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총스님─서로 아끼고 위하면 그곳이 극락

서로 아끼고 위하면 그곳이 극락 조계종 포교원장 혜 총 스님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 타야 훔’ 저는 이 광명진언을 54년간 한 시도 놓은 적이 없습니다.

새벽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24시간 광명진언을 염송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광명진언의 공덕은 참으로 크고 큽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께 멥쌀을 공양 올립니다.

이 쌀로 밥을 지어 먹고,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또 엿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식혜를 만들어 공양하기도, 아픈 사람을 위해 죽을 쑤기도 합니다.

이렇게 쌀 한가지로 여러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광명진언 한 가지를 염송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소원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진언에는 소원 이루는 힘 있어 진언이 됐건 염불이 됐건 열심히 하세요.

그 안에는 무궁무진한 부처님 법문이 들어 있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분은 관세음보살을, 아미타부처님을 부르는 분은 아미타불을, 지장보살님을 부루는 분은 지장보살을 열심히 염송하세요.

진언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진언을 외기만 하세요.

단 소원하는 바가 이뤄질 수 있음을 확신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옛날 청담 큰스님이 출가해 공부를 해보니 이 세상에 불법밖에 없음을 깨닫고, 이 좋은 공부를 혼자만 할 수 없다며 속가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대도성 보살 귀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 동안 염불공부 잘하셔서 죽을 때에 귀신한테 끌려 삼악도로 가지 아니하고 극락세계의 아미타불님 회상으로 가실 자신이 섰습니까? 모진 병 앓고 똥이나 싸버리고 정신없이 잡귀신들에게 끌려가 무주고혼이 돼서 밤낮으로 울고 천만겁으로 돌아다니면서 물 한 그릇도 못 얻어먹는 불쌍한 도깨비 귀신이나 면해야 될 것 아닙니까? 다 늙어서 서산에 걸린 해와 같이 금방 쏙 넘어가게 될 형편이 아닙니까? 살림걱정, 아이들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다 해봐야 보살에게는 쓸데없는 헛걱정이오.

죄업만 두터워질 뿐이니 다 제쳐놓고 염불공부나 부지런히 하시오.

앞날이 급하지 않습니까? 나나 보살이나 얼마 안 있어 다 죽어 업에 따라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 아닙니까? 부디 쓸데없는 망상은 다 버리시고 염불만 부지런히 하셔야지요.

곧 떠나게 될 인간들이 제 늙은 줄도 모르고 망상만 피우고 업만 지으면 만겁의 고생을 어찌 다 감당할 것이오? 극락세계만 가놓으면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다 만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다 집어치우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급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절하고 빕니다.

늙은 중 합장.

편지를 읽는 동안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제도하게 돼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먼저 제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또 마음씀씀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과 위치는 부처님이나 어떤 신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업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모습은 내 업의 결과 공양을 먹기 전 기쁜 소식을 들었으면 밥맛이 좋겠지요?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면 밥맛도 별로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밥맛이 정말 다른 것입니까? 사실은 모두 같은 맛입니다.

그러면 그 맛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겁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기분 좋게 먹을 것인지, 나쁘게 먹을 것인지, 나에게 약이 되게 먹을 것인지, 독이 되게 먹을 것인지 모두가 바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밥을 먹지만 삼보에 귀의하고 염불을 하며 남을 위해 일한다면 그 사람은 사회의 약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80세 정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얼마만큼 더 살고 싶습니까? 10년, 30년 혹은 100년을 더 살길 바라십니까? 그러면 무엇 때문에 더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원을 세워야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냥 살아도 되지만 그래도 원을 세우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죽음은 두려움 아닌 극락의 길문 석가모니부처님은 500개의 원을 세웠고, 약사여래부처님은 12대원을, 보현보살은 10대원을 발원했습니다.

스님들은 공양하기 전 게송을 읊습니다.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음식에 대한 감사와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열심히 정진하겠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되 그냥 먹는 것은 불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육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여러분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본래 깨끗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번뇌·망상이라는 더러움을 씻어내면 곧 부처인 것입니다.

