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서 벗어난 달과같이

사람 사는 기분이 날씨처럼 변한다고 한다. 맑게 개인 청명한 날이 있는가 하면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는 날이 있다. 바람이 몹시 불거나 황사가 끼는 날도 더러 있다. 물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날도 있다. 이처럼 오늘은 즐겁다가 내일은 슬프고 또 다른 날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일이 생겨 하루하루의 생활 감정에 변화가 오면서 살아가는 세월이 엮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 사는 일에는 언제나 애환이 섞인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신이 날 때도 있고 의기소침하여 매사에 의욕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노래에 박자와 리듬이 있는 것처럼 사람 사는 생활에도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리듬과 박자가 있다. 이것을 잘 조절하고 맞춰가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이다.

수행자를 경책하는 말에 ‘바람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순간의 기분에 치우쳐 자기중심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또 외부의 자극에 초연해지라는 뜻이 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바깥 경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8가지가 있다고 한다. 내게 이익이 돌아올 때와 반대로 손해가 돌아올 때가 내 마음이 흔들리는 2가지 경우이다. 또 남이 나를 직접적으로 칭찬을 하거나 비방을 할 때가 2가지가 된다. 우쭐거려지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경우로 면전에서 직접 당하는 수가 있고 내가 없는데서 칭찬하고 비방한 것이 제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올 때도 우리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리고 괴롭고 즐거운 경우에도 마음은 흔들려 깊은 고민을 하거나 들떠버리는 수가 생긴다. 이를 팔풍(八風)이라 하여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마음이 되라고 하였다. 감정의 동물인 사람이 어찌 상황에 따른 느낌이나 기분이 없으랴마는 마음의 정중(正中)함을 잃지 말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꽃바람 물결 속에 일난풍화(日暖風和)의 계절이 되어 한동안 상춘의 인파가 명산대찰을 비롯한 명승지로 몰리고 있더니 어느새 초여름의 기온이 되어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신록이 번지는 산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 내가 살아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사람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괴로워 할 일이 없고 고민할 것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긴 제나라 경공(景公)은 우산(牛山)에 올라갔다가 지는 해를 보고 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연의 심미(深味) 속에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나는 없어지고 물아가 하나가 된 자연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다만 경공은 우산에서 바라본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 보지 못하고 언젠가 죽어 이 세상을 떠날 것이 슬퍼 울었다는 것이다.

무문(無門)선사는 사시송(四時頌)을 읊어서 사람들을 달랬다.

“봄에는 온갖 꽃 피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가을에는 달이 좋고 겨울엔 흰 눈이 있다. 부질없는 생각 가슴에 담아 두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인생은 올 수 없다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문제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번뇌에 물들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느덧 사람의 마음은 중생의 업 속으로 들어와 잘못된 생각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는 일에 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면서 근심 걱정을 일부러 하고 탐 진 치 삼독을 이기지 못하여 불만에 빠져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시절 인연이 있다. 한 해에 사계의 순환이 있는 것처럼 삶에도 굴곡이 교차되는 시간의 내왕이 있다. 해가 뜨면 낮이 오고 해가 지면 밤이 오는 이치가 시절인연이다. 배휴(裵休)가 쓴 청량국사의 비명(碑銘)에 “태양도 밤의 어둠은 없애지 못하고 자모(慈母)도 죽은 자식의 시신을 곁에 두지 못한다 (大明不能破長夜之昏 慈母不能保身後之子)”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절인연을 관찰하라는 말씀을 남겼다. 하루 세끼 때를 맞추어 밥을 먹듯이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온다는 것이다. 밝은 시간이 오고 어두운 시간이 오는 것처럼 좋은 일이 오는 수도 있고 궂은 일이 오는 수도 있다. 궂은 일은 장애를 만나 시련을 겪는 것이다. 이때를 부처님은 달이 구름에 가려 빛을 비추지 못하는 때라 하였다. 동시에 내 마음에 어둠이 깃들어 심지가 밝지를 못하는 때이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나쁜 상태가 되어 구름 낀 하늘처럼 되어 버린다. 화창한 생기가 사라지고 풀이 죽어 회색의 얼굴빛이 되기가 일쑤다. 가장 불행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처럼 염세적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이리하여 행복을 불행으로 보는 전도된 착각이 마음을 지배해 버리는 것이다.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 살아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아라.”

