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길

사람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있다. 이는 오직 자기 혼자만 가는 길이다. 누구와도 동행이 불가능한 이 길은 기실 그 사람의 인생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내가 둘이 없다. 나는 하나뿐인 오직 나이기만 한 것이다. 설사 비슷하다고 말 할런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나를 모방하거나 흉내 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만의 나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惟我獨尊)”을 외쳤다는 말처럼 유일무이한 나이기에 내가 가는 길 또한 하나뿐이다.

“장부에겐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향한 곳을 향해 가지 말라(丈夫自有衝天志 莫向如來向處行)”고 하는 선가(禪家)의 유명한 격언이 있다. 오직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서 나 홀로 간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우리는 나를 너와 나의 상대적인 나라고 생각하지만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나의 정체는 알아지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남을 의식하면서 남과 비교하면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바로 알려면 우선 자아를 탐구하는 자기공부를 해야 한다. 자기공부란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보듯이 명상과 사색을 통해 조용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서는 누구나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아무리 사색을 하고 명상을 해도 자기의 마음을 바로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나를 바로 알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그릇된 망념이 마음에서 일어나 자기의 본래 순수한 마음 그대로가 보이지 않고 번뇌가 일어난 상태가 곧잘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어떤 감정이 선입견이 되어 그 선입견에 감염된 상태의 마음을 자기 주관이라 하고 그 주관이 자기 존재의 근본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의 노예가 되거나 이데올로기의 추종자가 되어 자기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에 대해 그릇된 확인을 해버린다. 자기 확인을 틀리게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임에도 예사로 틀린 확인을 하고 따라서 틀린 주장을 내세우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마치 옥 아닌 잡석을 옥이라 하는 것처럼 가치의 전도를 초래해 참 진리에서 어긋나져 버리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에서 나를 목적으로 하여 수행한다고 한다. 우리는 세속적인 환경에서 어떤 목표를 세울 때 객관적인 어떤 상황이 성취되도록 노력을 기울여 그 결과가 객관적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가령 부자가 되거나 자기의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는 것들이 대외적으로 자기 존재를 의식하는 차원에서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의 목적은 내 주위의 환경에 가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나는 항상 내 밖의 객관 대상에 어떤 목적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적인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확인이 선행되지 않는 한 밖으로 구하고 다니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보게 된다. 내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가는 곳은 내가 있는 곳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쓴다. 이 말은 곧 내가 나를 찾아 간다는 것이다. 선 수행에 있어서는 이를 곧잘 고향 찾아가는 것에 비유하여 말한다. 오랜 세월을 객지에서 유랑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고향 길을 밟았다고 오도의 순간을 묘사해 놓은 말들이 많이 전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 세속적 환경의 인연이 만들어준 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자기답게 스스로 가꾸어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영원히 가야 하는 길이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꾸준히 가고 가야 하는 길이다. 출발한 그 자리에서 출발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길, 그래서 옛 사람들은 가도 가도 그 자리라고 하였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사나이 가는 곳이 고향인 것을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얼마나 많은 사람 객수에 시달렸나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크게 질러 온 세상을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이 펄펄 날린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오도송으로 알려진 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

3. 사홍서원

3. 사홍서원 불자로서의 삶의 목표는 보살도의 실천을 통한 행복과 해탈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자들은 보살의 길을 가겠다는 네 가지 큰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인데, 이는 불자로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불자들, 특히 보살로서의 인생 목표는 보리를 구하고 중생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이 사홍서원 중 첫 번째 항목인 중생무변서원도는 중생 구제의 원을 다짐하는 이타적 내용이고 나머지 세 항목은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며 불도를 이루리라는 자리적 내용인 것입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衆生無邊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리도다 (法門無量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佛道無上誓願成) 이 서원과 관련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또 하나의 덕목이 회향(廻向)이라는 말입니다. 회향이란 자기가 닦은 공덕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게 하는 열린 교류요 자비의 실천입니다. 나와 너, 나와 이웃, 나와 세계에 이러한 회향의 법칙이 작용하여 남이 잘못한 대가를 내가 대신 받으며 내가 잘한 대가를 남에게 돌립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을 구제하기 위해 간절히 서원을 발하는 자비심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모든 행사의 끝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예식으로서 회향식을 올립니다. 행사의 과정에서 쌓은 공덕을 이웃을 향해 회향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과 회향의 마음은 자비심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 가는 불자들이 항상 지녀야할 덕목이라고 할 것입니다.

고관대작들의 퇴임

일전에 지인들이 몇이 모여 담소하는 자리가 있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생뚱맞게 ‘지금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자리를 같이한 너댓 명의 입에서는 얼마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차라리 총리의 이름을 모르는 게 낫다는 쪽으로 화제는 돌아갔다. 선진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제나라의 국가원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데 하면서 정치 문외한들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라도 없겠지만 총리나 장관의 이름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여론이었다. 총리나 장관이 하도 자주 바뀌니 기억할 틈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기의 일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게 지금의 정치현실인 것 같다.

그런데 참 꼴볼견인 일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다. 같은 정권 하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이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머물렀던 정권의 핵심부를 향해 다양한 형태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초심을 버렸다느니, 정책에 잘못이 있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 못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어쩌면 의리도 체면도 양식도 없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그래서 감히 민족의 고전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공직자들의 영원한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의 마지막 장인 ‘제12장 해관육조(解官六條)’를 다시 펼쳐 보았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기 위해서다. ‘벼슬이란 반드시 체임(遞任; 벼슬이 바뀜)되는 것이다. 체임되어도 놀라지 않으며, 벼슬을 잃고도 못내 아쉬워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존경할 것이다(官必有遞 遞而不驚 失而不戀 民斯敬之矣)’라고 하였다. 자리가 바뀌어 좋은 보직(어떤 게 진짜 좋은 자리인지 모르지만)을 받거나 한직을 받았다고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라는 것과, 설령 벼슬에서 물러난다고 하여도 아쉬워 말고 최후의 순간을 더욱 깨끗하게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을 종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벼슬을 버리기를 헌 신을 버리는 것처럼 하는 것이 예전의 도리였다. 해임되어서 슬퍼한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평소부터 문서를 정리하였다가 해임 발령이 있으면 그 이튿날 미련 없이 떠나갈 수 있다면 맑은 선비의 태도인 것이며, 장부를 청렴하고 명백하게 마감하여 뒷걱정이 없게 한다면 지혜 있는 선비의 행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즈음 우리 사회에선 임명직은 그 자리를 지키거나 보다 나은 자리로 옮겨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할 일이며, 선출직은 업무는 뒷전이고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단 몇 사람이 모인 곳이라도 쫓아다니는 게 일인 것 같다.

어떤 조직과 사회, 승속을 막론하고 사심 없이 맡은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정경 또한 목민심서의 이 구절 같았으면 좋겠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교외까지 전송을 나와 술을 권하고 보내기를 어린애가 어머니를 잃은 것 같은 심정이 말에 드러난다면 수령된 자 또한 인간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영광일 것이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사회와 인심이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의 처신은 예와 지금이 다를 바 아닐 것인데 작금의 현실은 물러난 뒤를 걱정하고 연연해하는 것 같아 딱해 보인다. 그간에 얽히고 설킨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든지 아니면 차라리 가만히 두면 오히려 나을텐데 자꾸만 업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지. 글쎄 중생인 나의 삶도 업을 짓고 있는 건지 업장을 조금이라도 소멸시키며 살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