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19)밀린다왕문경 2

왕은 또 나가세나에게 무엇 때문에 출가했으며 또 출가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나가세나 스님! 스님이 출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으며 또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원컨대 인생의 괴로움을 없애고 그 괴로움이 다시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우리는 출가를 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최상의 목적은 생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인 것입니다.”

왕은 이 대답에 만족을 얻지 못하여 다시 날카롭게 묻는다.

“스님! 출가자 모두가 이 목적을 위해서 출가를 하는 것인가요?”

“대왕이여!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적의 위험을 받고 출가하고, 어떤 사람은 부채에 시달리다가 출가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활을 위해서 출가를 합니다. 그러나 떳떳하게 출가를 하는 사람들은 이 목적을 위해서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출가의 본래 목적과 현실적인 상황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나가세나 스님! 그렇다면 스님은 이 목적을 위해 출가를 한 것입니까?”

“대왕이여! 사실은 나는 유년 시절에 출가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야말로 이 목적을 위해서 내가 출가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출가 수행자인 부처님의 제자들은 현자이다. 이들은 나를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를 하는 일은 참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라고 알았고, 또 본 것입니다.”

다음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불평등하게 살아가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가세나 스님!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를 못한 것인가요? 즉 어떤 사람은 명이 짧고 또 어떤 사람은 명이 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이 많고, 어떤 사람은 병이 적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추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우아하고 단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힘이 강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이 적고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천한 집안에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고귀한 집안에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고 어떤 사람은 현명합니다.”

이 질문에 나가세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대왕이여! 어째서 수목은 똑같지 않은 것일까요? 어떤 나무의 과일은 시큼하고 어떤 나무의 것은 달콤하고 어떤 것은 떫고 어떤 것은 쓴데 왜 그럴까요?”

“스님! 나는 그 나무들의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은 각기의 업을 가지고 있고 업을 상속하며 업을 모태로 하고 업을 친족으로 하고 업을 의지하고 있다. 업은 모든 생명체를 전한 것과 귀한 것으로 차별한다.’고요”

이렇게 말해 주자 밀린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한다. 나가세나의 해답은 인간의 불평등을 과거에 누적된 업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초기 불교에서는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사람에게 신분의 차이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예를 들면 숫다니파타에 ‘태어남으로 인하여 바라문인 것은 아니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바라문이 아닌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하여 바라문인 것이요 행위로 인하여 바란문이 아닌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행위는 업(Karma)을 말하는 것이다. 왕과 나가세나의 열띤 담론이 계속되면서 불교의 교리적인 사고 유형이 서구의 사고 유형을 갖고 있는 한 왕을 끝내 이해시키고 만다.

“나가세나존자여, 사람이 죽을 때 윤회의 주체가 저 세상에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럴 수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한 등에서 딴 등에 불을 붙인다고 합시다. 이 경우 한 등이 딴 등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가 한 몸에서 딴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그대가 어렸을 때 어떤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합니까?”

“그렇습니다.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그대에게 옮겨 와 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몸이 옮김 없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왕이 물었다.

“나가세나 존자여, 선행이나 악행을 짓게 되는 업(業)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왕이여, 그림자가 형체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업은 인격적 개체에 수반됩니다.”

“업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을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럴 수 없습니다.”

“대와이여, 마찬가지로 생명체와 연속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업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왕이 물었다.

“존자여,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것을 압니까?”

“대왕이여, 알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농부가 곡식을 땅에 심고 나서 비가 알맞게 내린다면 그는 곡식이 싹이 터서 나오리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압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저 세상에 장차 태어날 자는 자기도 태어날 것을 미리 압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 『미린다 팡하』를 후대의 사람들은 ‘동서의 대화’라고도 말해 왔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3월

/ 지안스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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