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믿음을 일으키고 의심을 제거하라

보통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온갖 시비논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마디로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지식 견해로 부처님의 지혜를 추측하는 망상(妄想)일 따름이라고 하겠소.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으로는 몸과 마음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물(事物) 경계(境界)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왜 그러한지 이유를 알 수 있으리오?

경험 지식이 쌓이면서부터 앞 사람들이 행하는 바를 보고 자기 또한 따라 행하여 몸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유자재로이 활동하면서 그 이익을 받아 쓰는 것이리다. 그런데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처가 부처인 까닭과 정토가 존재하고 설법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부처님과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을 믿으려고도 않는구료.

예컨대 우리가 하루종일 밥먹어 굶주림을 채우고 옷입어 추위를 막는 일상 생활의 근본 이유[所以然]를 알겠소? 모르겠소? 만약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들랑 아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끄집어 말해 보시오.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앞 사람들이 해온 대로 옷 입고 밥 먹는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생사해탈을 인도하는 최고 제일의 미묘법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먼저 안 다음에 믿음을 내겠으며,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간절하고 성실한 말씀만 듣고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고집하는 거요?

또 사람들이 병에 걸려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먼저 스스로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두루 뒤적여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직접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전을 쓰고 약을 지어 먹겠소? 아니면 곧장 훌륭한 의사를 초청하여 맥을 짚게 하고 그가 내린 처방에 따라 지어주는 약을 달여 먹겠소? 만약 곧장 의사 처방대로 약을 먹는다면, 질병 치료(생사 해탈을 위한)와 불교 수행이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오.

설령 자신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두루 펼쳐보고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는 수행과는 서로 다르게 되오. 왜냐하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 자체도 앞사람들이 경험지식을 쌓아 편찬한 말씀이므로 우리들이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이 아니거늘,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만약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부처님과 조사나 선지식들의 말씀은 어찌하여 모두 믿지 못하고 반드시 몸소 보고 확인한 다음에 믿겠다고 우긴단 말이오?

만약 이러한 지식견해대로 엄격히 진실을 따지자면, 마땅히 어떤 약이 어떤 경락(經絡)을 통하여 어떤 질병을 치유하는지를 먼저 보고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을 내리고 약을 복용하여야 하리다. 그리고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에 적힌 내용대로 처방을 내려 약을 복용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오. 왜냐하면 자신이 몸소 보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람들은 굶주림을 채우고 추위를 막으며 병을 치료하는 근본 원리를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누구나 밥 먹고 옷 입으며 약을 복용하고 있소. 그런데 부처가 되고 정토에 왕생하는 근본 원리만큼은 자신이 몸소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령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성실한 가르침 말씀을 죄다 믿지 않으려고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소?

이는 다른 게 아니라, 전자는 목숨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비록 모르더라도 감히 그대로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반면, 후자는 생명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므로 스스로 고명(高明)하다고 뻐기면서 반드시 그 법문을 철저히 보고 안 다음에 비로소 수행하겠다는 차이뿐이오. 옛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천재와 영웅호걸들이 이러한 지식 견해 때문에 평생토록 부처님 정법의 실익을 얻지 못한 줄 아시오?

그들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아낙이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앞 사람들이 하던 대로 따라 염불 수행을 믿고 받아들여 행하다 보니, 점차 부처님의 지혜와 은밀히 통하고 오묘한 도에 부지불식간에 합치하게 되고 마침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였다오. 그 가운데 더러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를 곧 증득하게 될 것이오.

반면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뻐기는 자들은 의심 때문에 비방까지 서슴치 않아 영겁토록 삼악도에 떨어지오. 그래서 그들이 어리숙하다고 비웃었던 평범한 지아비와 아낙들이 염불수행으로 극락왕생하여, 도리어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하여 구원해 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다오.

왜냐하면 전생에 믿지 않고 비방한 죄악의 업장이 그들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세간의 총명한 재주꾼들은 마치 막야(莫邪)와 같은 훌륭한 보검(寶劍)을 가지고 진흙 덩어리나 자르는 데 쓰듯 자신들의 고귀한 지혜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구려. 보검으로 진흙을 잘라 보았자 진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칼날만 손상될 것이 불보듯 뻔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부처님 법은 마음의 법으로, 세간의 어떠한 법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소. 부득이 비유를 쓰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의리(義:이치, 뜻)를 알아차리도록 전함이오. 그런데 어떻게 구체적 비유 사실에 집착하여 틀에 박힌 듯이 추상적인 본체를 논할 수 있단 말이오? 부채를 들어 달을 가리키면 반드시 부채 위의 광명을 쳐다 보고, 나뭇가지 흔들림으로 바람을 비유하면 나뭇가지 위의 공기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도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소?

