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 문화

오늘도 직장으로 집으로 배달되는 연하장을 보면서 고민에 고민이 더 합니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우체국이 몸살을 앓고 집배원이 땀을 흘리는 것이 이젠 관례가 되었습니다. 다른 우편물도 많지만 특히 연하장이 홍수를 이룹니다. 성탄절과 맞물려서 성탄축하와 신년인사를 겸하는 행사로 굳어졌습니다.

이 연하장의 긍정적 의미는 많습니다. 한해동안 도와 주시고 성원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물론 은혜와 사랑을 입었지만 평소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예를 갖추고 자기의 새해 다짐을 전하는 등 참으로 바람직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무절제한 그야말로 형식적인 관례로 흐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상용화된 우편 연하카드나 도식적으로 인쇄된 연하장은 차라리 안받은 것만 같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하장을 받을 때는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연말연시면 폭주하는 연하 우편물 때문에 정작 급히 배달되어야 할 우편물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는가 하면 배달 사고도 잦은 현실입니다. 고급스런 용지에 ‘서울 김서방’에게 보내는 식의 무절제한 연하장은 낭비의 요인도 많습니다. 이러한 의미라면 연말 연시를 이용한 연하장 문화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봄직도 합니다.

최근 3년 동안 나는 연하장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천성이 게으른 탓도 있지만 수십년동안 남들처럼 아니 남보다 적게 부치지는 않았는데 서서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꼭 인사드려야 할 사람에게만, 그것도 전화나 편지로 하자는 것입니다. 수년째 내가 받은 연하장을 분류해 보았습니다만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채 반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너무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불과 했습니다. 오늘도 쏟아져 들어오는 연하장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제 연하장 문화는 좀 바뀌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꼭 연말연시가 아니라도 좋으니 편지를 쓰는, 좀은 복고적인 형식으로 되돌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꼭 연하장을 쓸경우에도 곁표지는 인쇄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더라도 속장에는 친필로 사연을 적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즈음엔 전자우편(E-mail)도 좋은 방법입니다.

지난해부터는 연말연시를 피해 2월 들어 입춘(立春)을 맞아 ‘입춘방’을 보내면서 몇자 적어보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지인들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내가 보낸 입춘방이 책상앞에 붙어 있거나 책상의 유리 밑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집을 방문하는데 현관 문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씨익 웃음이 납니다.

고마운 사람에 대해 인사를 빠뜨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개성있게 정성이 담겨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1월 (제14호)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모두가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개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삼라만상이 고유한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소나무는 소나무의 모습이 있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의 모습이 있다. 또 학의 다리는 본래 길고 오리 다리는 본래 짧다. 두두물물이 개개의 존재로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이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존재의 영역에서 보면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변에 밀려 쌓여있는 모래알이 어느 것도 똑 같은 것이 없다. 비록 디자인과 칼라가 똑같이 만들어진 공장의 제품이 있다 하더라도 낱낱이 자기 값을 가지고 있지, 모양이 같다 해서 특정의 하나에만 값을 매기고 나머지는 값을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는 그 존재만이 갖는 자기 값이 있기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의 가치에 대한 의식이 혼돈되고 있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가치의식에 대한 진정한 견해가 바로 서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고 내 비위에 맞는 일에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남은 좋아 하지만 내가 싫은, 내 비위에 맞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몰가치한 것이라고 엉뚱한 판단을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 사람들은 자기 가치만 주장하다가 남의 가치를 빼앗아버리는 일방적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상식적으로 볼 때 가치에는 보편타당한 유용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가치의 우열을 논하며 취사선택을 좋아하는 사람의 그릇된 사고방식 때문에 가치가 전도되어 유용한 것을 싫어하고 무용한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러니컬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

