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행과 기도

1.수행과 기도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자유로워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행복과 해탈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면 행복과 해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것은 폭류처럼 흐르는 마음을 잘 다스려 걸림이 없는 삶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근 만근이나 되는 업장을 소멸하고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서 불자로서의 삶의 목적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서 요구되는 것이 수행과 기도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몸과 마음을 닦아 지혜를 얻어 윤회를 끊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수행이라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윤회를 끊어 해탈에 이르는 것이 기도라 할 수 있지요. 전자가 자력적이라면 후자는 타력적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절대자 및 신을 향하여 자기에게 부족한 점을 간구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에게 닥친 재앙을 없애고 복을 얻도록 부처님이나 신에게 비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기도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기도는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를 무작정 절대자에게 바란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그 무언가를 이룰 수 있도록 스스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강합니다. 나아가 그런 다짐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굳세고 튼튼해져 쉽게 좌절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는데 기도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과 기도에서 모두 요구되는 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집중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 집중 속에서 깊은 삼매에 들게 됩니다. 이 삼매의 경지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수행이라면 가피력을 얻는 것이 기도입니다. 삼매에 드는 과정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 지혜를 얻는 방법으로는 간경ㆍ사경ㆍ염불ㆍ진언ㆍ절ㆍ참회ㆍ정근을 통한 수행과 기도 및 수식관ㆍ부정관ㆍ자비관ㆍ간화선등의 여러 가지 참선법이 있습니다. 간경(看經)이나 사경(寫經)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을 보고 읽고 쓰거나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염불(念佛)이란 불보살님의 이름이나 모습, 그 본래의 마음을 관하거나 부르면서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요, 진언이란 부처님의 말씀 중에 참말씀을 외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절하면서 귀의하는 것이 108배, 1080배, 3000배 등의 절입니다. 특히 염불할 때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쉬지않고 수행한다 하여, 이를 정근(精勤)이라 하지요. 이러한 정근을 통해서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켜 마음이 맑아지게 됩니다.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간경ㆍ사경ㆍ진언ㆍ절 그리고 기타 수행법에도 이렇게 쉼없이 정진할 것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정진을 통해서 우리는 삼매의 상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나 수행에 들어가기 앞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참회(懺悔)입니다. 참회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온갖 잘못된 편견과 행위, 독선에 가득찼던 자신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앞으로 이러한 잘못을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러한 참회로 말미암아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그래서 참회의 행위 자체만으로도 업장이 소멸된다고 해서 참회만을 별도로 떼어내어 기도 내지는 수행의 방법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참선은 대표적인 자력을 바탕으로 한 수행법입니다. 참선(參禪)이란 선에 들어간다는 뜻이며 선이란 정신 집중을 통해 고요히 사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에 들어가는 참선의 방법으로 여러 가지 지관법(止觀法)이 있습니다. 지관법이란 마음의 동요를 그쳐(止) 사물의 참모습을 꿰뚫는 것(觀)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수식관(數息觀),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등이 있습니다.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들고 의심 해 들어가 마침내 그 화두를 타파하여 내 본래 모습이 부처님임을 깨닫는 수행법입니다.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1.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공식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입니다. 이후 불교는 백제, 신라로 차례차례 전래되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소중한 이상을 심어왔으며 그 이상에 버금가는 찬란한 정신과 문화를 꽃피워 왔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 가장 늦은 법흥왕 14년(537)에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원광, 자장, 원효, 의상, 도의, 도선과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되어 신라 땅을 불연 깊은 부처님의 대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광 스님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화랑도들이 미륵의 후예로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자장 스님은 “내 비록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수행자로의 단호한 의지를 천명한 청정 율사였습니다. 스님은 중국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져다 통도사를 비롯한 5대 적멸보궁에 모셨습니다. 사리란 수행의 결정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리를 모셨다는 것은 스님들에게 부처님의 수행 정신을 보여주어 수행자의 갈 길을 제시한다는데 있었습니다. 황룡사 9층탑을 세우신 분도 이 자장 스님입니다. 불법으로 신라의 위용을 내외에 크게 떨치기 위해 세운 이 탑은 그 규모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합니다. 의상 스님은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한 이후 부석사와범어사 등 유명한 대찰을 창건하여 이 땅을 갖가지 꽃으로 아름답게 장엄하게 되는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게 됩니다. 사찰에서 법회 때 독송하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의 철학적 원리를 짧은 게송으로 요약한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의상 스님의 대표 저작입니다. 원효 스님은 신라의 여러 고을과 산하를 돌아다니면서 걸림없는 대 자유의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서민들에게 불법을 선양했습니다. 나아가 스님은 여러 가지 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저술했는데, 그 저술들은 후대 한국불교를 발전시키는 굳건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서로간의 다툼을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가르침을 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 일본불교와는 달리 종파적 경향이 덜하게 됩니다. 이를 회통불교(會通佛敎)라 하는데, 이것이 한국불교의 큰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스님들의 공헌뿐만 아니라 신라 역대 왕들은 모두 법명을 자기 이름으로 삼을 정도로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는 더욱 번성하여 경덕왕 시절 세계적인 문화유산 중에 하나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되었으며,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수많은 불교 문화유산을 남기게 됩니다. 신라말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시조가 된 도의 국사가 출현한 이후 아홉 개의 산에 선문이 차례로 개창되어 우리나라에 선불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구산 선문(九山禪門)이라 합니다.

