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임종(臨終)에 갖추어야 할 지혜로운 배와 노

부처님께서 입적한 승려를 화장하도록 규정하신 것은 본디 그로 하여금 산산히 부서질 가짜 형체를 떠나 진실하고 영원한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비(茶毗)의 규정을 세우신 이후 승려대중은 이를 항상적인 법도로 받들어 지켜왔소.

그러나 법과 도가 쇠퇴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겨나서, 지금 불자들은 경솔하게도 화장하는 일을 부처님의 법제에 따르지 않고 있소. 병든 이가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임종 때에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 입히고 몸을 움직여 감실(龕室:본래 탑 아래의 방, 불상을 모셔두는 석실인데 여기서는 시신을 안장하는 화장용 坐棺을 가리킴)에 하루 이틀 넣어 두었다가 화장을 하니, 정말로 부처님 법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소.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덟 가지 인식(八識)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곧 지식(知識:지각)이오. 앞의 다섯 인식[前五識]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이고 제6식은 의식[意:뜻]이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으로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고,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또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부르오.

무릇 사람이 생겨날 때는 제8식이 가장 먼저 오고 제7·6·5식이 차례로 뒤따라 온다오. 그리고 죽을 때는 이 제8식이 가장 뒤늦게 떠나고 나머지 인식은 역순으로 차례대로 떠나간다오. 무릇 제8식은 곧 사람의 영적 인식(靈識)으로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이라오.

그런데 이 제8식은 신령스러워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受胎)될 때에 맨 먼저 찾아온다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자리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라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8식이 떠나가오. 제8식이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끝만큼도 지각(知覺)이 없소.

그래서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만 있다면, 제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는 것이오. 이 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오. 만약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 때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려운데, 단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 뿐이라오.

불경을 찾아보면, 목숨[壽]과 따뜻한 기운[煖]과 인식[識] 세 가지는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소. 만약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오. 옛부터 죽었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많은데, 역대 기록을 찾아 보면 하나하나 상세히 확인할 수 있소.

유교에서도 죽은 뒤 사흘 만에 대렴(大殮: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덮어 못 박는 일)의 예법을 행하는데, 이는 가족들이 사모와 비애의 감정으로 만에 하나 혹시라도 살아나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을 배려하기 때문이오. 우리 불교의 승가에서는 비록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몹시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소. 부랴부랴 움직이고 옮기거나 변화시킨다면 자비심은 과연 어디에 있겠소?

옛말에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兎死狐悲)는 속담이 있소. 짐승 같은 미물도 비슷한 종류(처지)를 서글퍼함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고 더구나 같은 불자인 우리들이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란 게 고통이 극도에 이르면 성질을 내기 쉬운 법인데, 임종에 성질 내는 마음을 품으면 타락하기 가장 쉽소.

불경에 보면, 아기달왕(阿耆達王)이 불탑과 사원을 세워 그 공덕이 매우 크고 높았는데, 임종에 시중들던 신하가 부채를 들고 있다가 왕의 얼굴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이 고통스러워 성질을 낸 까닭에 죽어서 그만 뱀의 몸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소. 물론 생전의 커다란 공덕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사문(沙門:수행스님)을 만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법을 듣고 뱀의 몸을 벗어나 천상에 올라갔다고 하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죽은 이의 인식이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옷을 갈아 입히고 옮기거나 화장을 하면, 그로 하여금 고통스러워 성질을 내게 함으로써 더욱 타락하도록 조장하는 결과가 되겠소. 잔인한 마음으로 이치를 어기고 일부러 참혹한 독약을 베풀려는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내가 죽은 이와 무슨 원수를 지고 무슨 한이 있다고 선량한 마음으로 악한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지 정말로 잘 생각해야 하오.

만약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득한 일이라 증거를 댈 수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경전에 기록된 내용도 믿을 수 없단 말이오? 지금까지 불어난 각종 폐단은 결국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단지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려는 생각에서 몸의 따뜻한 기운이 식어감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러한 습관이 반복되어 일상처럼 되었기 때문에, 설령 이러한 이치를 언급하는 자가 있더라도 도리어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죽은 이의 고통은 더욱 펴지기가 어렵게 되었소.

오호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태어남과 죽음밖에 없도다. 태어남은 산 거북이의 등가죽(甲)을 벗기는 것과 같고, 죽음은 산 게를 끓는 물에 집어 넣는 것과 같다오.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 한꺼번에 번갈아 지지고 볶아댈 때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소?

