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스님─우리는 왜 불교공부를 해야하는가

우리는 왜 불교공부를 해야하는가?

( “백일법문 재가논강”의 오대산 월정사 수련회에서 하신 법문)

이번 “백일법문”공부를 하면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가? 이 공부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공부도 잘 되고 불교가 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선(禪)을 한 입장이니까, 선의 입장에서 “왜 불교 공부를 하느냐?”에 답을 드린다면, “우리가 부처다, 내가 부처다”는 것을 알고 믿어 “부처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안 사람도 있을 겁니다만,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부처입니까? 부처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왜 필요한가? 이 점을 먼저 알아봅시다.

이 지구상에는 수 많은 대립과 갈등, 전쟁이 있습니다.

개인, 이웃, 사회, 인종, 민족, 종교 갈등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나라에 갈등도 엄청나게 많지요.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 노와 사, 남과 북 …

그런데 우리가 부처란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런 모든 갈등이 하루 아침에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운문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면 “매일 매일 좋은날이다” 우리가 부처인 것을 알아 부처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란 것을 알아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불교 안에서도 갈등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가끔씩 일어나는 총무원의 각목 싸움뿐만 아니라 선과 교의 갈등, 선과 위빠사나, 염불, 주력 등등의 분열과 갈등은 참 희한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여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안다면 부처와 부처가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기 때문에 싸웁니다.

우리가 가정으로 돌아와 보면 부부 사이에도 싸웁니다.

부모와 자녀도 그렇습니다.

형제간에도 그렇지요.

또 자기 자신과도 분열하고 갈등하는 일도 많습니다.

서로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반목하고 무시합니다.

상대와 대립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부처라 하는데 이렇게 싸울까요? 우리의 의식구조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의식구조의 본질이 진짜 대립 갈등하는 구조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를 바로 이해하면 이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대립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가 바로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통일이 되어 반목과 질시, 무시, 억압,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이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우리의 존재원리가 이미 통일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착각에 빠져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롭게 살고 대립과 갈등 그리고 전쟁까지 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인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 내가 부처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알기 위해, 중도연기를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부처라는 것을 빨리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백일법문』을 통해 내가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남는 시간은 실천해서 체험하는데 투자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출가한지 40년이 넘습니다만, 출가해서 이것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정열을 바쳤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보니까, 알고 보니까 굉장히 억울하데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알기 위해 내가 “그 수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백일법문』을 읽고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그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해서 실천 수행 즉, 참선을 하면서 사회 봉사도 하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믿으면 매일매일 좋은날이 된다.

제가 불교를 이해하고 믿으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왜 가능할까요? 간단합니다.

“중도연기”만 이해하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그럼 “중도연기”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이든 단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최소 물질이란 것도 2~3가지 물체가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연기(緣起)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란 것도 아파트이든 단독 주택이든 실제로 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백 가지 재료가 얽혀서 집이 된 것이죠.

집이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나옵니다.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이다”하지요.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집이란 것도 독립된 실체가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 모든 물질이 이와 같아서 서로서로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이것을 “우주 만물이 연기(緣起)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우주 만물에 나도 포함되어 있으니 나도 연기로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의 몸은 수십조의 세포가 결합하여 생긴겁니다.

이 수십조 세포가 결합하여 정신 작용을 나타내니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하여 연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내가 연기로 존재한다는 존재 원리를 알게 되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나와 남을 차별하고 진보다 보수다, 옳다 그르다 시비분별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 연기를 이해한 것을 “양변을 여읜 자성 자리”라 합니다.

양변을 여읜 자성 자리를 깨치면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연기를 이야기한 종교는 불교 밖에 없습니다.

이 불교의 양변을 여읜 자리는 부처도 부정하고 중생도 부정합니다.

양변을 여읜 자리에는 부처도 중생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입니다.

남녀간에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쓰지 않습니다만, “은애(恩愛)”라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서로 서로 위해주고 사랑한다는 말이죠.

서로 위해주고 고맙게 생각하며 사랑한다면 이혼할 일이 없겠지요.

