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스님─귀향 중에서___(1)

틱낫한스님

─귀향 중에서…(1) 앙드레 지드라는 프랑스 작가는, “신은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루 온종일 우리와 같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신은 행복이요, 평화입니다.

우리가 신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빵 한 조각에는 햇빛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그 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빵 한 조각에는 구름도 있습니다.

구름이 없으면 밀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빵 한 조각을 먹을 때 우리는 구름도 먹고, 햇빛도 먹고, 광물질, 시간, 공간, 모든 것을 다 먹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물이 모든 것이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재의 깊이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을 버려야 합니다.

물결은 높다 낮다, 아름답다 덜 아름답다, 온다 간다, 태어난다 죽는다 따위의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런 개념들을 물자체에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격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따지는 데 그런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소모해야 할까요? 언어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실재에 깊이 접하고 언어를 뛰어넘읍시다.

인격체는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무상’과 ‘무아’ 때문에 인격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영국의 어느 신사분이 불교를 공부하면서 만사가 무상하다는 가르침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이 바뀌어서 안타깝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딸이 “아빠,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제가 어떻게 자랄 수 있겠어요?”하는 말을 했습니다.

매우 똑똑한 딸입니다.

그 딸이 자라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헝겊 조각 하나를 태우더라도 그것은 그저 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속의 열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기로 바뀌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은 재가 되어 땅에 떨어졌다가 내일 다시 나뭇잎이나 풀잎이나 꽃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처럼 연속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말입니다.

바람은 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바람이란 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냥 ‘바람’이라고만 해도 됩니다.

바람이란 무엇인가요? 바람은 여러분의 知覺, 여러분의 意識입니다.

여러분의 지각 때문에 바람이 있습니다.

향을 피울 때도, 그것은 부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향을 피우고, 깊이 절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건전한 씨앗에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수행입니다.

만일 불행을 느끼면 그 불행이 자기 주위로 퍼져나갑니다.

이 이해와 관용을 배양하고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면 고통은 훨씬 줄어듭니다.

주위의 중생들을 자비의 눈으로 보면 놀라운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우선 그를 이해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가 배운 것들 중 하나는 이해가 없으면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부인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으면 서로를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는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우리에게 삶 속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은 마음을 다해 걷는 것, 마음을 다해 앉는 것,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 어디에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이렇게 고통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여러 날 여러 달 우리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고통이 덜어질 수 있습니다.

들어라, 들어라.

이 놀라운 소리, 내 참된 고향으로 날 보내주노니.“ 부처님의 목소리, 종소리, 햇빛 등 모든 것이 참된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고향에선 여러분은 진정한 평화의 기쁨을 누릴 실 수 있습니다.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속에 있는 구름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햇빛, 나무, 흙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요소들이 없다면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생에서 나무였을 뿐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이 바로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는 곳에서 공동체를 만드십시오.

이런 공동체는 우리의 귀의처(피난처)입니다.

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실천의 문제입니다.

공동체의 세울 필요성을 아들과, 배우자들, 길벗들에게 이야기 하십시오.

공동체가 있으면 안전합니다.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들어가 살 데는 있을지 모르나 그들 마음속에는 집도, 고향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들에게 집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집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집이 되어야 합니다.

법신은 다른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서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걸으면서 하는 명상법을 실행하면 분노와 슬픔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사물의 실상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나아가 허상과 집착과 욕망을 벗을 수가 있습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두 가지는 별개의 것입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 아래쪽 디딤목을 버리지 않으면 더 놓은 곳으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지식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도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무 앞에 서면 나무에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나무에 대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매일의 삶을 살아 갈 때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먹을 때도 마음을 다해서 먹고, 마실 때도 마음을 집중해서 마십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더욱 심각해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귀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집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우리의 집이요, 돌아갈 고향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혼란에 빠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면 그야말로 정처 없이 떠도는 혼이 됩니다.

