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허실(虛實)을 알고자 하면서, 어찌하여 정토문(淨土文)과 서귀직지(西歸直指:서방정토로 돌아가는 길을 곧장 가리킴)에서 논하고 있는 이치와 거기에 수록된 사례를 의심없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오? 이러한 논설과 사례들이 모두 날조한 헛소문이기 때문에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고 내팽개칠 참이오?
이러한 견해를 지닌다면, 그 영혼은 틀림없이 다른 오도(五道)에도 떨어지지 못하고 오직 아비(阿鼻:無間) 지옥에 갇힐 것이오. 거기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자기 마음따라 나타나는 펄펄 끓는 용광로나 검수도산(劍樹刀山) 같은 지옥의 경지에서 온갖 즐거움을 자유자재로이 즐기게 될 것이오. 그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소.
부처가 정말 존재하는지 허실을 반드시 알고자 하면서, 정토문이나 서귀직지에서 말하는 내용은 모두 진실이 아니고, 오직 자기가 몸소 보고 경험해야만 진실이라고 고집한단 말이오? 여기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 물어 볼테니 어물쩡하게 넘기거나 피하려 들지 말고 솔직한 마음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오.
북통주왕(北通州王)인 철산(鐵珊)이란 사람은 청나라 말엽에 광서성(廣西省)의 번대(藩臺:布政使의 별칭, 성(省)의 두세 번째 실권자)를 지냈다오. 그 당시 광서지역에는 토착 무장도적들이 몹시 많았는데, 그가 군대치안을 담당할 때 그들을 섬멸하려고 계획 세워 살해한 자가 아주 많았다오. 그런데 4년 전 중병에 걸려 눈만 붙였다하면 몹시 크고도 시커먼 집안에서 자신이 수없이 많은 귀신들에게 사방에서 핍박 당하는 모습이 너무도 뚜렷이 보여 깜짝 놀라 깨어나곤 했다오. 한참 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다시 똑같은 장면이 나타나 또 섬짓 놀라 깨어나기를 되풀이하여, 사흘 밤낮 동안 꼬박 두 눈을 뜬 채로 지새워 그저 숨결만 겨우 이어지는 정도였다오.
그래서 그 아내가 보다 못해, “당신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겠소? 당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한번 염송해 보시오. 염불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것이오.”라고 권했다오.
철산은 아내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죽어라고 염불했는데, 얼마 안 되어 이내 잠들어 한바탕 실컷 자고 나도록 어떠한 모습이나 경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요. 병도 점차 다 나아서, 그때부터 계속 재계(齋戒)하며 염불하고 있다오. 이는 철산이 재작년 진석주(陳錫周)와 함께 산에 올라와 나에게 직접 털어 놓은 이야기요.
가령 그대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부처의 존재 유무를 확인해 안 다음 염불하겠소, 아니면 한번 듣는 대로 곧장 염불하겠소? 만약 이 때 부처의 허실을 따져볼 겨를 없이 즉시 염불한다면, 지금은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준 부처(念佛·淨土)의 허실에 관한 언론과 사례들을 모두 허황된 거짓말로 치부한단 말이오? 오직 급박한 구원이 필요한 정신없는 상황에서만 눈물을 흘리며 구하고 싶소? 부귀공명도 한낱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거늘, 어찌하며 편협한 집착은 헌신짝으로 여겨 아주 말끔히 내버릴 수 없단 말이오? 그대는 혹시라도 이러한 지식견해가 도에 들어가는 문인 줄만 알고,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고속도로인 줄은 모르오?
꿈으로 부처를 비유하는 경우에는 허망한 마음이 원인이고 꿈속의 경계가 결과지요. 마찬가지로 염불이 원인이 되고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함이 결과로 얻어진다오. 어떻게 금강경의 여섯 가지 비유(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갯불 같다고 설법한 비유게송을 가리킴)로 증명할 수 있겠소?
무릇 세간의 말과 글자는 비록 한 단어라 한 가지 일이라도 높고 낮음[尊卑]이나 아름답고 추함[美惡] 등 상반되는 두 뜻으로 동시에 해석될 수 있소. 예컨대 아들 자(子) 한 글자만 보아도, 부자(夫子:공자에 대한 존칭에서 스승님을 뜻함)라 부를 때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고, 보통사람들을 가리키는 접미사로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며, 아이(兒子)를 부를 때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오. 그래서 반드시 문맥에 따라 정의해야 하며, 부자(夫子)라고 부르는 곳에서 결코 아이(兒子)라고 새길 수는 없소.
불국토가 꿈속의 경지라는 견해는 모름지기 우리들이 부처가 되기를 기다려서 그 뒤에나 말해야 할 줄 아오. 지금 이 순간 곧장 지껄이는 것은 오직 손해만 가져올 뿐 결코 이익이 되지 않으리이다.