모두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말씀들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

1. 인도불교의 발전

대승불교의 역사와 정신 1.인도불교의 발전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채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과 주고받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인도에서 불교의 역사는 크게 근본불교(根本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전개되어 나옵니다. 이후 불교는 동남 아시아 및 동북아시아로 전래되어 아시아 대륙을 불법으로 교화했으며 이제 서구 사회에서는 불교가 급속도로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근본불교 근본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전해져 그 말씀대로 신행하던 시절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지 1 ∼2백년 경과한 시절로 이때에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경전이 편찬됩니다. 부파불교 이후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출가 사문들 사이에서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생겨나 여러 가지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부파불교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 즉 법(法)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여 불교 교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스님들은 오직 사원에 머물러 법에 대한 철학적인 연구만 하고 자신의 번뇌만 없애는데 골몰할 뿐 이웃이나 사회의 구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대승불교 그래서 여기에 불만을 품은 새로운 불교 혁신 세력들이 나 하나만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함께 성불의 길로 나가자는 불교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만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부파불교도들을 작은 수레를 타고 가는 소승불교(小乘佛敎)라 비판하고 여럿이 함께 큰 수레를 타고 저 피안의 언덕에 이르자는 대승불교를 주장하게 됩니다. 대승(大乘)이란 바로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현재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이 부파불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소승불교의 단점은 오직 출가한 스님들만 번뇌가 끊어진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신분과 지식, 인종과 남녀의 구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피안의 언덕으로 실어 날라주는 큰 불교요 위없는 가르침을 지향합니다. 한국불교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티벳, 몽골,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대승불교권에 소속됩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근래에 접어들어 미국 및 유럽의 각국으로 퍼져나가 보편적 가르침으로서의 우수함을 널리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 아직도 유효함

“Wife is always right. _ 아내는 언제나 옳습니다.

부부싸움에는 이유가 많지만, 남편과 아내의 싸움에 이념대결이나 정책대결은 없습니다. 대개 작은 감정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감정이 격화되고 애증의 대립도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확대해석 하지 마세요. 작은 감정의 대립에 증오나 분노를 담지 마세요. 그리고 부부싸움에서는 언제나 아내가 승리하도록 하세요. 승부를 조작하시라는 말이 아니라 당초부터 부부싸움에 승패가 없으니까요.

그냥 씩 웃어주세요. 웃으며 싸워보세요. 아니면 노래하며 싸워보세요. 아내가 화를 내며 싸우자고 할 때아내의 18번을 불러 보세요. 더 이상 싸움은 없거든요.왜 그래야 하느냐고요? 아내는 항상 옳으니까요. Wife is always right. 이니까요.”

앞에 인용문은 최근 한창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Facebook에 내가 올린 짧은 글의 전부입니다. Face book에 “부부싸움은 심각하게 하지 말고 가볍게 하시라”는 뜻으로 올린 글인데 의외에도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나는 항상 지고 있습니다. 백전백패입니다”, “아내가 약 올리고 싸우자는데 웃으라니요?” 등등. 주로 남편들이 “Wife is always right”라는 제목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내는 이제 겨우 숨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708090년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나는 처음 만나는 분에게 이 칠언절구를 선물합니다. “아내사랑이야 말로 21세기 최고의 화두”라고,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 서울의 프레스센터(신문회관)에서 아내사랑 선포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708090년대 이 나라 경제발전은 아내들의 고독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경제적인 성공만을 위하여 이 나라 남편들이 밖으로만 나돌 때, 아내들은 무한히 참으며 그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세계에서 인내심이 제일 강한 이 나라 아내들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경제성장이고 한강의 기적이고 없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아내들은 이제 겨우 숨 좀 쉽니다. 이제는 남편의 인권을 주장해야 하느니, 남편을 보호해야 하느니, 여성상위시대니 하지만, 진짜 이 나라의 아내들은 이제 겨우 숨 쉬기 시작한 거 아닙니까? 그야말로 남편에게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온 아내들 아닙니까?

왜 우리가 아내사랑의 인생을 살아야 하느냐 하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한들 가정적 성공이 없다면, 그 숫자적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정의 성공을 위해 우리 거사님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내를 사랑하라’ 칠언절구는, 가정중심주의의 실현을 위한 메시지라고 보아 주시면 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그 일부분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아내사랑은 저절로 실천될 것입니다. 재가불자들에게 주신 부처님 말씀의 대부분이 아내사랑과 가정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김재원 前 ‘여원’ 발행인, 시인 글. 월간 반야 2011년 8월 1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