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은 강을 가고

三日江行七日山 삼일강행칠일산 사흘은 강을 가고 이레는 산을 간다.

一旬蹤迹是江山 일순종적시상산 열흘의 발자취가 강과 산뿐이구나

江山盡是胸中物 강산진시흉중물 강과 산이 모두다 가슴 속에 들었으니

咏出淸江咏出山 영출청강영출산 맑은 강을 노래하고 청산을 노래한다.

평생을 산을 따라 물을 따라 떠돌던 운수객(雲水客)이 있었다. 구름처럼 떠돌다 보니 발길 닫는 곳이 강이 아니면 산이다. 오늘은 이 강을 지나고 내일은 다시 저 산을 돈다. 천하강산을 돌며 보낸 생애가 이제 자신이 강산과 하나가 되어 강과 산이 모두 자기의 가슴 속이다. 보이는 사물이 모두가 자기 가슴 속에 들어와 앉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천지를 의지해 사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이 오히려 나를 집으로 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숱한 세월을 행각한 끝에 얻은 대자유의 해탈낙이 곳곳에서 노래로 흘러나온다. 남이 보기에는 비록 쓸쓸하고 외로운 나그네지만 이 외로움은 우주가 하나로 된 큰 외로움이다. 모두가 어울려 하나가 되니 상대적 홀로감이 없어져버린 채 고독 그 자체가 되기도 하고 환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 시의 작자 괄허(括虛1720~1789)선사는 이조 중기의 스님이다. 경북 문경 출신으로 사불산 대승사에 입산출가 하여 나중에 당대의 선지식이 되었다. 환암(幻庵), 환응(喚應) 두 스님의 지도로 선지를 터득하고 환응의 법을 이어 받았다. 정조 13년에 세수 70으로 홀연히 좌탈입적(坐脫入寂) 하였다. “70년 지난 일이 꿈속의 사람이었네. 마음은 물속의 달과 같은데 몸은 어째서 오고 가고 하는가?”(七十年間事 依俙夢裏人 淡然同水月 何有去來身)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괄허집이란 문집이 남아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월 제62호

흘러가는 강물도 함부로 쓰지 말라

일본의 유명한 도겐(道元:1200~1253)선사는 일본 조동종의 개조로 알려져 있다. 중국 조동종의 거장 천동정각의 법을 이어 일본으로 돌아와 조동종의 선법을 널리 선양하였다. 그가 영평永平寺에 회상을 차려 놓고 오래 머물었는데 그때 그의 상좌 한 사람이 원주院主 소임을 보고 있었다. 대중이 먹는 음식을 준비하며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소임을 원주라 부른다.

이 원주 스님이 매일 밤 자정이 되면 아무도 몰래 무엇을 끓여서 혼자 먹는 것이었다. 대중의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절이었는데 원주가 밤중에 몰래 자기만 별도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라고 누가 도겐 스님께 고자질을 하여 한 번은 도겐 선사가 직접 원주가 무엇을 혼자 해먹는지 숨어서 살펴보았다.

“무엇을 너 혼자만 그렇게 먹고 있느냐? 나도 좀 얻어먹자.”

당황한 원주가

“스님은 잡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하였다.

“나도 먹을 수 있으니 좀 다오.”

할 수 없이 원주가 그릇에 담아 먹던 쉰내가 나는 밥알로 쓴 죽을 보여 주었다.

“이게 쉬어 상한 것이 아니냐?”

“수채 구멍에 버려진 누룽지 찌꺼기와 밥알을 주어 내 끓여 본 것입니다.”

음식 찌꺼기를 함부로 버린 것을 제자가 주워내 남모르게 끓여 먹었던 것이다. 상좌의 행동에 크게 감동을 한 도겐 선사는 다음 날 대중을 모아 놓고 법문을 하였다.

“흘러가는 물이라도 쓸데없이 함부로 쓰지 말고 무엇이든지 아껴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복이 모아지느니라.”

경제수준이 높아진 현대사회는 한 마디로 비용이 많이 드는 고비용 시대이다. 생활비는 물론 개인이 소비하는 갖가지 물질에 낭비가 예사로 일어난다. 아낀다는 것은 인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물질이 아까워서 욕심을 부린다는 뜻이 아니다. 이른바 근검절약 정신이다. 근래에 우리나라 어느 큰 스님은 코를 풀고 난 휴지를 펴 햇빛에 말렸다가 다시 화장실 휴지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예로부터 과소비와 낭비는 내 복을 감하는 것이라 말해왔다. 선문의 규범에 말하기를 쌀 한 톨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내 살점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고 간장 한 방울이 버려지면 내 피 한 방울이 버려지는 것처럼 생각하라 하였다.

쓰다가 낡아진 헌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쓰다 헌것이라 버린 것이 남에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소중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과소비가 미덕이 될 수 없으며, 부의 능력을 나타내는 자기 자랑이 결코 될 수 없다.

인간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소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허영이 많다는 사실이다. 하긴 있으니까 사치를 즐기고, 필요이상으로 치장을 하고 산다 하여도 누가 흉보거나 나무랄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러한 허영과 사치가 자기의 다음 인생에 감복이 된다는 사실은 알아 두어야 한다. 때문에 건전한 생활 태도에는 반드시 소비절제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이 사니까 따라 사고 남이 먹으니까 따라 먹고 남이 입어니까 따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부자라도 가난했던 시절 조상이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조상들의 시절을 한 번쯤 생각해 보고 내 분에 넘치는 과잉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積善之家必有餘慶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의 덕택에 의식주의 고급화를 이루어 살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물질의 고급화에서 채워지지 않는다. 고비용으로 살수록 사는 게 더 힘들어 지고 번뇌와 고민이 더 많아지는 법이다. 고급화 될수록 더욱 복잡화지며 신경 쓰이는 데가 더 많아진다. 내 몸의 유지에 비용을 줄이고 내 집의 유지에도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 되리라 생각된다. 줄인비용을 모아 남에게 적선이라도 하면 내 복은 점점 더 자라나게 될 것이다. 선을 쌓는 이에게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게 될 것이라 하였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3월 1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