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사제(師弟) 간의 생명의 접촉이 선(禪)의 말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것만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뜻합니다.

선자(禪者)가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꽃이 빨갛고 잎사귀가 푸른 것도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있으므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새도 꽃도 그 나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들과 접하면 자연히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꽃은 말없이 피어납니다. 그래도 인간은 거기서 뭔가를 느낍니다. 그야말로 유마의 “침묵이 우뢰와 같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뢰와 같은 큰 음성이 침묵이라는 것은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사실은 무언(無言)이 아니라 진실의 목소리지만, 음계(音階)가 다르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자(修行者)가 산 속에 스승을 찾아와서 선(禪)을 묻습니다. 스승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자네가 이곳에 올 때 골짜기에서 개울을 건넜지?”

“네 건넜습니다.”

“그 개울의 물소리가 들렸나?”

“네 들렸습니다.”

“그럼 그 개울물 소리가 들린 곳에서 선(禪)에 들어가게.”

개울물 소리를 듣는 것이 선의 첫 걸음입니다. 도원(道元) 선사(禪師)는 《법화경(法華經)》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봉우리의 색깔이며 개울물 소리는

모두가 우리 석가모니 목소리와 모습이어라.”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인도하는 진리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이해하는 생활태도입니다. 백은(白隱) 선사(17세기의 선의 고승)가 “한 손의 목소리를 들어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손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다고 말하지 말고 들어 보세요, 반드시 들립니다. 대인(對人)관계에서도 역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쪽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7월 제44호

얼굴 표정의 온도

사람의 얼굴에는 80여 개의 근육이 있다고 한다. 이 80여 개의 근육으로 모두 8천여 개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어린 아이는 하루에 천 번을 웃는데 어른은 평균 고작 7번을 웃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웃을 일이 많고, 어른들은 왜 웃을 일이 그다지도 없을까.

웃음도 웃음 나름이겠지만 화난 얼굴이나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보다 환하게 웃는 모습은 대하는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 주고 생각을 바꾸어 줄까. 1920년대 말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종언을 고하는 세계대공황이 왔을 때였다. 1929년부터 근 10년간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되어 기업의 도산, 대량 실업, 디플레이션 등 전 세계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될 무렵 정말 잘 나가던 기업가 ‘카네기’도 이 공황恐慌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공장과 사무실의 문을 닫고 말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고민하다 결국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맨해튼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와 뉴욕항구 쪽으로 향했다. 불과 몇 블록 거리에 있는 바다에 투신자살을 하려는 것이었다. 얼마를 걸어 빌딩 모퉁이를 도는데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 소년이 길바닥에 연필 몇 자루를 놓고 팔고 있었는데, 이 장애인은 카네기를 보자 얼른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달려와 연필 한 자루만 사 달라고 매달렸단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연필장수가 보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냥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을 계속 따라오면서 “아저씨! 연필 한 자루 사 주셔요!” 하고 따라오니 귀찮기도 하고 해서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1달러 동전이 있기에 던져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애인이 계속 따라오면서 “아저씨! 연필 가져가세요!”하고 외쳐대 길래 힐끔 돌아보니 그 소년은 웃으면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장애인 소년의 미소를 보면서 카네기는 자살을 포기하고 돌아와 ‘철강왕’이 된 것이리라.

일찍이 가섭존자는 부처님께서 들어 보이신 꽃을 보면서 미소로 화답하였으니 [坫華示衆 微笑], 이 웃음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차원 높은 비법을 가르쳐주시기도 하였다. 또한 보살이 중생을 섭수 교화하여 불도에 들어가게 하는 사섭법(四攝法)의 하나인 애어섭(愛語攝)에는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얼굴, 웃는 모습보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서로를 이해하는데 좋은 방법이 있을까. 또한 중생에게 한없는 즐거움을 주고 고통과 미혹을 없애주기 위해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4가지 무량한 마음을 일으키는 사무량심(四無量心)에서도 선량한 중생을 대상으로 번뇌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도 웃음 머금은 표정은 가히 절대적이요, 청청한 수행을 닦은 중생을 보고 기뻐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따뜻한 말과 더불어 온화하고 웃는 모습에 더할 바 있을까.

자기는 잘 웃지 않으면서 남에게 푸근한 인상을 주려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리라. 나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머리에 떠올릴 때나 누구를 소개하거나 할 때는 그 사람의 웃는 모습을 떠올린다. 평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쉬 웃는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온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못지않게 얼굴 표정에도 온도가 있다고 본다. 인간다운 내면세계의 표출은 말과 표정으로 대표된다. 따뜻하고 맵시 있는 목소리로 상대가 이해하기 쉽고, 듣기 편하며 즐겁게 해야 한다. 항시 웃는 얼굴로 편안하게 사람을 대하자.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5월 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