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사의 선행

부산에서 택시 영업을 하는 이순철 씨는 보통 오전 8시부터 주로 시내를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일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동안 2만8천 원이나 되는 평균 이상의 수입이 생겼다.

이씨는 기분이 좋은 상태로 충무동에서 시청 쪽으로 내려온던 중, 앞의 차들이 어느 손님 앞에 멈추어 섰다가는 가고, 다른 차들도 마찬가지로 다시 멈추어 섰다가는 도망치듯 황급히 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와그라지? 아마도 저 손님이 가는 방향과 맞지 않아 저러는 갑다.

보통 운전기사들에게는 자기 구역이라는 것이 있는데, 되도록 그 코스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게 보통이다. 코스가 맞지 않아도 우선 손님을 태워드리는 것이 운전하는 기사의 도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그는 그 손님 앞쪽으로 가서 차를 댔다. 순간, 세상에! 저런 거지가 아직도 있난 싶을 정도로 몰골이 형편없이 초라한 행색의 웬 남자가 태백으로 차를 태워다 달라고 하며 서 있는 것이다.

“태백이라면…, 강원도 태백 말입니꺼?”

이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부산에서 태백가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4,5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이다. 예서 그곳까지 가서 다시 돌아온다면 꼬박 하루가 걸릴지도 모르는 장거리. 저 사람은 왜 굳이 그 먼 거리를 가려는 것일까? 혹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았다.

“타십시오.”

이 씨는 일단 그를 태우고 번잡한 도심을 빠져나가서 시청 근처 파출소 앞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한적한 곳에 차를 탰다. 가까이서 보니 그 남자의 행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더기가 다 된 옷은 몇 달이나 빨아 입지 않아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한쪽 눈마저 성하지 않은 듯 피고름이 흐르다 저절로 엉겨 붙은 채로 아무렇게나 붕대로 감겨 잇는 모습니라니… 아무리 벌어먹고 사는 거지라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상거지 차림이 아닌가!

이 씨는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에서 거기가지 가려면 수백 리가 넘는 거리인데, 무슨 연고가 있길래 와 그 먼 곳엘 가려고 하시는 겁니꺼?”

그러자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더듬거리면서 그 남자는, “태백에 내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고… 누이도 거기서 삽니다. 기사님, 나를 제발 그리로…, 데려다 주시오…, 부탁입니다.”

애원하면서 그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집어 전화번호를 적더니 이 씨 손에 건네주는 것이다.

전화 부스로 가서 그가 적은 대로 번호를 돌리니 분명 신호음은 가는데 사람이 없는지 받지 않았다. 이 씨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 차 안에는 오전에 번 돈 2만8천 원이 있는데 그 돈을 주면 버스라도 타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버스라도 그렇지 누가 저 냄새나고 더러운 거지를 선선히 태워 줄 것인가! 저 사람이 어떤 연유로 이 같은 상황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저토록 간절하게 원하니 요금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도와주자. 내가 부자는 아니어도 하루 못 번다고 굶어죽진 않으니 오늘 하루 저 불쌍한 거지에게 봉사한 셈만 치면 되는 게 아닌가?
이 씨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사정 이야기를 한 다음, 내 오늘 하루는 벌이가 없으니 그렇게 알라.라고 당부했다.

이 씨의 아내는 남편의 심중을 헤아릴 줄 아는 여자였다.

“당신 좋으신 대로 하시야제. 여보, 그런데 그 먼 곳까지 가시다가 당신 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실 겁니꺼? 모쪼록 조심해서 다녀오시소.”라며 남편의 안부만 걱정할 뿐이었다.

하긴, 이 씨의 차는 5년이 다 된 낡은 차인데 이제 영업용차로서의 수명이 다해가는 참이었다. 장거리 길을 떠나려고 하니 아닌게 아니라 아내의 말대로 차가 도중에 덜컥 서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오다가 고장 나면 고물상에 버리고 오면 될 게 아닌가.