우리 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라는데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 지구상에 대립과 갈등, 전쟁이 지속되고 심화되는 것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구조 때문인데요, 더 심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없다”는 연기(緣起)사상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연기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스님들은 평생을 보내고도 알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백일법문』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200페이지 정도, 그것도 많습니다.

100페이지 정도만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으면 어느 날 이해가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평생 읽지 않습니까? 『백일법문』100페이지까지는 5~10번까지만 읽으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연기”를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입니다.

그중에서도 화두 참선이 가장 빨리 가는 길입니다.

혹 참선이 어려워 공부가 잘 안되는 분은 염불, 위빠사나, 절, 봉사 등 다른 공부를 하시되 자기를 비우는 공부는 다 불교 수행입니다.

양변을 여의어 가고, 착각을 비워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를 가리는 구름이 조금씩 조금씩 엷어 가는 겁니다.

불교 수행은 뭘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남을 위해 주고 도와주고 자상하게 됩니다.

“연기”를 이해하기 위해 『백일법문』을 다시 보세요.

이 존재 원리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해하게 되면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굉장히 회한을 느끼고 눈물이 나올겁니다.

회한의 눈물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나에 집착하여 남을 미워하고 살았나! 선과 교는 하나다.

남과 대립하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다.

불교의 선(禪)과 교(敎)는 다른 게 아닙니다.

같습니다.

교는 양변을 여읜 자리를 논리로 이해하자는 것이고, 선은 여읜 자리를 논리를 초월하여 체험하자는 겁니다.

결국 같은 겁니다.

이것에 벽을 두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원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됩니다.

선과 교의 차별도, 부처와 중생의 차별도,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별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흔히 참선하는 사람들은 목에다 힘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목에 깁스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참선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양변을 떠나자는 사람이 거꾸로 양변으로 가는 겁니다.

잘못된 것이죠.

평등합니다.

차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 우주의 존재 원리가 연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연기를 알면 이 세상에 독립된 내가 따로 없고 나와 남이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남과 대립 갈등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돕고 협력하여 자기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어 무한 경쟁이 아니라 무한 향상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출처 : 달마넷

구름걷힌 가을 하늘 달이

운권추공월인담 雲捲秋空月印潭 구름 걷힌 가을 하늘 달이 못에 도장을 찍었네

한광무제여수담 寒光無際與誰談 그지없는 물에 비친 달빛 누구에게 말해줄까

활개투지통천안 豁開透地通天眼 하늘과 땅을 뚫어 막힘 없는 눈을 뜨면

대도분명불용참 大道分明不用參 큰 도는 분명하여 참구할 필요 없네

사람이 도(道)를 멀리하지 도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 곁에 항상 진리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다만 눈먼 장님이 해를 못 보듯 미혹한 중생이 제 곁에 있는 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핑게가 있다면 어두운 밤에 빛이 없으면 물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두워서 도가 안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일이 무엇이었나 하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횃불을 하나 만들어 놓고 이제 밝아졌으니 눈 있는 사람 와서 보시오! 보고 싶은 사람 와서 보시오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나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기가 범부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누가 달 밝은 밤에 호수에 나갔다. 물 속에 동그란 달 그림자가 도장을 찍어 놓은 듯 떠 있고 교교한 달빛 사이로 차가운 냉기 마저 감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가슴속의 회포 이건 정말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상을 비추고 있는 달빛의 무궁한 뜻을 누구에게 무어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정수리에 눈을 가진 사람은 여기에서 그윽한 종지(宗旨)를 바로 보아내는 것이다. 천지를 관통해 보는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에겐 언제 어디서나 대도가 분명히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예장 종경(豫章 宗鏡)선사의 금강경 제송강요(提頌綱要) 속에 들어 있는 이 게송은 닦을 것도 없는 도(道)의 본체가 만상 속에 드러나 있음을 묘사해 놓은 명시(名詩)이다. 그는 사람이 삼라만상 차별의 본 뜻을 알려면 푸른 못에 떠 있는 달을 두 번 세 번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하였다. 이른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는 소식이 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부처를 찾을 것조차 없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제 곁에 있는 것을 있는 줄 모르기 때문에 찾는다는 역설이 나오며 나아가 이미 내가 부처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처이므로 특별히 찾을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13호)