고향을 찾는 마음

민속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 귀성 인파가 전국의 고속도로를 꽉 메우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잠시 고향에 대한 추억을 생각해 본다. 우리 같은 출가한 사람에게는 고향을 찾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고향은 가슴 속에 언제나 남아 있다. 사람에게 고향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태어나서 처음 이 세상의 빛을 본 곳이 고향이다. 부모의 품에 안겨 돌을 지내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올리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던 고향. 지구가 넓고 도처에 사람 사는 곳이 많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한 것이 어디에 있던가. 인간은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라는 것은 중생세계에 있어 인연이 맺히는 자리이며, 고향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자리이다. 말하자면 내 인연이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된 곳이 고향이 갖는 의미이다. 시간이 갖는 의미의 시작은 결과의 성취를 이룬 근본인연이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게 된 것은 고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지리적 근본배경이 되어준 고향의 은혜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내 정서의 보금자리인 고향이 있기 때문에 외로움도 달랠 수 있고 슬픔도 달랠 수가 있다. 고향이 있다는 생각만 하여도 스스로 위안이 되고도 남는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지리적 장소인 고향이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쓰는 예가 있다. ‘능엄경(楞嚴經)’에는 중생이 나고 죽는 생사의 윤회를 고향을 떠난 ‘객지 생활’로 비유한다. 즉, 사람의 일생은 여행자가 여로 중에 하루를 묵는 숙박과 같다는 것이다. 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나간 사람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해가 져 밤이 되었을 때 여관 같은 곳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는 시간이 한 생애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은 저기서 묵고 하는 것이 금생과 내생의 생애라는 말이다. 세세생생을 계속하는 것은 객지 생활을 전전한다는 뜻이 된다.

‘가향로(家鄕路)’라는 말이 있다.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란 뜻이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길처럼 윤회를 벗어나 해탈, 열반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 고향길이다. 가슴 속에 일어나는 영원한 향수는 이 고향길을 찾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세 개의 고향을 말하기도 한다. 하나는 내가 태어난 곳으로 명절 때 찾아가는 어릴 때 살던 정든 곳이다. 언덕이 그립고, 산고개가 그립고, ‘남쪽바다 파란 물’이 그리운 내가 태어난 아름다운 곳, 그렇게 고향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공간 다음에는 천륜의 고향을 이야기 하는데, 나를 낳아준 부모를 고향이라 한다. 부모가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고향이 되어버린다. 고향은 부모의 품과 같은 것이며, 부모의 품은 언제나 효의 본고장이 되어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고향이 있다. 세 번째 고향인 이 고향은 문학적으로 말하면 영혼의 고향이다. 이 세상 인연이 맺어지기 전의 시공을 초월해 있는 생명실상의 고향이다. 곧 내 마음의 성품, 불성佛性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정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고향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자리다. 영원을 잉태하고 무한을 잉태해 있는 진여眞如의 그 자리가 우리들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 생각은 이 세 가지 고향의 개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고향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이 고향생각이 나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는 생각의 샘물이다. 생각의 원천이 고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한 번쯤 깨달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향 찾아 가는 명절의 길처럼 내 인생의 길도 고향 길을 향하는 여로이다. 언제 쯤 영혼의 고향에 도착할 것인가?

君自故鄕來(군자고향래)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

應知故鄕事(응지고향사) 고향의 일 잘 알고 있겠군요.

來日綺窓前(내일기창전) 떠나오던 날 우리 집 비단 커턴 쳐진 창 앞에

寒梅着花未(한매착화미) 추위 겪던 매화가 피었던가요.

시의 부처(詩佛)라고 불리던 왕유(王維)의 시이다. 이 시에서의 고향은 무한한 뜻을 상징하고 있다. 고향 소식을 묻는 말이 ‘매화가 피었더냐?’는 말이다. 매화는 고향 소식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매화꽃이 필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0월 1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