그 때를 벗겨내는 방법을 우리는 참선이다, 염불이다, 참회다, 육바라밀이다고 부릅니다.

또 본래의 면목을 찾아 다시 깨끗해지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부처님 법에 따라 열심히 생활하면 다음 생에는 좋은 세상에 태어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살아 있을 동안 마음씀씀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두려워할지언정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차피 이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사용할 만큼 사용하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다음 생에 좋은 데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가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청담 스님이 대도성 보살님께 구구절절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세상일 다해봤자 업만 지을 뿐이니 모든 걱정 다 버리고 염불공부나 부지런히 하라.

’ 일을 하지 말란 말이 아닙니다.

일을 하되 원을 세워 원 데로 하란 말입니다.

법대로 살면 이생도 다음 생도 좋을 것입니다.

죽을 때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귀신에 끌려가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열심히 공부하면 광명이 비춰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법회를 마친 후 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가듯 이생은 살다가 업대로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나니 살아생전 업 노릇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은 후 극락세계에 가기를 바랍니다.

왜 극락세계로 가려 합니까? 그 세계는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 오로지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아미타부처님께 법문을 듣고 열심히 공부해 부처님이 될 분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부처님은 이웃과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남편을 아내를, 형제를, 이웃을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도록 서로 아끼고 위한다면 그 곳이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관음재일을 맞아 여러분은 관세음보살님께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강원도인가요, 중국인가요? 아닙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중생들의 고통을 거두기 위해 고향을 떠나 사바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머리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을 모시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아내를 생각하면 아내를 모시는 것입니다.

관음재일을 모시는 것은 가정이 행복하고 이웃이 행복하며 나라가 행복해져 이 세상에서 극락세계를 만들겠다는 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와 가족, 이웃과 나라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발원하기를 당부하는 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

com 이 법문은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이 관음재일을 맞아 조계사에서 대중에게 설법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혜총 스님은 1953년 양산 통도사에서 출가해 1956년 자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3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후 통도사, 표충사, 동화사, 해인사, 선암사, 범어사선원에서 9안거를 성만했고, 해인사승가대학과 범어사승가대학을 졸업했다.

대한불교신문을 창간해 사장과 발행인, 편집인 등을 역임했으며 어린이포교와 복지 분야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어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대표이사, 용호종합사회복지관장, 부산불교사회복지청소년기관협의회장, 대한불교사회복지연구원장 등을 맡아 활동해 왔다.

지난해 11월 제5대 조계종 포교원장으로 취임해 특히 어린이와 군 포교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광스님─ 당신은 부처님의 외동아들입니다

( 당신은 부처님의 외동아들입니다 )

– 능인선원 원장 지 광 스님 –

오늘 이 자리에는 부산불교계를 대표하는 분들이 모두 모이신듯합니다.

사실 제 고향이 부산 범일동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님들이 이곳으로 피난 오셨다가 저를 낳으셨습니다.

저는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했고, 해직 기자이기도 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산중으로 숨어 다니던 시절에

부처님 법을 만나 중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모태신앙의 가톨릭 신도였습니다.

오늘은 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생각·행동 몸에 입력 돼

80년대 한창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 가운데 물고문이 있었습니다.

그 물고문이라는 것이 머리 위에 링거 병 같은 것을 매달아 놓고

이마 위로 물을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지요.

처음엔 그냥 물 한 방울씩이 머리 위로 떨어질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한 5분쯤 지나고 나니 이마로 정신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물방울이 모래알처럼 느껴지고,

20분쯤 지나니 그 물 한 방울이 조약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30분쯤 되니까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물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가 깨질듯 한,

딱 죽을 것 같은 느낌에 비명이 나왔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확대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리차드 닉슨(1969~1974)이 졸업한 듀크 대학의 초심리연구소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물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접시 두개를 놓고 그중 하나를 향해서 ‘깨져버려’라며 계속 욕을 한 다음

그렇지 않은 보통 접시와 함께 일정한 높이에서 떨어뜨려

파손율을 비교한 실험이었습니다.

