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사람에게 가장 큰 일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일은

-경허스님-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일은 태어나고 죽는 일이며 세월은 무상하게도 덧없이 빨리 흘러가므로 참선하는 사람은 이를 두려워해야 하며 항상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은 비록 몸을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하기 어렵다” 하였다.

사람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왜 내가 살고 있는가를 명심해야 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단 한 시간이라도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 실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그저 하염없이 지내야 한다.

만약 마음의 경계가 서로 흔들려서 마른 나무에 불이 붙듯이 번잡스레 정신없이 세월을 그냥 흘러 보낸다면 이것은 비단 화두 드는 공부에만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업보만 더해질 뿐이다.

그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마음을 무심(無心)에 두고 마음을 닦으면 마음 지혜가 맑아지는 법이다.

초기경전 (3)연기법을 설명한 아함경

모든 부처님 경전 가운데 가장 원형이 되는 경이 『아함경(阿含經)』이다.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수행가풍의 면모를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경은 역시 『아함경』이 으뜸이다. 흔히 이 경을 소승경전(小乘經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대승경전의 근거가 되는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 교리가 이 경을 중심으로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 천태의 5시설에서 말하듯이 부처님이 성도한 이후 8년간 설했다는 초기 설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5시설이란 부처님 일대 시교(時敎) 곧 평생 동안 하신 설법의 그 시기를 다섯으로 나누어 분류를 하는 것을 말한다.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시(法華時), 화엄시(華嚴時) 이렇게 대표적인 경전 이름을 들어 그 설법한 순서와 시기를 설명한다.

‘아함’이란 말은 범어 아가마(?gama)라는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로 뜻을 번역하면 법을 전한다는 ‘전교(傳敎)’의 뜻이 된다. 처음 경을 결집할 때 대가섭의 물음에 대하여 아난이 대답한 것을 대중들이 다시 외워서 완성한 것을 부처님의 설법이라 하여 전해 왔다는 뜻이다. 어느 경전보다도 사실의 구체성이 밝혀진 경이므로 원시불교 시대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상태와 철학적 사상의 배경을 알아볼 수 있고 그 배경 속에 부처님의 해탈도(解脫道)가 어떻게 설해졌나를 알아볼 수 있는 경이다.

부처님의 해탈도라 말했지만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인데 그 깨달은 경지를 동적으로 말할 때는 해탈(解脫, mok?a)이라 하고, 정적으로 말할 때는 열반(涅槃, nirv??a)이라 한다. 해탈이란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요 열반이란 고요히 평화스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보충해 말하자면 해탈이란 나고 죽는 생사운명(生死運命)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고, 열반이란 번뇌를 일으키는 욕망·망상 따위가 완전히 쉬어졌다는 뜻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와 평화라는 뜻이 된다. 자유와 평화는 이 세상[此岸] 저 세상[彼岸]의 목표이다.

『아함경』에는 주로 해탈의 방법을 구체적인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면서 설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아함경』은 다시 한역 경전에서도 네 가지가 있고 팔리 어 본(本)인 남전 계통에서는 五部[5Nik?ya]로 다섯 종류가 있다. 이른바 『장아함(長阿含經)』, 『중아함(中阿含經)』, 『잡아함(雜阿含經)』, 『증일아함(增一阿含經)』은 한역의 ‘4아함’이고 『장부(長部)』, 『중부(中部)』, 『상응부(相應部)』, 『증지부(增支部)』, 『소부(小部)』는 남전장경 팔리 어 본의 ‘5니가야’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

사람이 일생동안 자기 일에 바치는 노력은 한이 없다. 그 노력이 선업을 지어가는 착한 일이든 악업을 지어가는 나쁜 일이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의 일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수고하시오”하는 인사말처럼 인생이란 결국 수고의 연속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남다른 목적을 가지고 평생을 바치는 예술가나 혹은 수도자의 세계에서는 내면적으로 기울이는 자기 정진의 도수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날씨에 따른 기온의 온도 차이처럼 사람마다 자기 인생에 기울이는 수고의 도수가 다르다. 이 수고를 자기 인생에 대한 정성으로 본다면 정성의 도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위대한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도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노력을 지혜가 선도해 줘야 한다. 맹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결과에 가서 어리석음의 소치로 평가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다. 또 목표가 잘 설정되었다 하더라도 노력하는 행위자체에 하자가 있으면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는 수도 얼마든지 있다.

중국 당나라 때 마조(馬祖)스님의 일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마조스님이 법당 앞에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스승인 회양선사가 물었다.

“거기 앉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무엇 하려 하는가?”

“빨리 깨달아 부처가 되어야지요.”

다음 날 마조는 또다시 같은 장소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때 회양선사가 마조가 앉아 있는 곁으로 와서 돌에다 기왓장을 갈고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이를 쳐다보던 마조가 물었다.

“무엇에 쓰려고 기왓장을 갈고 계십니까?”

“이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해.”

“아니 스님,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누구는 앉아서 부처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앉아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나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마조가 깨달은 바 있어 다시 여쭈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 수레가 멈추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마음은 소고 몸은 수레와 같다는 뜻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선(禪)이 되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선이 되느냐는 말이다.

지금도 이 고사에 얽힌 유적이 남아 있다. ‘마경대(磨鏡臺)’란 글을 새겨 비석을 세워 놓았다. ‘거울을 갈았다’는 뜻도 되는 이 말은 마조가 마음을 깨달아 도를 이룬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문제는 참된 일을 하려다 헛수고를 하는 수도 있는 법이며, 다만 헛수고를 깨달아 목적을 바로 성취하면 헛수고가 헛수고 아닌 것이다. 좋은 일을 하려다 때로는 시행착오도 있다. 그러나 뭔가 잘 해 보려고 애쓰는 노력 그 자체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헛수고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 자기 일에 대한 정성이 없으면 수고에 인색해져버려 아무 보람을 성취하지 못하는 법이다. 헛수고를 하는 우를 범하더라도 해 보고자 노력하는 가치는 참다운 것이다. 물론 끝까지 우를 범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하지만 “우공(愚公)이 산을 옮긴다”는 말처럼 헛수고를 탓하기 전에 우선 끈질긴 노력이 더 필요하고, 좋은 뜻이 전제되어 있는 일에 있어서는 헛수고는 결코 없다.

마조가 좌선을 하였으므로 회양선사가 기왓장을 갈았고 이런 일을 계기로 하여 도를 깨달았던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7월 제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