바라건대, 환자를 보살피고 시중드는 모든 사람들은 세심하게 주의하고 신경쓰되, 특히 환자와 쓸데없이 한가한 잡담을 나누어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흩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오. 어수선하게 떠들어대거나 구슬픈 심기를 내색하지 말아야 하오. 오직 환자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한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도록 권해야 마땅하오.

또한 자신이 스스로 염불조력[助念]하여, 환자가 그 염불 소리를 듣고 마음 속으로 따라서 염송하도록 이끌어야 하오. 만약 재력이 넉넉하다면,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조를 짜서 번갈아 염불해 주도록 안배하여 염불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게 하면 더욱 좋겠소.

환자가 귓속에 늘 염불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도 부처님의 성호를 늘 염송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자비원력의 가피를 받아 극락왕생할 것이오.

만약 재력이 없다면 가족 모두 함께 마음을 내서 직접 염불조력함으로써 최후의 연분을 잘 매듭짓도록 하여야 하오. 사후에 처리할 일들일랑 행여라도 환자 앞에서 발설하여서는 절대 안 되오. 다만 목탁이나 방울치는 박자에 맞춰 큰 소리로 염불하여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환자 귓속에 들어가고 환자 마음이 늘 염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소리가 둔탁(鈍濁)한 목탁은 임종시 염불조력에 결코 써서는 안되오.

환자의 몸은 앉든지 눕든지 그의 자세에 자연스럽게 맡기고 절대로 움직이거나 옮기지 말며, 모두 염불에만 전심전력하며, 숨이 끊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정신의식(神識)이 완전히 떠나가기를 기다린 후, 다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바야흐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힐 수 있소. 만약 몸이 싸늘해져 딱딱하게 굳은 경우에는, 뜨거운 물로 씻기고 뜨거운 수건을 팔이나 무릎 관절에 덮어 씌우면 한참 지나 다시 부드러워진다오. 그 때 감실(龕室:坐棺) 안에 안치해도 늦지 않소.

할 일이 모두 끝나면 더욱이 계속 염불해야 하오. 독경이나 참회예불과 같은 다른 불공(佛功)은 그 어느 것도 염불만큼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오.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권속들이 한결같이 이에 따라 실행한다면 죽은 이나 산 사람 모두 큰 이익을 얻게 되리다.

그리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본래 오른쪽 옆구리를 땅바닥에 대고 누우셨기 때문에, 그 자태 그대로 관에 넣어 다비(茶毗:화장)하였소.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도 각기 자연스러운 자세에 따라서, 앉아서 입적한 사람은 감실에 안치하고 누워서 열반한 사람은 관에 안치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오랜 습관이 풍속으로 굳어져 아마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또한 각자 편리한 대로 행하도록 그 뜻에 맡기면 되오.

사람이 죽은 후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모습과 감응은 원래 사실상의 근거가 있소. 좋은 곳[善道]에 나는 사람은 몸의 열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나쁜 곳[惡道]에 떨어지는 사람은 열기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오. 온몸이 다 식은 뒤 마지막 열기가 정수리(頂)에 모이면 성도(聖道:극락세계)에 올라가고, 눈(眼)에 모이면 천상(天道)에 생겨나며, 심장(心)에 모이면 인간(人道)에 환생하고, 배(腹)에 이르면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지며, 무릎에 이르면 축생(畜生道)으로 태어나고, 발바닥에 몰리면 지옥(地獄道)에 떨어진다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의 임종징험게(臨終徵驗偈)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소.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생겨나고
사람은 심장에 아귀는
배에 모여든다.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나간다.

무릇 태어남과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중대한 일이오. 그래서 이 한 순간만큼은 가장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마땅히 한 몸과 같은 자비심(同體之悲心)으로 죽는 이가 극락왕생의 대업을 원만히 성취하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하오. 옛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소.

我見他人死
我心熱如火
不是熱他人
看看輪到我

내가 다른 사람 죽는 걸 보면
내 마음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네.
다른 사람 때문에 뜨거운 게 아니라
곧 내 차례가 돌아올 걸
생각해 보니….

인연(因緣)과 그에 대한 과보(果報)의 감응(感應)은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소. 그래서 스스로 이롭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남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하오. 이 글을 적어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노니, 모든 사람이 각자 주의하고 명심하여 실행하길 간절히 기원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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