고산스님─남의 허물 꾸짖기전에 자기잘못 먼저 살펴야

남의 허물 꾸짖기전에 자기잘못 먼저 살펴야

고산스님

지금의 우리 사회는 너무나 혼탁해서 하루라도 빨리 도덕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무너져가는 윤리·도덕을 바로 잡는 길은 오직 부처님 법의 실천과 포교뿐임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2천5백년전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일곱걸음을 걸은신 후에 한손은 하늘을 가르키고 한손은 땅을 가르키며 하신 말씀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부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류, 심지어 미물, 곤충, 초목,총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불성(佛性)자리를 가지고 있고, 그 불성 자리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첫 사좌후로 “이렇게 거룩한 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너희는 왜 암흑세계에서 헤매고 있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듣고 생각을 돌려서 깨달아라”고 설하셨습니다.

이렇듯 49년간 설하신 부처님의 법문은 구절구절마다 윤리·도덕 아닌 말씀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3천위와 8만수행을 갖추신 분입니다.

위엄과 거동이 3천가지, 실행에 옮긴 부처님의 행이 8만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3천위 8만행을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부처님앞에 달라며 바라기만 할 뿐 입니다.

화엄경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얻는 복은 ‘거러지’ 복이요.

주는 복은 ‘보살복’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거러지 복을 계속 지으려고만 하니 참 암담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 나도 남과 같이 남에게 자비심을 베풀게 해 주세요” 라고 빌어야 그 사람에게 복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복을 달라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금생 내내 불교를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꿔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인연으로 종을 삼아 심신을 주창했으며, 믿음으로 실천에 옮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심(信心)입니다.

신심은 믿을 ‘신’ 마음 ‘심’자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은 너희 마음을 믿어라”며 스스로의 마음에 가책되는 행을 하는 자는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자는 ‘무위무작(無爲無作)(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고 조작함이 없는 것)’으로 행을 삼아 생을 살아가니 죄지을 일이 없다고 얘기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애착을 가지고 아웅다웅 싸울게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공자께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종을 삼아서 신의를 주창했습니다.

이렇듯 세계 모든 성인을 통틀어서 살펴 본다면 그 어느 성인도 윤리도덕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신 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분 가운데 일거수 일투족 도덕에 대한 말씀을 하신 분은 오직 부처님 뿐입니다.

우리 스님네들이 입산해서 제일 처음으로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보면 부처님께서는‘큰자는 형으로 삼고, 작은 자는 아우를 삼으라’ ‘높은 소리로 침뱉지 마라’ ‘옷깃을 헤치고 팔을 흔들고 돌아다니지 마라’ ‘병든 사람이 있거든 자비한 마음으로 간호를 잘 해라’ ‘음식을 먹을 적에 쩝쩝 음식 씹는 소리, 후루룩 물마시는 소리를 내지 마라’등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결론적으로‘자기 몸 가운데 잘못됨을 항상 꾸짖고 고쳐 착한데로 옮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8만대장경의 경·율·론에 윤리·도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율장)에는 ‘자기의 잘못을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제일 근본입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의 허물은 열가지도 넘기 마련입니다.

자기 허물 없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는 법이죠.

그래서 부처님의 율장은 불문에 귀의했을때 오계(五戒)를 설해줍니다.

오계는 ‘산 목숨 죽이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음행하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

술마시지 마라’는 것으로 이것은 전체 윤리·도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팔관제계를 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 스님들 비구 250계 비구니계 348계 모두도 ‘~해라, ~하지마라’ 등으로 전체가 윤리성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논장또한 그렇습니다.

(능엄경)에 보면 ‘한 국토에 생(生)하는 자, 한 나라에 태어나는 자, 전체가 동업(同業) 중생이다’했습니다.

