렇게 생각을 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 나만 못한 저 사람이 이렇게 좋은 누각을 지어 가지고 있는데 나는 왜 이런 누각을 짓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는 곧 목수를 불러 물었다.

“저 집처럼 좋은 누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목수는 답하기를

“그것은 바로 내가 지은 집입니다.”

“그럼 내게도 저와 똑같은 누각을 지어 다오.”

이에 목수는 곧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 누각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 것을 보고 갑자기 의혹이 생겨 목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1·2층을 먼저 짓고 나중에 삼층을 지을 것입니다.”

“나는 아래 두 층은 가지고 쉽지 않다. 먼저 제일 위층인 삼층만 지어다오.”

목수는 대답하기를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래층의 집을 짓지 않고 어떻게 2층집을 지을 수 있으며, 2층집을 짓지 않고 어찌 3층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고집을 부리며

“내게는 아래 2층은 필요없다. 반드시 3층인 맨 위층 집만 지어다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사람들이 모두 이 말을 듣고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아래층을 짓지 않고 위층만 지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라고 하였다.

비유하면 이렇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정진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도를 얻겠다는 말을 하지만 노력 없이 결과만 바라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목적 달성을 위한 과정의 준비 없이 그저 공만 바란다. 노력 없이 어떻게 공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이상 소개한 것은 98가지 이야기 중 열 번째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백유경』의 우화는 모두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세상의 인과법(因果法)을 모르거나 무시한다는 이야기이다. 인과법문을 설해 놓은 이 경의 참뜻은 지혜롭고 바르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보편적인 윤리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좋으면 결과도 좋고 원인이 나쁘면 결과도 나쁘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불교의 기본 도덕·윤리정신이다. 어리석음은 지혜의 반대인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인생의 참 가치이다. 더구나 불교 신행에 있어서 인과의 도리를 부정할 때에는 바른 신행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발무인과(撥無因果) 곧 인과를 무시하는 것은 불법에 대한 역적죄라고 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한 생각이 인생을 그르치고 망하게 하는 수가 허다하다.

백유경에는 또 현대의 유모어 같은 이야기도 설해져 있다. 우리 국문학사에 나오는〈노부처 쟁병 설화〉와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노부부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웃에서 떡을 가져와 이 부부가 접시에 담은 떡을 방안에 놓아두고 내기를 하여 이기는 사람이 먹자고 하였다. 그 내기는 서로 말을 하지 않은 묵언을 누가 더 오래하는가였다. 곧 두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 묵언시합을 하였다. 먼저 말을 하는 사람은 지게 되어 떡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떡을 사이에 놓고 말없이 견디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부엌에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갔다. 도둑이 물건을 꺼내 가는 것을 샛문으로 보고도 떡을 차지하려고 말없이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본 할머니가 “영감! 도둑이 물건을 가져 가는데도 떡 욕심 때문에 말도 하지 않고 앉았소?”라고 화가 나서 핀잔을 주니, 영감님은 할머니에게 “이건 내 떡이니 내가 먹게 되었소”라고 했다는 매우 우스운 이야기이다.

이것은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큰 손해를 본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일깨워 놓은 교훈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10월 (제23호)

초기경전 (19)밀린다왕문경 2

왕은 또 나가세나에게 무엇 때문에 출가했으며 또 출가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나가세나 스님! 스님이 출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으며 또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원컨대 인생의 괴로움을 없애고 그 괴로움이 다시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우리는 출가를 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최상의 목적은 생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인 것입니다.”

왕은 이 대답에 만족을 얻지 못하여 다시 날카롭게 묻는다.

“스님! 출가자 모두가 이 목적을 위해서 출가를 하는 것인가요?”

“대왕이여!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적의 위험을 받고 출가하고, 어떤 사람은 부채에 시달리다가 출가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활을 위해서 출가를 합니다. 그러나 떳떳하게 출가를 하는 사람들은 이 목적을 위해서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출가의 본래 목적과 현실적인 상황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나가세나 스님! 그렇다면 스님은 이 목적을 위해 출가를 한 것입니까?”

