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을 쳐 사람의 목숨 재촉하는데

격고최이명 擊鼓催人命 북을 쳐 사람의 목숨 재촉하는데

회두일욕사 回頭日欲斜 돌아보니 해가 서산에 지려한다.

황천무일점 黃泉無一店 황천에는 주막도 하나 없다 하는데

금야숙수가 今夜宿誰家 오늘 밤엔 뉘 집에서 잠을 잘까나

이 시는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인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수형시(受刑詩)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죽음에 임하는 담담한 심정을 읊어 놓았다. 형 집행의 카운터다운이 시작되어 북소리가 울리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해도 서산에 기울여 사양(斜陽)이 형장까지 쏟아지는데, 속절없이 황천객이 될 자신의 신세를 두고 오늘 밤 뉘 집에서 자고 갈까하는 어이없는 독백이 읽는 이의 마음마저 쓸쓸하게 만든다.

성삼문은 대의명분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만고의 절사(節士)로 숭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 장원급제를 한 적이 있는 그는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 학사로 뽑혀 정인지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학문에 깊은 연구를 하였다.

나중에 세조가 단종을 폐위 왕위를 찬탈하자 도총관을 지냈던 아버지 성승(成勝)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해 거사를 도모하다 밀고로 발각되어 나머지 사육신과 함께 처참한 참형을 당한다. 3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그는 형제와 아들들마저 몰살을 당하는 멸족의 화를 입고도 만고의 지조 있는 절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커피 한 잔의 인사

일이 있어 다니다 보면 낯선 사람을 만나 우연히 인사를 받는 수가 있다. 인간관계는 참으로 미묘한 면이 있어 나는 모르지만 상대는 나를 아는 수도 있고 반대로 나는 아는데 상대는 나를 몰라보는 수도 흔히 있다. 아마 연예계에 종사하는 유명한 스타나 탤런트, 이런 분들은 영화나 TV드라마 혹은 언론 매체를 통해서 얼굴이 많이 알려지고, 또 유명한 정치인이나 예술인, 작가 등도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처음 만나는 사람을 자신은 모르지만 상대방은 알아보는 수가 꽤 많을 것 같다.

특정한 모임이 아니더라도 낯선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아무래도 이것이 인간의 예의범절뿐만 아니라 인격적 수양이 앞선 사람의 처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무어니 해도 사람 사는 사회의 분위기는 사람끼리의 친화력이 높을수록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한다.

구조주의를 주창한 프랑스의 석학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 박사는 인간사회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라는 말을 썼다. 뜨거운 사회란 사람의 가슴이 뜨겁다는 뜻이고 차가운 사회란 사람의 가슴이 차갑다는 뜻이다.

그는 원시사회가 뜨거운 사회였다 하고 현대문명의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고 말한다. 그것은 문명이 발달된 사회일수록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해지며 남에 대한 배려도 없어져 냉정한 비판은 잘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체온을 나눠주지 못하는 가슴의 온도가 차가워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명사회에 들어와서는 사람과 사람의 유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상호 협력이 어려워지는 시대라 하였다. 이러한 말을 통해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에 친밀감이 나눠질 수 있는 인간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가슴의 온도를 높이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벼운 인사말 한 마디가 사람을 친하게 만들 수도 있고 웃는 낯으로 부드러운 표정 하나 지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보시할 수 있는 길이 일곱 가지가있다는 [잡보장경]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말씀도 있다.

온화한 얼굴로 남을 대해 주는 것을 화안시(和顔施), 부드러운 말 한 마디를 해 주는 것을 언사시(言辭施), 고운 눈매로 상대방을 보아주는 것을 안시(眼施),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시(指施), 남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좌상시(座床施),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가파른 길에서 수레를 잠시 밀어주는 일은 신시(身施), 그리고 남의 일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거나 성원해 주는 것을 마음으로 베푸는 심시(心施)라 하였다. 이러한 칠시(七施)의 가벼운 이타행에서 사람 사이가 친해지고 사회가 밝아지는 것이다.

지난 주 KTX 기차를 타고 서울서 내려오던 중, 뜻밖으로 기차 안에서 커피 한 잔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얻어 마신 적이 있다. 졸다 깨어보니 기차는 김천구미역을 지나 대구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 자리에 앉아 있던 4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마침 지나던 판매 승무원으로부터 커피를 한 잔 사서 자기는 먹지 않고 나에게 드리라 하면서 한 잔을 사 주는 것이었다. 우선 나는 고마워하면서 그 분이 불교신자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내가 고맙다고 했더니 그분은 역시 내게 합장을 하였다. 커피 한 잔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때 감동스런 고마움을 느꼈다. 그 신도님은 동대구역에서 내리면서도 내게 합장을 하고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도 하였다.