이솝 우화에 사슴과 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부터 숲속을 돌아다니던 사슴은 목이 말라 샘을 찾던 중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을 발견하고 속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사슴은 물을 실컷 마시고도 그 샘을 떠나지 않고 맑은 물을 들여다보다가 자기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은 나뭇가지처럼 멋지게 사방으로 뻗은 뿔이 아주 근사했고 그건 짐승의 왕인 사자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사슴이 물에 비친 뿔에 비해서 다리가 가늘고 길기만 한 것을 보고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슴은 자랑스러운 뿔도 이 보기 싫은 다리 때문에 자랑하러 다닐 수 없다고 다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이때 어디서 왔는지 사자 한 마리가 샘 가까이에 다가와서 곧 잡아먹으려는 듯 사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슴은 뛰는 데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자가 뒤따라 달려왔지만 사슴은 사자의 추격을 피해 멀리 달아나 잡아먹힐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무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뛰어가던 사슴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난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숲 속이라 빽빽이 우거진 뿔이 걸려 꼼짝 못하고 서 있는 사슴을 보고 사자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뿔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리를 못 생겼다고 생각한 사슴은 그 못생긴 다리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는데도 그 근사하고 예쁜 뿔 때문에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이 우화는 인간의 그릇된 가치판단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는 우화이다. 진리의 본질에서 볼 때 이 세상에는 가치 없는 것은 없다. 때문에 구조적 연관성에서 보면 모든 가치는 평등한 동급의 가치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집 한 채를 지을 때 필요한 것은 모두 있어야 한다. 기둥만 있고 서까래가 없어도 안 되며 벽만 있고 지붕이 없어서도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것이 비중이 더 크느냐의 우열이 있을 수 있지만 부분의 역할을 구분하여 볼 때에는 어느 것이나 똑같은 자기 역할이 있는 것이므로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의 조화를 꾀해야 전체의 모습이 살아난다. 내 스스로가 부여하는 진정한 의미가 있는 일이 있을 때 가치는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가치창조라는 것이 삶의 질적인 수준향상이며, 동시에 자신을 개발하는 수행의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무용지물로 버려진 하찮은 쓰레기도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물로 쓰여 질 수도 있다. 쓰레기 더미 위에서 꽃이 피었다면 그 쓰레기가 썩어 꽃을 피우게 한 거름의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생활을 잘 해가려면 숨어 있는 가치를 찾아내어 응용을 잘 해야 한다. 아직 내 자신에게도 내가 찾아내지 못한 숨어 있는 가치가 있는 법이고 또 내 주위의 내가 처한 환경 곳곳에 찾아내지 못한 숨어 있는 가치가 있다. 가치는 꼭 자로 재는 길이처럼 긴 것이 좋고 짧은 것이 좋지 않다거나 짧은 것이 좋고 긴 것이 좋지 않다거나 하는 상대적 우열 논리가 아니다. 본래평등이라는 말은 획일적인 규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긴 것은 긴 것대로 좋고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좋은 것이 본래평등이다. 학의 다리는 본래 길고 오리 다리는 본래 짧은 것. 그것이 바로 본래 평등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4월 제65호

불매인과(不昧因果)

중국고사에 800년대 당나라 중기때, 백장선사(749-814)라고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백장선사가 백장산에서 설법을 하는데, 어떤 한 노인이 항상 와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사람들이 다 물러간 뒤에도 혼자 남아 있기에 백장선사가 궁금히 여겨 물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고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나도 과거 가섭부처님 시대에 이 산에서 살았었는데 어느날 학인이 나에게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고 묻기에 나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답했습니다. 그 과보로 인해 500년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제도하여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는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물어보라.”

노인이 다시 묻되, “스님께 묻겠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불매인과,不昧因果)”고 하였다.

노인이 이 말 끝에 크게 깨닫고는 하직을 아뢰면서 말하되,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뒷산 바위 아래에 둘 것이니 불가(佛家)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루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불락인과’라는 한마디 때문에 여우가 되었던 사람이 ‘불매인과’라는 한마디를 듣고서 어째서 여우의 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는지, ‘불락’과 ‘불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셨다면 부처님조차 여우의 몸을 받았을까요?

감히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인과에 떨어지고 안 떨어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치를 환히 아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그 도리도 모르는 사람은 “내가 말을 잘못 했나” 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되어 그 의심 하는 자체가 여우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락’과 ‘불매’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미혹으로부터 생겨나는 의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불매는 불락이니 불매니 하는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에서 분별의 차원을 초월한 ꡐ불매인과ꡑ라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자리를 바르게 쳐다보는 정법안목으로 공안을 바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