실험을 해보니 ‘깨져버려라’고 욕을 한 접시가

그렇지 않은 접시보다 훨씬 파손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실험 결과는 모든 미물중생뿐 아니라

심지어 접시와 같은 무생물에도 의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물리학자가 ‘계속 물질을 쪼개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가 궁금해

물질을 분해해 나가는 실험을 했습니다.

원자의 핵 속에 전자가 있었고

그 전자를 다시 쪼갰더니 여러 개의 광자(빛)가 튀어 나왔습니다.

날아가는 그 여러 개의 광자 가운데 하나를 편광판으로 막았더니

나머지 광자들이 모두 일제히 허공에 멈춰버린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 실험 결과를 놓고 결국 이 과학자는

가설을 통해 “광자와 광자들이 서로 통신한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이 성립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광자에 의식이 있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광자는 모든 물질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광자가 의식이 있다면 모든 물질이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접시에도 의식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기에 여러분의 말, 행동, 생각은 모두 내 몸의 광자에 입력됩니다.

부정적 말을 하면 내 몸에도 부정적인 자료가 입력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여러분이 바른말, 생각을 갖고 법문을 들으며 수행 한다면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여러분의 세포 속에 입력됩니다.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며 저는 한 없이 즐겁습니다.

이 몸 자체가 법의 덩어리이고 부처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부처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무명중생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무명이 모든 고통의 시발점입니다.

사바 중생 살피며 ‘노심초사’

사바세계는 고통스런 세계입니다.

철학자나 사상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상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봅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양사상, 부처님의 사상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남들과 싸우지 말고 네 자신과 싸워라.

정진으로 스스로 이겨 나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고통의 땅에서 경쟁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중생을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향해 ‘너희들은 나의 외동아들 같다’는 말을

모든 경전에서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사바세계에 외동아들을 보내놓은 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들은 나의 외동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노심초사 여러분을 생각하십니다.

그렇기에 ‘정진하라’는 부처님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닌 생명입니다.

부처님의 사랑 모르는게 무명

『화엄경』에 보면 ‘허공은 부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호흡에 있습니다.

내 생명의 원천은 호흡이고 호흡은 허공을 마시는 것인데

그 허공은 바로 부처님의 몸입니다.

내가 호흡을 통해 내 몸을 뜨겁게 달구고 토해낸

그 기운이 옆의 사람에게 흘러가 그 사람이 호흡하고

그 사람의 몸을 다시 뜨겁게 달굽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생명의 장에서 하나로 이어지고

부처님의 생명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임을 모르고 삽니다.

이것이 무명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이 허공에 가득 찬 부처님을 모르고 그 부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무명중생입니다.

『화엄경』 약찬계에 보면 허공에는

우리가 눈을 볼 수 없는 많은 성중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또 허공에는 여러분의 태를 빌어 사람으로 나고자하는 많은 영가들이 있습니다.

무량한 존재들이 있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고 기도하면

주위의 모든 영가들이 편안해지고 고마워하며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는 이 모든 말씀은

곧 ‘내 마음이 하늘에 통해 있고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통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존재는 부처님 안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팔만사천법문을 하신 것은

이 땅에 있는 존재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마음 가운데로 법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진리 가운데서 하나라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삶 속에서 부처님의 이 진리,

그 힘을 증명해야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증명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말 한마디,

생각 한 번, 행동 한 번 할 때마다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깨우치고 깨우치다 보면 정말 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이 뭐꼬’를 하십시오.

참선은 선방에만 있고,

산중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성도는 이뤄집니다.

기도하면 모든 불보살 기뻐해

오늘부터 삶의 모든 현장에서 ‘관세음보살을 염송 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것이 모든 허공에 있는 존재들과 불보살님들에게 지극히 공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부처님과 하나 되는 작용이고,

자신의 모든 악업을 녹이는 지름길이며,

성불의 길이고, 참회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대화입니다.

항상 부처님과 더불어 산다면 그 사람은 더욱 크나큰 가피를 입을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나무관세음보살’ 일곱 글자를 보물이라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살면서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십시오.

법은, 진리는 무적입니다.