꿈 속의 경계[夢境]는 가짜이고 인과(因果)는 진짜인데 꿈 속의 경계로 인과를 비유하여 본체와 서로 부합시키는 것도 상관 없소.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妄心]이 원인이고 꿈 속의 경계가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오. 만약 허망한 마음이 없다면 꿈 속의 경계도 결코 없을 것이오. 이는 만고불변의 확정된 이론이오. 선악이나 수행하는 마음 같은 사실은 원인이고, 선악과 수행의 과보를 얻는 것이 결과인 줄을 그대는 믿겠소, 못 믿겠소?

허망한 마음이 꿈의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꿈 속의 경계를 얻(보)듯이, 염을 하는 마음이 부처의 원인이 되어 가까이는 서방극락에 왕생하고 멀리는 결국 부처의 도를 원만히 성취하는 과보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대의 의심을 더욱 키우겠소, 아니면 그대의 믿음을 일으키겠소?

부처가 궁극의 존재인지 여부는 우선 접어두고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부처의 존재 여부 자체를 따지려고 하는 점부터 봅시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궁극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바로 그 판단은 과연 누가 말하고 기술하는 것이오? 또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기술하는 자[主體]를 한번 정확히 끄집어 내 보시오. 말[言語]이란 목구멍과 혀가 의식 및 마음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오. 글[文字]도 단지 손과 붓의 움직임을 통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오.

말과 글 이 두 가지는 모두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일 뿐, 어느 것도 우리들 자신은 결코 아니오. 이 다섯 가지 법을 떠나 뭔가 끄집어 낼 수 있다면, 부처가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정말 대지혜의 질문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존재 여부조차 딱히 끄집어 낼 수 없으면서 먼저 부처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겠다면, 이는 헛되고 쓸데없는 미치광이 질문일 뿐, 결코 자신에게 절실하거나 진리를 궁구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오.

부처가 궁극에 존재하는 사실은 우리들 범부 중생의 감정이 아직 깨끗이 세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볼 수 없는 것뿐이오. 우리들 자신도 또한 확실히 존재하고 있소. 다만 우리들의 오온이 아직 텅비지 못해서 색·수·상·행·식을 떠나서 그 뭔가를 정확히 끄집어 낼 수 없을 따름이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보리심(菩提心)을 낸 보살들에게 일체 중생(衆生)을 모두 제도하여 남김없는 열반(涅槃)을 증득(曾得)시키되, 어떤 한 중생도 결코 제도되어 열반을 얻었다고 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소. 또 빛[色]이나 소리[聲]·냄새[香]·맛[味]·만짐[觸]·생각[法]에 머물러(執着하여) 보시(布施)를 행하지는 말라고 일깨우고 있소.

보시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의 으뜸이오. 보시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만 가지 행실 모두가 빛이나 소리·냄새·맛·만짐·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 당연하오. 금강경의 문장이 간략하게 보시만 거론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시 안에 포함시킨 것이오. 요컨대 마땅히 머무르는(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고[應無所住 而生其心], 나나 사람이나 중생이나 수자(壽者)라는 모습(형상)이 전혀 없이 일체의 착한 법[善法]을 닦으라는 가르침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도(道)라는 것은 도대체 모습(형상)이 있겠소, 없겠소? 이처럼 광대무변한 광명의 모습이 우주 허공[太虛]을 꽉 채우고 있는데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타고난 장님과 무엇이 다르겠소?

<금강경(金剛經)>에서 한 중생도 제도 못한다거나,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거나, 나나 중생의 모습이 없다거나, 머무르는 바 없다고 말씀하신 전제는 사람들에게 범부의 감정이나 성인의 견해 같은 형상 집착에서 자유롭게 벗어나라는 뜻이오. 그리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남김없는 열반을 증득시키고, 보시를 행하고, 마음을 내고, 착한 법을 닦으라고 말씀하신 본론은 사람들에게 자기 성품에 알맞게 자신과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법을 익히고 닦아 자기와 남이 함께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길 기약하자고 권하신 것이오.

바로 여기에 착안하지 못하고 모습(형상) 없음[無相]이 궁극의 경지인 줄로 집착하는 과대망상은 마치 술지게미[酒糟]를 맛보고 최고라고 여기는 술꾼과 똑같은 지식 견해에 불과하오. 이런 자를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소?

믿음이 얼마나 일으키기 어렵고, 의심은 어찌도 이리 제거하기 어려운고?! 그대들 자신이 결정코 믿음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또 결코 의심을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면, 비록 부처님이 눈 앞에 나타나 친히 설법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오. 하물며 나 같은 범부중생이 자질구레한 말로 납득시킬 수 있겠소?

印光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