어디에 갈까, 무엇을 할까 알지 못합니다.

스승은, 자신이 알게 된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을 전할 수는 없고 오직 생각을 전할 뿐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그 생각을 가지고 애를 써야 합니다.

문제는 체험이 생각이나 관념을 통해서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로 행복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입니다.

행복에 대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불행하게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행복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혜거스님─없앨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없앨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혜거스님

– 아무리 얻을려고 한들 얻어지는 것은 본래 없다.

공부는 얻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없앨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탐진치를 없앨려고 공부한다.

탐진치 없는 것이 성불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 순간 업을 안 짓게 된다.

자기 허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 때 참선이 잘 되는 것이다.

자기 허물이 보이지 않고 남의 허물이 보이면 그건 참선이 아니다.

자기를 보는 사람은 밖을 안 보게 되어 있다.

밖의 사람은 전부 다 훌륭하고 위대하게 보일 뿐이다.

자기가 너무 부족하고 너무 모자라게 보일 뿐이다.

항상 상대를 보고 상대방에서 내가 하지 못한 것, 내가 알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하고 있는 것을 빨리 느껴야 된다.

아! 저 사람은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저렇게 하는 구나! 이러면 전부가 다 스승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항상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지어서 업보가 있는 것이다.

누가 끌고 가서 업보가 있는 것 아니다.

업보 조심해야 한다.

철저하게 하자.

업장에 지지 말자.

몸뚱이 병은 병 찾고 약 쓰면 낫는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병이다.

아뇩다라는 밖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앞생각이 잠깐 일어나면 뒷생각이 바로 알아차릴 것이니 알았으면 이미 머물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 이렇게 중요하다.

확실하게 알면 없어져 버린다.

깨달음이 정법이다.

우리는 전부 다 좋은 일 생기기만 원한다.

그런데 나쁜 일 생기는 것 절대 기분 나빠하지 마라.

일 하다가 장애 없으면 다른 장애 생긴다.

장애, 절대 나쁜 것 아니다.

장애는 우리에게 극복의 대상이지 굴복은 하지 말아라.

모퉁이가 큰 것은 아예 모퉁이가 없다.

큰 눈을 가질수록 점점 차별이 없어진다.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차별이 없다.

이 세상을 이끄는 사람은 이와 같은 안목을 빨리 갖추어야 한다.

현진스님─죽는 일을 떠올려라

죽는 일을 떠올려라

-현진스님-

이해인 수녀님의 시속에 “죽음을 잊고 살다가 누군가의 임종 소식을 들으면 가슴 속에 찬바람이 분다”는 구절이 있다.

누군가의 병문안을 다녀왔을 때,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 요즘처럼 서늘한 바람이 창가를 지날 때 우리는 문득문득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가끔 상가喪家에 들러 임종 염불을 하고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 나면 내 자신이 새삼 겸손해진다.

우리의 삶이 보잘것없는 뜬구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명예와 재산, 교만과 아집으로 살지만 죽을 때는 삶에 지친 육신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죽은 자를 보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계없이 모두가 마지막으로 입는 옷은 똑같다.

주머니 없는 거친 베옷 한 벌 입고 떠나는 게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처럼 마지막으로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죽는 길에는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관 밖으로 두 발을 보였고, 세계를 지배했던 나폴레옹 또한 양손을 관 밖으로 드러내 놓았다고 한다.

두 발과 두 손은 우리 삶의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우리 삶에서 욕심과 소유의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생을 마감할 때, 분명하고 모범적인 발자국을 남기라는 의미에서 부처님은 두 발을 보였고, 나폴레옹 또한 세계를 지휘했던 손이지만 결국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에서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가까운 친지의 죽음은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삶의 기술을 모르는 사람은 죽음의 기술도 알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잘 사는 일은 잘 죽는 일과 똑같다.

때때로 죽음을 떠올리자.

그래야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똑바로 살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