결국 이 씨는 그를 태우고 태백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태백이 고향인 그는 서울에서 자그마한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고 했다. 결혼해서 아내가 있고 국민학교에 다니는 귀여운 딸도 하나 둔 유복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절친한 친구를 믿고 보증을 선 게 그만 잘못돼 사업이 부도가 나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고 보니 믿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집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결국 견디다 못해 무작정 부산에 내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참담해진 심정으로 거리를 거닐던 중 마침 선원 모집광고가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 그래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배를 타게 됐는데, 이건 말이 선원이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먹고 학대하는 소위 멍텅구리라는 고깃배였다는 것이다.

“그라면 와 빨리 그만두고 빠져나오지 않으셨습니꺼?”

“배 안에 있는 동안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밤낮 밥 대신 술만 주고… 배를 채워야 하니 죽겠습디다. 이러다가 내가 평생 배 안에 갇혀 죽겠다 싶은 생각에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이젠 아예 선창에 가두고 꼼짝 못하도록 감시하는데… 이건 마치 짐승 다루듯 하는 겁니다. 다행히 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넉 달만에야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길이지요.”

그는 서울에 있는 아내가 그립고 자식도 보고싶지만, 우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뵙고 싶다고 말했다.

“넉 달 간 죽을 고생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잘못했던 모든 것들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살아있는 한 다시 열심히, 착하게 살고 싶습니다.”

포항에 다다르자 점심때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뭔가 요기라도 할 양으로 근처 기사식당에 들어갔다. 식당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일제히 거지 행색의 기이한 남자와 기사 정복을 입은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씨는 따뜻한 국과 밥을 시켜 권했다. 그런데 그는 자꾸 냉수만 찾으면서 밥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동안 배에서 술로만 살아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던 것이다.

커피를 사주고 담배를 맛나게 피운 두 사람은 다시 긴 여정에 올랐다. 포항에서 푸르른 동행안을 끼고 태백으로 오르는 길은 참으로 즐거운 여행이었다.

여느때처럼 손님에게 요금을 바라고 가는 게 아니라 좋을 일은 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이처럼 즐겁게 만드는 건가 싶었다.

“난 58년생이라예. 형씨는 몇 년 생 이시오?”

이씨가 묻자 자신은 60년 생이라고 대답하면서, “제가 두 살 적군요. 이렇게 큰 인연으로 만나 저에게 도움을 주셨으니 이 은혜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지… 앞으론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는 깍듯한 말투로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어느덧 해가 차츰 서쪽 산자락으로 기울고 있는 오후 5시. 하늘 아래 첫동네에 잘 오셨습니다.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 정선 아리랑처럼 구절양장 구비구비진 산비탈이 이어지고, 게다가 심한 안개로 길은 아슬아슬하고…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자 그는 손 끝으로 자신이 살던 고향집을 가리켰다.

집에 들어서자 맨발로 뛰어나오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 몇 달 간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내 아들 살아 돌아왔노라고 자꾸자꾸 눈물을 쏟으며 우는 어머니…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참 좋은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이 씨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의 부모님은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면서, “저녁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너무 늦은 시작입니다. 돌아가는 길이 멀고 험해 기사님을 붙잡지 못하겠습니다. 부다 조심히 살펴가십시오.” 하며 찐 계란과 먹을 것을 잔뜩 싸주면서 20만 원을 건네주는 것이다. 만 원짜리로 스무 장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동해안 쪽빛 바다와 좋은 경치를 감상해가며 모처럼 즐거운 여행을 하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씨는 충분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돈까지 받은 셈이었다.

기사의 말을 다 듣고 난 나는 진심으로 그를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왔다.

“남들이 하기 어려운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악한 일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만 저지르기 쉽고, 착한 일은 자신에게 평안을 가져오지만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누구나 그와 같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선행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스님,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가는 것으로 만족해 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도 느낀 바가 많아 봉사단체에 가입했습니다. 남에게 좋은 일은 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마음이 행복한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은 저도 남을 도우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과 행복감에 차 있었다.

그렇다. 문제에 얽매여 수많은 경전을 읽고 팔만사천 법문을 낱낱이 외운들 무엇하리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한 가지 선행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십주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행동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작은 실천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하나씩 쌓여가면 나중에는 큰 공덕이 이루어지게 된다. 어렵고 가엾은 이를 도와주는 또 다른 이순철 씨가 자꾸자꾸 생겨날 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좀 더 건강하고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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