동업중생이란 업을 같이 지었기 때문에, 똑같이 한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동업중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동업으로 태어난 우리 중생이 서로 치고 박고 얼굴을 붉혀서 되겠습니까 남북이 가로막힌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여러분 마음 가운데 담장이 높이 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 각각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남북통일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능엄경에서는 ‘동업중생’화엄경에 “일체중생의 뜻을 거스리지 아니하고 일체중생의 숙원하는 바를 따라 베풀어 주는 것이 가히 다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위해 베푼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이험악한 세상을 풍요롭고 따뜻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또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해 중생업이 다하고, 중생번뇌가 다하더라도 나의 원은 다 할 날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일체 중생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베풀어 주는 이 생각, 허공계 내지 중생업·번뇌가 다 하더라도 내 원이 다 할 날이 없다는 광대무변한 보현보살의 행원이 있는데도 여러분들은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행하려고는 아니하고 욕심 보따리만 안고 있으시겠지요.

욕심을 버리고 텅빈 마음으로 법문을 들어야 제대로 들릴 것입니다.

마음 그릇을 먼저 비워야 물건이 담깁니다.

또다른 예로, 여러분은 모두 보살계를 받았을텐데 경전 구절에 ‘부모·스승·삼보를 효순하는 법’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부처님이 설하신 (부모은중경)에 보면 ‘나를 낳아 키워 준 부모를 양 어깨에 모시고 수미산을 돌고 돌아 이 몸이 닳아 미진이 될지라도 부모 은덕은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는 세상인 것입니다.

가끔 제주도 법회차 그곳에 들렸다가 들었는데 4,5년전부터 노인들을 제주도에 버리고 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효도관광시켜 준다고 제주도로 데리고 가 “어머니, 아버지 여기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 뭐 마실 것 좀 사 올게요”라고 말하고는 그 길로 내빼, 자기들만 비행기타고 와 버리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만이 아니라 설악산, 지리산, 공원지대마다 노인들을 갖다 내 버린다고 합니다.

자, 이렇게 내 버리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 보세요.

물론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끔 잔소리로 젊은 사람을 귀찮게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식된 도리를 그렇게 저버려서 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을 지나가는 말로 한번 들었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 말씀만이 아니더라도 세계 4대 성인들의 명언을 한번 들었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교수가 자기 아버지를 죽여 놓고 허장성쇠로 곡하는 비양심적인 행위를 취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과욕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극락을 가고자 한다면 욕심부터 버려라.

성불을 하고자 하면 욕심을 버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절에 오면 법회 시작전이나 끝난후에 엎드려서 빈다는게 ‘달라’ 소리만 합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 입니까.

부처님은 “목숨이 짧은 사람은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면네 목숨이 길어질 것이다.

병든 자를 구완하면 네 병이 없어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복이 없는 자는 복덕 종자를 심어 베풀어라.

베풀면 온다.

결과의 열매를 스스로 거둔 것이다”고 윤리·도덕의 실천을 말씀 하셨을 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모든것을 나눠 주리라’처럼 ‘오너라, 준다’는 요행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2천만 불자는‘달라’ 소리 하는 사람만 많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포교를 못한 스님들에게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들의 짧은 실천력에도 그 원인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법문을 실천하려 하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이다’라며 지나치지는 않습니까? 설령 그렇다고한들 악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더 많은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조금 더 신경써 악한 몇몇 사람을 교화시키면 이 사회는 밝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행하는 사람이 윤리도덕을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고 참다운 불자가 되는 길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발로참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드러낼 것을 확 드러내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발로참회입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살때 집안이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가 될때 비로소 세상이 확 트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상을 버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반조하지 아니하면 경을 아무리 봐도 이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실천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이 그릇된 세상을 바로 잡을 이는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또 부처님 법을 전하는 스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사회를 부처님 법으로 밝히지 아니하면 영영 이 세상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법문을 듣는 여러분이 모두 하심해서 포교사가 돼 보세요.

하루 아침에 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른 소리만 하고, 부처님 법을 전달하며 사세요.

그것이 부처님 뜻을 이어 이 세상을 밝히는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을 밝히는 선구자가 돼야 하고 인도자가 돼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나신 것은 그 나름대로 다 뜻이 있어 나셨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