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연(淡然)한 한 물건

인생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 모든 사람들의 화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고인 가운데 나옹 스님의 누님이 있었다. 동생에게 염불을 배우고 난 후 스스로 한 글귀의 시를 읊으니 다음과 같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갈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구름이 일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같네
뜬구름은 자체가 실이 없나니 생사 거래도 모두 이와 같도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참으로 명시다. 나는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한 그 가운데 생사없는 도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를 읽고 잘되었다, 못되었다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들어 있는 문제 하나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생사를 따르지 않는 담연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자는 뜬구름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지 않으리라. 만나고 헤어짐을 기약하지 않으리라.

기약이 없는 세계에 나아가려면 바로 그것을 보라. 그것을 보는 자가 곧 부처님이니라. 그러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저 담연한 일물을 생각하는 그 놈을 바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본다고 보아질 수 있는 물건인가? 아니다, 아니다. 보려고 애쓰면 도리어 보는 마음이 구름이 되니 그 마음까지 마저 비어 허공과 같이 하면 저절로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 이렇게 이르고 있다. 만일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저 하면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 같이 하라 멀리 망상과 모든 취(趣)를 여의면 마음 가는 곳에 걸림이 없으리라.

망상이란 속으로 온갖 분별과 시비를 일으키는 것이고 모든 취는 겉으로 받아들이는 온갖 세계의 일들을 반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는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백치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들어도 들은 바 없고 보아도 본 바 없는 가운데서 자기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충실하되 보는 놈, 듣는 놈, 먹는 놈, 입는 놈, 그 놈을 똑똑히 보면 그대로 여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였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한번 내가 붙이는 시 한 수를 들어 보라.

이 정각(正覺)의 성품은
위로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아래로 6범(六凡)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당당하게 뚜렷뚜렷히 구족(俱足)하여 티끌마다 다 통하고
물물(物物) 위에 나타나 닦을 것 없이 성취되어 요요명명(了了明明)하다.

언제나 깨달아 있는 우리 본래의 마음이 어느 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설파한 시다. 부처님이라 하여 더하고 중생이라 하여 덜한 것이 아니라 지옥·아귀·축생·인·천·수라 등 6범이 똑같이 낱낱이 당당하게 구족하고 있고, 티끌·돌맹이·나무 하나하나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니 그대로 보면 그만이지 구태여 닦고, 익히고, 이루고, 증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요명명이란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이 부처다.

자, 그렇다면 이 부처를 보라(숭산 스님이 주장자를 들며 말하셨다).

보았느냐? (주장자를 내리치시고 또 물으신다)

들었느냐?

이미 분명하게 보고, 이미 또렷하게 들었으면, 결국 이게 무엇인가?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하여도 30방망이 맞을 것이고 다르다고 하여도 30방망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

3×3 = 9이니라.

들은 것도 분별이고 보는 것도 분별이기 때문이다. 같다고 하는 것도 분별이고 다르다고 하는 것도 분별이다.

같다, 다르다 하면 3×3 = 9가 되지 않는다. 보고 듣는 것에 팔리는 사람은 불교는커녕 속법도 제대로 얻기 어렵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그대도 이렇게 가고 나도 또한 이렇게 갈 것이니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고 누가 길이 견고(堅固)한 자이냐 그대들은 아는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고 오는 데 속지 않을 것이다. (스님은 주장자를 한 번 친 후 말씀하셨다)
여삼세제불 일시성불공

십류군생 동일열반삼세
모든 부처님들이 일시에 성불하고
십류군생이 한날 열반에 들었다는 말이다.

삼세제불이 일시에 성불하였다는 말은 그대가 성불하면 삼세제불이 언제나 성불 속에 살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도 되지만 이미 시간 이전에 그들은 성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시간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옥·아귀·축생·인·천·수라·성문·연각·보살·부처의 십류군생이 함께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개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증과는 열반인데 제불이 일시성불하면 군생이 동일열반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거든 다음 글귀에 눈을 붙여 보라.

눈 가진 돌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말없는 동자가 답답해 한다.
얼마나 답답하면 돌사람이 눈물을 흘릴고.

崇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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