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온 편지

2월1일에 룸비니를 떠났습니다. 그곳을 떠나기 하루 전에 김형춘 교수님을 비롯한 교사불자회 회원들을 석가사에서 만났습니다. 나에게 법문(?)을 요청해서 간단하게 몇 마디 해야 했습니다. 떠날 때는 장학금까지 보태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이튿날 자동차를 한 대 빌려(기사 포함) 인도로 왔는데 3박 4일간 모든 경비 합쳐 900루피(우리나라 돈으로 약 22만원)로 아주 간단하고 편리하게 이사를 했습니다. 책과 옷 등 작고 큰 가방 5개. 이것을 어떻게 버스나 기차로 천리길(500km)이 넘는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 혼자 힘으로.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이 문제가 나에게 제일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봉을 한 사람 데리고 올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별로 많지 않는 돈으로 쉽게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고 앞으로 있을 3~4번의 이동에 대해서도 아무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룸비니(Lumbini) -> 쿠시나가라(Kusinagara) -> 바이살리(Vaisali) -> 파트나(Patna) -> 라즈기르(Rajgir). 이런 여정에서 부처님 출가 때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보거나 느껴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였습니다.

2500여 년 전 히말라야 산골의 한 무명의 청년이 인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도 전혀 없었을 것이고, 무작정 혼자서 도망쳐 나오다시피 집을 나와 뚜렷한 목적도 없이 남쪽으로 스승을 찾아 헤맸을 터인데 그가 밟았던 길을 기억했다가 제자들에게 뒷날 이야기해서 기억하게 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한 곳 머리를 깎았던 아누이미니국(阿累夷彌尼國)이란 이름만 경전에 나오고 있을 뿐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 게다가 계속 급하게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무슨 그런 추상적인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여정은 나의 연구 여행의 마지막이 될 10월경에 다시 꼼꼼히 답사할 계획입니다. 내 꿈은 꿈으로 끝날 확률이 크겠지만 그때는 10월 초, 부처님이 왕사성에서 안거를 끝내고 아난존자와 함께 북쪽으로 향하던 때입니다. 나 역시 왕사성 영취봉에서 배낭 하나 둘러메고 부처님의 마지막 길을 그대로 걸어볼까 합니다. 약 400km로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인데, 하루에 50리, 20km씩 걸을 수 있다면 약 20일 길어야 한 달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내가 걸을 여정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더니(자동차 길가의) 마을들이 대부분 너무 초라해서 여관 같은 것은 두고라도 하루저녁 누울 헛간 같은 곳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고 음식 사먹을 곳도 없는 마을이 대부분인 것 같아 이것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이 여행이 내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정말로 근사할 것입니다. 이 계획에 앞서 보다 짧은 거리의 여행을 6월 중순경에 먼저 해볼까 합니다. 보드가야(Bodhgaya)에서 사르나트(Sarnath)까지의 240km를 2주일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출가의 길 초전법륜의 길 열반의 길을 모두 부처님이 했던 것처럼 나도 발로써 해 볼 수 있다면 했는데 …. 출가의 길은 이미 공수표로 끝났고 초전법륜의 길, 열반의 길, 두 길도 책상 앞에서 편한 자세로 생각하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집니다.

요즈음도 거의 책상 앞에서만 지내고 있어 좀 답답합니다. 1주일 만 지나면 지금 정리하고 있는 4분율도 끝나기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곳 왕사성에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신왕사성 동쪽 벵갈 비하라(Bengal Vihara)입니다. 미얀마 비하라를 담장 하나로 이웃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 절은 10년 전 방글라데시 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지금은 40대 초의 스님 한 사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120~150명의 순례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3동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내가 거처하고 있는 방은 세 건물 3층 옥상에 있는 두 개의 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방은 이절의 모든 방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시피 하기 때문에 (옥상이므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절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종일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혼자 지낼 수 있습니다. 옆 창문을 열면 영취봉의 뒷산인 비풀라(Vipula)산이 약 500m 내 거리에, 그리고 서남쪽으로 약 2km 거리에 칠엽굴이 있는 바이브하라(Vaibhara)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영취산 곁에서 하루 종일 부처님 언행이 담긴 초기경전을 읽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에 기쁨이 맑은 샘물처럼 고이기 시작합니다. 이번 여행을 계획했을 때는 제법 많은 걱정을 하고 망설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잘 한 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 말기에 이와 같은 여행, 이와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자들 가운데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와 같은 시간과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때로는 내 자신에 대해 긍지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요? 500달라 주고 두 달간 숙식을 하기로 했지만 아침과 저녁 식사는 내 방에서 빵, 과일, 커피로 글자 그대로 적당히 때우고 점심은 아래층 식당에 내려가 주지스님과 둘이서 먹습니다. 시장이 10분 거리에 있기 때문에 2~3일에 한 번씩 빵과 과일을 사러 갑니다. 왕사성 라즈기르는 2500년 전의 대제국 마가다(Magadha)의 수도였던 고도(古都)중의 고도지만 지금은 인구 10만 명의 아주 초라하고 가난한 시골도시입니다. 81, 92, 95년 세 번을 이곳에 왔었지만 이곳은 거의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불교의 중심 교리인 무상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곳인가 봅니다.