“대왕이여! 사실은 나는 유년 시절에 출가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야말로 이 목적을 위해서 내가 출가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출가 수행자인 부처님의 제자들은 현자이다. 이들은 나를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를 하는 일은 참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라고 알았고, 또 본 것입니다.”

다음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불평등하게 살아가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가세나 스님!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를 못한 것인가요? 즉 어떤 사람은 명이 짧고 또 어떤 사람은 명이 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이 많고, 어떤 사람은 병이 적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추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우아하고 단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힘이 강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이 적고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천한 집안에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고귀한 집안에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고 어떤 사람은 현명합니다.”

이 질문에 나가세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대왕이여! 어째서 수목은 똑같지 않은 것일까요? 어떤 나무의 과일은 시큼하고 어떤 나무의 것은 달콤하고 어떤 것은 떫고 어떤 것은 쓴데 왜 그럴까요?”

“스님! 나는 그 나무들의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은 각기의 업을 가지고 있고 업을 상속하며 업을 모태로 하고 업을 친족으로 하고 업을 의지하고 있다. 업은 모든 생명체를 전한 것과 귀한 것으로 차별한다.’고요”

이렇게 말해 주자 밀린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한다. 나가세나의 해답은 인간의 불평등을 과거에 누적된 업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초기 불교에서는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사람에게 신분의 차이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예를 들면 숫다니파타에 ‘태어남으로 인하여 바라문인 것은 아니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바라문이 아닌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하여 바라문인 것이요 행위로 인하여 바란문이 아닌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행위는 업(Karma)을 말하는 것이다. 왕과 나가세나의 열띤 담론이 계속되면서 불교의 교리적인 사고 유형이 서구의 사고 유형을 갖고 있는 한 왕을 끝내 이해시키고 만다.

“나가세나존자여, 사람이 죽을 때 윤회의 주체가 저 세상에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럴 수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한 등에서 딴 등에 불을 붙인다고 합시다. 이 경우 한 등이 딴 등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가 한 몸에서 딴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그대가 어렸을 때 어떤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합니까?”

“그렇습니다.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그대에게 옮겨 와 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몸이 옮김 없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왕이 물었다.

“나가세나 존자여, 선행이나 악행을 짓게 되는 업(業)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왕이여, 그림자가 형체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업은 인격적 개체에 수반됩니다.”

“업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을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럴 수 없습니다.”

“대와이여, 마찬가지로 생명체와 연속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업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왕이 물었다.

“존자여,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것을 압니까?”

“대왕이여, 알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농부가 곡식을 땅에 심고 나서 비가 알맞게 내린다면 그는 곡식이 싹이 터서 나오리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압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저 세상에 장차 태어날 자는 자기도 태어날 것을 미리 압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 『미린다 팡하』를 후대의 사람들은 ‘동서의 대화’라고도 말해 왔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3월

/ 지안스님 강의

초기경전 (18)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1

불교의 교리를 두 사람의 논담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경전이 있다. <밀린다 팡하(Milindapanha)>라고 하는 이 경은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이라고 번역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또 한역전에서는<나선(那先) 비구경>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경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경전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으나 엄격히 말하면 대론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팔리어 장경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스리랑카 불교에서는 이 <밀린다 팡하>를 장외전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장외전적이란 경·율·논의 삼장에 들어가지 않는 책이란 뜻이다. 그러나 미얀마 불교에서는 경장 속에 포함시켜 수록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밀린다 팡하』는 불교입문서라 할 정도로 불교에 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기원전 2세기에 서북 인도를 침공해 그곳을 지배했던 희랍인 밀린다(Milinda) 왕이 불교 승려 나가세나(Nagasena)와 대담을 전개하여 불교를 이해해 가는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대론서이지만, 나가세나(Nagasena)의 명쾌한 답변이 희랍 왕을 감동시킨 대담의 우수성 등으로 불설을 표방한 여타의 경전과 마찬가지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여 연구되어 왔다.

