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를 하는데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奮心), 대의심(大疑心)이 그것인데 이것은 마음 공부라는 삼각형의 세 변과 같다.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형은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심, 즉 큰 믿음이란 처한 조건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큰 서원을 세워 노력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이다.
모든 에너지를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심지어 다음 생 또 다음 생까지 멈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마치 어미 닭이 알을 품듯이.
어미 닭이 알을 품을 때는 결코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알을 따뜻하게 해서 병아리로 부화시켜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적인 생각뿐이다. 물론 가끔 품는 위치를 바꾸기도 하지만 결코 알이 차갑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만약 어미 닭이 ‘좀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혹은 ‘남자 친구 닭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열심히 알을 품지 않거나 아예 알을 내버려 둔다면 결코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미 닭은 움직이지 않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견해, 조건, 상황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오직 한 방향으로 몰두하는 마음을 큰 믿음이라 한다.
대분심이란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력할 때와 비교할 수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를 본 적이 있는가. 쥐구멍 밖으로 몸을 기대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후 용수철을 늘린 것처럼 뒷다리를 빼고 앉아 쥐가 튀어나오면 언제라도 움켜쥘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쥐구멍에 집중해 있다. 온 마음이 한 점에 맞춰져 바깥의 조건이 어떠하든 똑같은 자세로 몰두하는 것이다.
쥐가 ‘이 정도면 됐어. 저 멍청한 고양이는 지금쯤 갔겠지.’ 하고 바깥 냄새를 맡기 위해 머리를 내미는 순간 고양이는 쥐를 낚아채는 것이다.
이것이 고양이의 마음이다. 고양이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집중을 한다. 외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맞춰진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 고양이를 하늘로 던졌다가 떨어뜨리면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네 발톱을 탁 세워서 안전하게 앉는다.
사람이라면 아마 팔다리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고양이는 하늘에 던져져서도 초점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고양이의 큰 용기이다.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양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마음은 어떠한 바깥조건의 변화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 충청도 마곡사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절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모든 생필품에 책임을 져야 하는 아주 막중한 일이었다.
한 번은 절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 준비가 큰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두부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우리는 며칠씩 걸려 두부를 만들어 물 속에 넣어두었다. 마곡사에는 창고에 큰 나무통이 있었는데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부를 보관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창고에 들어가 나무통을 보니 두부가 두 덩이나 없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또 두 덩이가 없어졌다. 그 이후로 매일 두부가 한두 덩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고 문은 항상 큰 자물쇠로 잠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이 일이 알려지자 서로 의심하는 바람에 절 분위기까지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매일 두부가 많지도 않은 딱 한두 덩이만 없어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부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다 들고 갔으면 될 터인데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에 아마 나쁜 귀신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며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내가 꾀를 하나 냈다. 창고에 앉아 밤을 새우며 도둑을 잡기로 한 것이다. 나무통 뒤 기둥에 숨 죽이고 앉아 있었다.
‘누구 소행인지 꼭 밝혀내고 말리라.’ 한 시간이 지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가고 세 시간이 지났다. 지루하기도 하고 졸음도 쏟아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윽고 새벽이나 됐을까. 이상한 소리가 창고 나무통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옳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나는 숨죽이며 그림자의 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사람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였던 것이다. 고양이는 숨을 죽이고 나무통 가장자리에 앉아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머리는 낮게 숙이고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물 속만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있던 두부 한 덩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고양이가 물 밖에서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더니 입으로 가져가서는 아주 맛있게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창고를 빠져 나갔다.고양이는 창고의 나무틀에 난 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두부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에너지를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물 속에 있는 두부가 떠오를 정도로 온 에너지를 집중시킨 것이다. 고양이의 의식은 오직 한 점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가 이러할진대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무한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것이 고양이의 대분심이다.
이런 고양이의 마음 상태만 같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우리 수행은 이와 같아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흔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어느 시점엔가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엄청나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대의심, 즉 큰 의심이란 한 가지에 집중해 있는 마음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은 쉬울지 몰라도 오랫동안 한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장에 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먹어라.”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는 온갖 생각과 걱정들로 뒤죽박죽이 된다.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모든 의식의 에너지는 ‘어머니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집중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강하다면 균형을 잃어 문제가 생긴다.
큰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믿음과 의심은 약해질 것이고, 오직 에너지만 모아질 뿐이다.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오직 모를 뿐’ 의 다른 이름이다.
긴장을 풀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순간순간 함께 기능한다. 참선한다는 것은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를 운전할 때 어깨가 움츠려져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변화하는 환경에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가 없다. 긴장을 늦추라고 해서 운전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은 아니다.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초록색 불이 켜지면 가면 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본성을 발견해서 중생을 돕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하면 큰 믿음이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서원이라 한다.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하면 큰 용기가 큰 에너지가 된다.
그러면 어느 날 큰 의문이 풀려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 거듭 우리 자신에세 물어보자.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崇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