온몸으로 부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지정스님─하심(下心)과 안심(安心)

하심(下心)과 안심(安心)

지정스님

(봉암사 선원) 보살은 이렇게 서원한다.

“모든 중생의 집이 되어서 그들의 선근을 키워주고, 귀의처가 되어서 해탈을 이루게 하고, 스승이 되어서 정법에 들게 하며 등불이 되어서 업보를 환희 보게 하며 빛이 되어서 깊고 묘한 법을 비추리라” 이글은 80화엄경 10행품 가운데 선법행(善法行)에 나오는 구절로 보살마하살은 오로지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서 수행하고 설법한다는 내용이다.

‘나’라는 생각이나 ‘나의 이익’을 위한다는 개념은 철저히 버리고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자신을 낮추고 중생의 뜻을 따르고 공경할 때 진리의 문에 들어설 수 있고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공경하고 받드는 것이 곧 여래를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화엄경은 말해준다.

지리한 장마철에 잠깐이나마 화창한 날씨다.

100여명 스님들이 삭발을 끝내고 산행도 가고 한담도 나누며 저마다 수행일기를 챙긴다.

고독을 제대로 체험했다면 우담바라의 위대함을 보았을 것이건만 지극히 혼자인적이 별로 없었던 탓에 고독의 심연에 들어가지 못했었구나.

참선하는 스님들의 얼굴모습은 일반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세상의 욕락에 대해서 나름대로 한 꺼풀 벗은 감이 있다.

비장한 모습, 나한상처럼 기이한 모습, 초연한 모습, 정갈한 모습, 소탈한 모습, 늙수그레한 모습, 만고풍상을 격은 듯한 모습, 처절히 지친 모습, 넉넉한 모습, 소담하지만 결의에 찬 모습, 저마다 업(業)과 수행의 길이 다르기에 각자 특색 있는 모습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렇게 준열하게 살다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모두 사라지겠지.

각자 개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로 화엄(華嚴)이리라.

거기에 무슨 가식이 붙을 것이며, 위선이 있겠는가? 권위나 의례의식을 중요시하는 유교문화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주위사람들의 신망, 비난, 칭찬, 험담 등 이러한 것에 무척이나 가치를 두고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솔직한 감정토로나 의사표현이 지극히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주위환경에 맞추려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다.

객관적인 안목으로는 모범생일지 모르나 한 꺼풀만 벗겨내면 왕 내숭이거나 위선덩어리의 자신과 마주치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삶이 아닌 주위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구체적인 방향성이 모호해지고 목적내지 목표의식이 애매해 질 수밖에 없다.

목표가 불명확하니까 방황하고, 판단이 흐려지며, 반듯한 일처리가 안 되니까 괴로워한다.

대저 주위환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삶의 함정이 이런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사람들일수록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려거나 윗사람에 대한 권위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게는 철저히 권위로 다가선다.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에게서 배척받기 쉽고 한편 배척당하고 소외된다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심하면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 날수가 없게 된다.

자기의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의 잣대로 단체의 질서나 어른에 대한 권위나 공경심을 팽개치므로써 그나마 조그마한 명분이나 정당성마저 저버리고 만다.

단체의 질서를 존중하고 윗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했을 때 행동거지가 당당해 질 수 있고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자신을 물처럼 철저히 낮추고 타인의 권위을 십분 존중해 줄때 굳이 원하지 않아도 대중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호감을 주는 이치다.

자칫 전체적인 틀을 보지 못하고 작은 선(善)에 집착하다보면 자신의 삶도 고달프고 주위사람들도 피곤하게 하고 만다.

바다가 지극히 낮으니 백천(百千)강물을 수용할 수 있고, 남을 공경할 때 어떠한 수모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고 청량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수 만년 캄캄하던 동굴도 불이 켜지면 금방 밝아지듯, 아만(我慢)의 틀을 깨고 하심(下心)할 때 운명처럼 느껴지던 소외의 공포심이나 인정받으려고 안달하는 소인(小人)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마가 지나가면 7월의 불볕더위는 기승을 부리겠지만, 내 마음은 한결 청량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