이 책이 성립된 연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스 왕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 마우리야 왕조가 무너지고 서북 인도는 그리스 왕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그들 왕 가운데 인도 문헌에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 지방을 통치한 메난드로스 왕이다. 이 왕의 이름 ‘메난드로스(Menandros)’를 팔리어로 ‘밀린다’라고 한다. 팔리어 본에는 대론 개시의 경위로 이런 이야기가 먼저 기술되어 있다.

수행승에게 질문을 퍼부어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기로 유명한 왕이 어느 아유파라라는 장로에게 출가의 의의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왕의 반론에 대하여 아유파라가 침묵을 하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왕은 인도는 왕겨처럼 텅 비었으며, 대론을 하여 자기의 의문을 일소시켜 줄 수 있는 수행자는 아무도 없다고 개탄을 한다. 대신 데바만티야는 왕에게 나가세나(Nagasena)라는 장로가 지혜가 있고 변재가 좋으니 왕의 의문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을 한다. 그래서 왕은 나가세나 장로를 찾아갔으며 거기에서 두 사람의 대론이 시작된다.

나가세나를 만난 왕은 먼저 그의 이름을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이 묘하다.

“대왕이시여, 나는 나가세나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이름에 지나지 않고 거기에 인격적 개체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에 밀린다 왕은 무척 놀란 모양이다.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가 자기는 인격적 개체가 아니라고 하니, 그럼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며 듣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의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나가세나로 불리는 존재는 그럼 도대체 누구인가요? 머리카락이 나가세나인가요?”

“대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몸에 털들이 나가세나인가요?”

“대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발톱이 나가세나인가요?”

“대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왕은 이, 피부, 근육, 털 등등의 신체를 구성하는 온갖 부위 하나 하나를 들어가며 따져 묻지만 나가세나는 부정을 한다. 이어서 왕은 물질적인 현체 감수작용, 표상작용, 형성작용, 식멸작용 등 오온을 가지고 어느 것이 나가세나냐고 묻지만 역시 부정을 당한다. 왕은 끝내 나가세나라는 존재의 단적인 것을 찾아내지 못하자 마침내 나가세나가 거짓말을 했다고 힐책을 한다. 이에 나가세나는 반론을 개시한다. 먼저 왕이 걸어서 왔는가, 무엇을 타고 왔는가를 묻고 왕이 수레를 타고 왔다고 대답하자 나가세나는 말한다.

“대왕이여! 만약에 수레를 타고 오셨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나에게 일러주시지 않겠습니까? 대왕이여! 수레의 채가 수레인가요?”

“스님! 그렇지 않습니다.”

“수레의 축이 수레인가요?”

“스님! 그렇지 않습니다.”

“바퀴가 수레인가요?”

“스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멍에인가, 바퀴인가, 채찍인가 하고 따져 묻지만 왕은 계속 부정을 한다.

“대왕이여! 나는 대왕께 몇 번씩이나 물어 보았습니다. 수레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대왕이여! 수레란 단순히 말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수레는 무엇일까요? 대왕께서는 수레는 없다고 하시어 진실이 아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나가세나는 왕의 논법을 몽땅 뒤집어서 왕에게 반격을 가한 것이다. 왕을 채와 기타에 의해서 수레라는 명칭이 생겨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신체의 구성 부분에 의해서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생기며 인격적 개체는 존재하지 낳는다는 대답들 유도해 낸다. 왕은 여기서 나가세나에게 속으로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목의 대화를 일부 학자들이 불교의 무아설을 해석한 이야기로 보고, 또 무아설의 설명에 흔히 이 이야기를 인용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논법이 전통적인 아비달마 교학에 의한 무아설과는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4년 2월 제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