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과 비방

시골 마을 사람들이 방 안에 모여 어떤 사람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기는 하지. 그런데 두 가지의 결점이 있어. 그것만 고친다면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맞는 말이야. 정말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너무 화를 잘 내는 게 그 사람의 커다란 결점이지.”
“또 하나의 결점이란 성질이 급하다보니 너무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야. 이 두 가지만 고치면 그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동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얘기 속의 주인공이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말한 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런 나쁜 사람 같으니! 자네 지금 나더러 뭐라고 했는가, 왜 함부로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건가, 엉?”
분을 참지 못한 그 사람은 주먹으로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왜 이리도 흥분하는 겐가! 참게나!”
“뭐? 내가 화를 잘 내고 경솔한 사람이라고? 이런 못된 사람 같으니!”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뜯어말리면서 말했다.
“여보게, 지금 자네 행동이야말로 경솔한 게 아니고 뭔가. 화를 내면서 사람을 때리기까지 하지 않는가? 자네의 허물은 바로 이것이네.”

<백유경>에 나오는 우화이다.
누구든 남이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우선 불쾌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달리 생각하면, 자신의 허물을 얘기해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뒤돌아보고 상대방이 지적한 잘못에 대해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며, 그처럼 남을 비난하는 사람 역시 더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인 것이다.
자비사 신도 중에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항상 드러나지 않게 내 일을 묵묵히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그분이 내게 오시더니, “스님, 하시는 일이 정말 힘드시겠습니다!”라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는 것이었다.
“…?”
“일전에 제 사위가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장모님, 스님을 뭣하러 도우십니까. 그 사람 남을 돕는 척하며 자기 재산만 축재하는 사람이예요.’라고요. 전 가까이에서 스님이 하시는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남들에게서 칭찬은 못들을망정 이처럼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들마저 있으니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분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사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바꾸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란 모두 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자이신 예수님도 유다의 배신으로 은 열 냥에 팔려갔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도 사촌인 조달로부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지요. 위대한 성자들도 이렇듯 세인의 오해와 시달림 속에 세상을 살다 가셨거늘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야 그런 비난쯤 받는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또 한 번은 모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프로듀서가 내게 오더니, “어떤 스님이 오셨었는데 스님에 대해 심한 비난을 하시더군요. 일부러 찾아와 그렇게 심하게 험담을 하고 가다니…. 저도 불쾌해서 혼났습니다.”라며 내게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말했다.
“허허, 그 사람이 내 허물을 아직 다 모르는 모양이군요. 나는 그 사람이 말한 허물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약점과 허물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애써 찾아와 지적을 해주시니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그렇다. 사실 나는 허물이 많으며 약점 또한 많은 사람이다. 허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반성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요, 앞으로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살다보면 남들에게 칭찬보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상대방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다 내 허물이니 어쩌겠는가. 그럴수록 내 자신을 한번 더 뒤돌아보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음이 된다.
나는 무엇이든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러다보니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일도 있고 때론 이처럼 본의 아닌 오해를 받게 된다.

육조 혜능 대사는, ‘지나간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허물을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으면 진정 참다운 불자라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수행자로서 허물이 많다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잘못된 점은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혹 사람들 중에는 남의 허물을 들춰내 비난할 뿐만 아니라 재미삼아 중상하거나 모략하는 이들이 있다.
아이가 장난삼아 무심히 돌팔매질을 한다 치자. 이럴 경우 돌을 던지는 아이야 재미로 한다 하겠지만 지나가던 개구리가 그 돌에 맞아 죽는다면 어찌될 것인가. 남을 중상한다는 것은 돌을 던져 무고한 개구리를 죽게 만드는 아이의 행동과 다름이 없다. 때론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을 헐뜯는 것은 살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즉 험담을 하는 사람과, 그 험담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또 그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을 중상하는 것은 흉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더 죄가 크다. 흉기는 상대방의 가까이가 아니면 해치지 못하지만, 중상은 멀리서도 사람을 해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이 붙은 장작은 물을 끼얹으면 속까지 꺼져 식게 되나 중상을 받아 화난 사람의 마음 속은 끄지 못한다. 마음이 선량하더라도 입이 험한 사람은, 마치 훌륭한 궁전 앞에서 악취를 풍기는 제혁공장과 같다. 사람에게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가 있는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남의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험담을 듣게 될 때는 급히 귀를 틀어막아라.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 사람도 역시 입으로 걸려든다.

이처럼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큰 악을 초래한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이로 인해 다치게 되니 이보다 더 무서운 흉기가 어디 있겠는가.
본래, 흐르는 탁한 물에는 형상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고여 있는 잔잔한 맑은 물만이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준다. 오래도록 앉아서 맑은 물 속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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