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 한 마지기 노는 밭이여

산전일편한전지 山前一片閑田地 산비탈 한 마지기 노는 밭이여

차수정녕문조옹 叉手정녕問祖翁 손 모아 어르신께 여쭈나이다.

기도매래환자매 幾度賣來還自買 몇 번이나 팔았다가 다시 샀지요?

위린송죽인청풍 爲隣松竹引淸風 솔바람 댓잎소리 못내 그리웠습니다.

산비탈에 묵혀진 밭 한 마지기가 있다. 대대로 이를 가꾸며 살아왔던 그리운 시절이 생각나서 먼 조상 할아버지에게 넌지시 여쭈고 싶다. 이 밭의 임자가 누구누구였는지. 밭 근처에는 소나무 대밭이 있어 언제나 맑은 바람을 불러오고 있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자연 그대로 살던 시절이라 고향의 소식이 묻혀 있어 언제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 시는 중국 송나라 때 오조법연(五祖法演)선사가 지었다. 백운수단(白雲守端)의 법을 이었고 원오(圓悟克勤)의 스승이다. 만년에 오조산에서 선풍을 드날려 일세를 풍미케 하였다. 오조법연의 오도송으로 알려질 만큼 유명한 시이다. 산비탈 노는 밭이란 우리의 본성 곧 마음자리를 상징한 것이다. 아무런 가식이 없고 소박한, 부도 없고 명예도 없던 내 자성의 참모습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공연히 환영에 도취되어 미로를 헤매다가 고향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조옹(할아버지)은 자기 진심을 의인화 시킨 말로 볼 수 있다. 고향 가는 길을 찾은 후 헤매던 시절을 회상하며 본성을 등졌던 것을 고향 밭을 팔았다고 비유하였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4월 (제29호)

인간능력의 한계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연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학문도 없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게놈지도가 그려지고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인자가 속속 발견되고 있지만 그 역시 유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미련을 갖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이유는 인간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리라.

본래 인간은 참으로 무능하게 태어난다. 아마 어떤 다른 동물에 비겨도 인간만큼 무능하게 태어나는 존재는 드물 것이다. 갓난아기를 상상해 보라. 보호자의 도움이 없으면 얼마동안 더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다른 동물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틀비틀 걷기도 하고 엄마 젖을 빨기도 하는 것을 본다. 아마 가장 무능하게 태어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에 더하여 인간은 성장기간 또한 엄청나다. 성인 공자께서도 ‘삼십에 선다〔三十而立〕’고 하여 서른 살쯤 되어야 인격적ㆍ경제적ㆍ사회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요즈음도 대학 졸업과 남자의 경우는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취업도 해야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다 보면 삼십 년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어떤 동물이 30년이란 성장기간을 거쳐 홀로서기를 하는가. 가장 무능하게 태어난 인간이 가장 긴 성장기간을 거쳐 자립하는 것만 본다면 결코 대단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늦깎이 존재이지만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오직 인간만이 문화를 가졌고, 그 문화의 바탕 위에 다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다른 동물의 세계에서도 모듬살이를 하는 모습을 찾을 수는 있지만 인간처럼 새로운 문화를 열어가는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 능력의 가능성의 한계는 존재할까. 철학자 키에르게고르는 허공의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를 보면서 ‘중간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거미를 기준으로 최상위는 ‘신의 경지’이고, 최하위의 경지는 ‘동물의 경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거미와 같은 중간적 존재로서 본능적으로 신의 경지에 가까운 위로 올라가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결과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우리는 ‘깨달은 사람’, 또는 ‘성인’ 등으로 추앙하고 받드는 것이다. 거꾸로 인간임을 포기하고 끝없이 추락하여 동물의 경지로 떨어진 사람 또한 적지 않으니 이들을 일컬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하지 않는가.

근년에 들어 해가 갈수록 존속 살해범이 늘어나고 있다 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단순히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하지 않는가. 여기에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노인학대’ 신고 건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더욱 놀랄 일은 신고 건수의 85%이상이 ‘아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조사되어 가정에서 노인학대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본능적으로 신의 경지로, 지고의 선(善)의 경지로, 아름다움의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인간은 어디로 가고, 저급한 동물의 경지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다만 아쉽고 부끄러울 뿐이다. 남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널리 펴야 할 불자로서.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6년 10월 제71호

산 속에 들어와

가주벽산잠 家住碧山岑 산속에 들어와 집지어 살지만

종래유보금 從來有寶琴 내게는 예부터 보배 거문고가 있어,

불방탄일곡 不妨彈一曲 때로는 한 곡조 타고 싶지만

지시소지음 祗是小知音 내 곡을 들어줄 사람이 없네.

낙도음(樂道吟)이라 알려진 고려 중기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1061~1125)의 시이다. 도를 즐기면서 읊은 이 시는 작자의 생애를 그대로 나타내 놓은 시라 할 수 있다. 고려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현은 일찍이 선종6년에 문과에 급제해 대악서승(大樂署丞)이란 벼슬에 올랐지만 곧 사직하고 산으로 들어가 평생을 수도의 생활에 종사하였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청평산에 들어가 아버지가 지은 보현원이란 절을 문수원으로 바꾸어 고쳐 짓고 이곳에서 능엄경을 의지해 선을 닦고 선학에 몰두 하였다. 호를 식암(息庵)이라 했으며 때로는 희이자(希夷子)라고도 했다. 어릴 때 함께 지냈던 예종이 여러 번 입궐을 종용했으나 사양하고 수도로 일생을 마쳤다. 보배 거문고란 스스로 깨달은 자기 불성을 두고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