이곳에서 3월 말까지 지낼 계획이지만 심한 소음 때문에 (호텔 온천장 바로 곁으로 통하는 도로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어 조금 일찍 떠나려고 합니다. 아직 라즈기르를 꼼꼼하게 답사하지 못했습니다. 『아함경』과『사분율』의 정리가 끝나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불적지(佛跡地)를 답사하자는 것이 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환절기에 건강에 주의하시기를. 2008. 2. 19. 호진.

*** 사진설명 : 지안스님과 호진스님(왼쪽)

못에 담긴 물이 정이 없다하지 말게나

休言潭水本無情(휴언담수본무정) 못에 담긴 물이 정이 없다하지 말게나.

厥性由來得一淸(궐성유래득일청) 그 본성은 원래 하나의 맑음뿐이라네.

最愛寥寥明月夜(최애요요명월야) 고요한 달밤이 가장 좋나니

隔窓時送洗心聲(격창시송세심성) 창 너머 때로 마음 씻기는 소리 들려온다네.

달밤의 못물을 두고 지은 멋진 시이다. 고요한 산방의 창 너머로 계곡의 웅덩이에 달빛이 교교하다. 물은 본래 맑은 것으로 모든 것을 씻어주는 청정이 그 이미지다. 때로는 물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씻어지는 깨끗함을 느낀다. 더구나 고요한 달밤에 호수나 연못의 물을 보면 은은한 정서가 가슴 속에 물이 되어 흐를 것이다. 달빛 젖은 명상에 아련히 떠오르는 물과 같은 정이 고요 속에 그림자처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중(靜中)의 동(動)이 되어 고요를 깨뜨리면서 고요에 가라앉는 돌멩이가 되기도 할 것이다.

무용수연(無用秀演1651~1719) 스님이 남긴 이 시는 당시 스님과 교류하던 사대부 김창흡에게 화답한 시로 그 제목이 나와 있다. 유자에게 은연중 불법의 참 이치를 물에 비유 설해준 것 같기도 하다.

이스탄불에서 이스탄불의 추억을 생각하며

언제부터인가 곡조도 모르면서 “추억의 이스탄불”이라는 노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래 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음악 같은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곡 이름이 “추억의 이스탄불”이라고 진행자가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내리니 밤 9시였다. 공항이 무척 크다. 짐 찾는 데까지 한참 걸어가야 했다. 공항을 빠져 나와 시내로 들어오면서 내 머리에는 여기가 이스탄불인가 하는 지명확인이 아니라 여기가 “추억의 이스탄불” 이라는 노래의 도시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가는데 도중에 교통순경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를 잡아 세워놓고 10여분을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하는 것을 보고 약간의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지만 뇌리에 입력된 추억의 이스탄불이라는 말 때문에 좋게 이해하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3박 4일을 이곳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가슴 속에 매우 우호적으로 남는 것은 노래 이름 탓만은 아니었다. 물론 노래 이름 때문에 이스탄불이 반갑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 노래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면서도 그러나 이스탄불에서 누군가가 추억할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이스탄불이 반갑게 느껴진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정이 많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내 승복이 특이해서인지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전차 안에서는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입니까 하고 묻더니 한국 사람들이 지금 왜 그리 우느냐고 우는 시늉을 하면서 묻기도 했다. 텔레비전에서 북한의 김정일 사명 뉴스에 오열을 토하는 북한 사람들의 우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일요일 새벽 아테네에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좀 놀랐다. CNN 뉴스에 계속 사망 소식이 나오는 걸 보았다.

탁심 광장에 갔을 때는 청년 한 명과 장년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어 자기네 가게구경을 가지고 하였다. 일종의 호객행위라고 생각 되어 거절을 하였는데 막무가내로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하며 가게에 가서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혜석’이 가보자 하여 따라 갔더니 큰 카펫 가게였다. 형제의 나라에서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도 하기에 100m가 넘는 거리를 따라가 가게 안에 들어가니 소파에 앉게 하고 차를 내어 주고는 카펫 상품을 여러 개 꺼내 놓고 설명을 어떻게나 열심히 장황하게 하는지 지루하여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중간에 말을 막아 우리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카펫을 사 줄 수 없어 대단히 미안하다 하였더니 이내 괜찮다하면서 잘 가라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다정다감하고 다혈질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택시, 버스, 전차, 지하철을 타고 사흘을 돌아다니며 본 이스탄불 사람들은 우선 인종 전시장처럼 얼굴이 하얀 백인, 시커먼 흑인, 거머티티한 얼굴, 황색 얼굴, 백발 머리, 금발 머리, 시커먼 곱슬머리 등 다인종 사회임을 알 수 있었다. 99%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하였는데 불교를 아는 사람들도 있는지 나를 보고 합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발달한 도시로 두 대륙을 잇는 긴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있다. 로만 시대부터 비잔틴, 오토만 시대를 거쳐 내려와 1923년에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7천만 인구에 이스탄불이 2천만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다 하였다. 인구로 치면 세계 제1의 도시다.

지금은 박물관 구실을 하고 있는 과거의 소피아 성당을 둘러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건축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하루에 몇 번씩 이슬람 사원의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찬송의 노래 같은 긴 소리가 이방인의 귀를 시끄럽게 하지만 허공에 퍼져 울리는 그 소리가 내게는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빗속에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보기도 한 추억의 이스탄불. 내게 이스탄불 여행의 인상이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1월 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