이날 나는 커피 한 잔의 인사 때문에 하루 종일 고마움을 느꼈다. 이 경우는 물론 나는 그 분을 몰랐지만 혹 그분은 나를 알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불자이기 때문에 내가 스님이라 단순한 호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어떤 인연의 계기가 있었던 간에 그분은 내게 친절을 베풀었고 나는 친절의 호의를 받은 셈이다. 이러한 단순한 인사의 공간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질 때 감사의 마음이 되면서 순수한 감동이 은연중 일어날 수 있는 것이리라.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사와 안부는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며 아무리 자주 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분명 인사와 안부를 자주 나누면 사람 사이가 더 가까워져 친해 질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3월 136호

어느 일본인의 물음

이번 여름엔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로 두 차례 일본엘 다녀왔다. 전에도 들른 적이 있었지만 직접 일본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은 별로 없었다. 늘 글로서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일본과 일본 사람을 이해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우리 학생들이 일본 ‘기우현’의 오오가끼시에 있는 오오가끼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집에서 이틀간 홈스테이를 하게되어 일본을 방문하여 직접 그들과 부딪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공식방문단에는 안내자도 통역도 없었다. 일본말은 전혀 모르고 영어도 수준 이하인지라 떠나기 전까진 솔직히 불안했다. 그러나 내심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면 일본이 한자 문화권인지라 급하면 한자로 필담을 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공식 행사인 시청이나 학교방문 등에는 그쪽에서 통역이 나와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 밖의 시간 내내 ‘반갑다, 고맙다’는 말 이외에는 서투른 영어를 구사하였고, 급하면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기가 바빴다. 나이가 좀 든 일본인들은 영어보다는 다들 한자를 쓰면 반가와 했다. 나도 그쪽이 훨씬 편했지만.

우리 일행이 주로 만난 사람들은 학교의 교장, 교감, 교류협력 담당자, 학생부장 등과 시청의 홍보과 국제교류담당 직원들과 시의 예산지원을 받는 국제교류협회 직원들이었다. 처음 나고야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떠나올 때까지 깍듯한 대우를 받았지만 방문단장이라는 이름이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였다.

나를 당황하게 한 일은 도착한 날 저녁식사 시간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오오가끼시와 창원시는 우호협력도시로 80여 차례 서로 민간과 시 차원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창원시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나로서는 부담 없는 식사자리로 알고 참석하였다. 참석자는 우리 일행 셋을 합쳐 일곱 명이었다. 문제의 사나이는 공항에서부터 가장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 ‘이노우에’라는 국제교류협회의 차장이었다. 그는 인쇄된 것도 아닌 PC로 찍은 규격도 제 마음대로인 명함에다 서투른 한글로 ‘이노우에’라고 ‘토’를 달아서 내게 정중히(?) 건네 주었다.

잠시 후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인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른 체구와 약간은 긴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으면서 계속 웃음을 띄고 있더니만 뭘 좀 물어보아도 괜찮겠느냐고 한다. 자기는 언론이나 책을 통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자료를 한 뭉치 꺼내 옆자리에 놓고는 하나하나 물어왔다.

제일 먼저 작년 ‘한국-일본 월드컵’ 때의 신문기사를 내어 보이면서 한국의 길거리응원단과 붉은 악마들이 들고 있는 응원도구에 왜 KOREA가 COREA로 표기되었느냐 하는 것과, 정말로 일본의 대중문화의 유입을 한국에서는 법적 제도적으로 막느냐,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등을 갖는 것이 한국의 입장에서(동족인데) 위험을 느끼느냐, 오오가끼시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10년 전엔 천명에 가까웠는데 현재는 2백여명으로 줄었는데 왜 그렇게 줄었다고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이었다. 질문 하나하나 마다 식탁 위에 자료를 제시해 놓고 이야기하는 점도 두려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같이 한국과 일본간의 민족감정과 자존심이 걸려있다는 점이다. KOREA의 C를 왜 일본이 K로 바꾸었는지,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문화를 경계하는지, 북한의 핵무장을 왜 일본이 더 두려워하는지 등을 그가 듣고싶어하는 의도를 읽었기에 설명을 해주었지만, 재일교포들이 월드컵 이후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우고자한 마지막 질문엔 자신이 없었다.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물어오는 ‘이노우에 히데오’, 호텔로 돌아와 다시 그의 명함을 꺼내보니 한쪽 구석에 역시 한글로 ‘어서오세요’라고 적어 놓지 않았는가. 이 사람이야말로 일본인 중의 일본인이다.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철저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이다. 두렵다. 부럽다. 쓸개도 배알도 없는 나와 같은 동족들이 어떻게 하면 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을까. 그보다는 언제쯤 내가 범세계인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3년 9월 제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