사실과 이치, 성품과 형상, 텅빔과 있음, 원인과 결과 등의 상대개념은 서로 뒤섞여 잘 구분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다만 평범하고 어리숙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착실하게 염불하는 수행이나 배워 오직 간절하게 정성과 공경을 다할 일이오.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염불하다 보면, 죄업이 소멸되고 지혜가 밝아지며 업장이 다 사라지면서 복덕이 저절로 높아질 것이오.
이러한 의심이 철저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부처의 존재 여부나 자신의 유무, 불법에 들어가는 문과 피안에 이르는 확실한 근거 따위도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이 저절로 밝아지오. 그러나 만약 마음과 뜻을 다해 염불에 전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 기울여 알아보려고 할 것이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보여 주어도 참모습[實相]을 알지 못하고, 정토문이나 서귀직지를 보고도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오. 업장이 마음을 뒤덮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오.
이는 마치 장님이 해를 쳐다보는 것과 같소. 해가 분명히 하늘에 떠 있고 정말 눈으로 쳐다보고는 있지만, 햇빛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예 쳐다보지 않을 때와 다름이 전혀 없소. 가령 장님이 광명(시력)을 회복한다면 단번에 햇빛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염불 법문이야말로 바로 광명(지혜, 마음 또는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최고 최상의 첩경이라오. 참모습(實相)의 형상을 보려거든 마땅히 이 법문 수행에 정성을 다해야 하오. 그러면 틀림없이 통쾌하게 소원을 이루고 회포를 푸는 때가 있으리다. 참나[眞我]를 몸소 보는[親見] 일은 확철대오하지 않으면 안 되오. 더구나 참나를 증득하려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리고 원만히 증득하려면 세 미혹을 완전히 끊고 두 죽음을 영원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되오.
우리들이 영겁토록 윤회하고 또 지금 이치에 어긋나게 시비나 따지는 것도 모두 참나의 힘을 받아 행하는 것이오.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 힘을 진실하게 받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오. 비유하자면 호주머니 속의 보배구슬을 애시당초 잃어 버린 적이 없는데 있는 줄을 깜박 잊고 공연히 생고생 사서 하는 것과 같소.
세간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중생들의 생겼다 사라지는 마음[生滅心]으로부터 비롯되오. 육신 같으면 개인의 개별 업장[別業]으로 타고 나고, 세계 같으면 모든 구성원의 공동업장[同業]으로부터 형성되오. 이들은 모두 생겨났다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오. 육신은 생로병사가 있고,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지요. “만물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돌이키다[物極必反]”는 말이나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樂極生悲]”는 말이 바로 그러한 뜻이오. 원인 자체가 벌써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또한 생겨났다 사라지지 않을 수 없소.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자기 마음이 본디 지니고 있는 불성을 철저히 증득하여 마음에 따라 나투어 낸 불가사의한 장엄세계라오. 그래서 그 즐거움이 다할 때가 없소. 비유하자면 허공이 끝없이 넓고 크게 펼쳐져 삼라만상을 포용하고 있는데, 세계가 제 아무리 수 없이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기를 계속 되풀이 하더라도 허공은 끝내 조금도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소.
사람들이 흔히 세간의 쾌락을 가지고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우습게 알고 비난하지만, 과연 극락의 즐거움을 맛볼 수나 있는 처지요? 우리가 비록 허공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도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천지간의 허공만이라도 바뀌거나 변하는 모습을 누가 본 적이 있겠소?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에게 염불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오. 아미타불의 대자대비 서원력에 의지하여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말이오. 거기서 몸은 연꽃 봉오리 안에 자연스레 생겨나[蓮華化生]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르고 세계는 아미타불 성품에 걸맞는 공덕으로 이루어져 성주괴공의 변화가 없다오. 성인조차도 그 경지를 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범부 중생이 생겼다 사라지는 세간의 법으로 이를 의심하고 비방한단 말이오?
정토법문은 여래께서 철저한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하시는 법문이오. 미혹을 끊을 힘이 없는 범부 중생들에게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여 금생에 생사를 해탈하고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불도 수행의 반려자가 되도록 가르치신 것이오. 위로 부처의 과위에 바로 이웃한 등각(等覺) 보살 조차 극락 왕생하여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룬다오. 그래서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총망라하여 가장 빨리 수행을 성취하는 지극히 원만한 법문이고, 여래께서 평생 설한 모든 법문을 초월하는 특별 법문이오.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설할 때에 동서남북 상하 육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동시에 넓고 긴 혀[廣長舌]를 드러내어 한 목소리로 찬탄하며 “불가사의한 공덕을 지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보호 염려[護念]하는 경전”이라고 일컫고, 우리 석가 세존께서 몹시 어렵고 드문 일을 하고 있다고 칭송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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