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명선사(永明禪師)의 사료간(四料簡) 4

말법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중생의 근기는 형편없고 업장은 막중한데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매우 드무니, 만약 정토 염불을 저버린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되오.

영명 선사께서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며 특별히 사료간으로 후세인들을 일깨우고 계시니,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며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틀림없소.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쳐 버리고 깊이 궁리하거나 음미하지조차 않으니, 이는 중생들의 사악한 업장이 가로막는 탓이오.

정토 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 여래께서 원인 자리[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 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뜻)을 모두 추스리고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스려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리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릴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 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독경) 또한 마찬가지요.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데[寫經], 얼마나 일심(一心)으로 전념(專念)했던지 오직 베껴 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어두운 줄 모르고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베껴 쓰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날이 이렇게 어두컴컴해졌는데(불도 쓰지 않고) 어떻게 경전을 베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놀라 물었다오. 그러자 경전을 쓰던 사람은 그만 감정 생각이 생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소.

무릇 밝고 어둡다는 분별은 중생들의 허망한 견해[妄見]이자 속된 감정이오. 그래서 일심으로 전념할 때는 망상과 감정이 모두 텅비어 버려 오직 경전 베껴 쓰는 것만 알고 날이 어두워진 줄은 모른 게오. 또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거지요. 그러다가 남이 옆에서 끄집어 흔들면서 그만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감정생각이 갈라졌소.

망상이 움직이자 광명과 암흑이 즉각 판연히 구별되고 더 이상 경전을 쓸 수 없게 된 거라오. 그래서 수행공부의 길은 정말로 오롯하게 추스리는[專攝] 데에 있소. 감정생각이 일지 않아 무념무상하다면 어디에 사견(邪見)이 있겠소. 사견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지혜[正智]지요. [[옮긴이 보충해설 : 유가의 서경(書經)에는 요순(堯舜) 임금 때부터 전수되어 온 도맥(道脈)으로 알려진 16자 심법(心法)이 실려 있다. “사람 마음 오직 위태롭고 진리 마음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성스럽고 오직 일념으로 중용의 도를 진실되게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進一, 允執厥中).” 우리 속담에는 “정신이 한 군데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精神一到, 何事不成?)”라는 말이 있고, 중국에는 정성이 미치는 곳에는 쇠와 돌도 열린다(精誠所致, 金石爲開)는 속담도 있다. 모두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염불 경지와 같은 도의 본질속성이다.]]

그리고 정토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과응보를 크게 제창하여야겠소. 최상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야 본디 윤리강상(倫理綱常)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지요. 그러나 중하 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구체 사례도 뚜렷한 증거로 소개해 줄 필요가 있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행실을 경계시킬 수 있겠소? [[옮긴이 : 유형의 국가 정치에서 법령과 형벌을 제정하여 공포시행하는 이치도 이와 똑같으며, 무형의 종교 도덕상 인과응보 법칙과 서로 표리관계로 일체(一體)를 이룬다.]]

그래서 인과응보는 진리[道]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오. 사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독실하게 믿는 일도 결코 쉽지 않소. 소승의 초과(初果:수다원)와 대승의 초지(初地)에 이르러야 진실로 인과응보를 독실하게 믿을 수 있다오. 그 아래 중생들은 한번 마음에 거슬리는 인연을 만나면 살생이나 도적, 간음, 거짓말 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소. 미혹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악업이 뒤따라 지어질 위험이 크지요.

그런데 총명하고 글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마치 중하 근기의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나 알려 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 뜻만 대강 알아서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거니와, 설령 잘 안다고 할지라도 이를 몸소 실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오직 초과(初果)와 초지(初地)에 올라 성인(聖人)의 부류에 끼어야만 미래의 생사윤회를 받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빛·소리·냄새·맛·느낌·생각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독실한 믿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소.

그래서 몽동(夢東, 徹悟) 선사께서도 “심성(心性)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며, 인과를 깊이 믿는 사람은 마침내 반드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소.

세상에 염불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정말로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사람은 왜 그리 적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는 오직 염불하는 사람들이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거나, 내세에 부귀공명을 누릴 복덕의 과보만 구하기 때문이오. 내세의 부귀공명이란 게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과 같아서 추진력이 다하면 되돌아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요.

금생에 염불하는 사람이 내세의 인간이나 천상의 복록을 구한다면 그 복록으로 부귀공명을 얻겠지만 올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인과응보를 믿지 아니하겠지요.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부귀공명의 지위에 올라 앉으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죄악만 더욱 증대시키게 될 것이오. 그래서 복록이 클수록 죄악도 더욱 많이 지어 그로 말미암아 다음 생에 막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는 것이오.

그러므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복록을 보답받을 생각일랑 절대로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오. 오직 용맹스럽고 날카롭게 앞으로 곧장 나아가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만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미묘한 법문으로 믿어야 하오. 그래서 철오(徹悟:夢東) 선사께서 일찍이 “정말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고 가르치셨소.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요, 종지(宗旨)요.

또 “아미타불 한 구절은 우리 부처님 마음의 요체이니, 세로로는 다섯 시기[五時:부처님의 다섯 설법 시기인데, 보통 천태종에서 화엄·녹야원(소승 아함경)·방등(方等:유마경·승만경 등 대승경전)·반야·법화 열반으로 나누는 견해가 대표적이다]를 관통하고, 가로로는 여덟 가르침(八敎:三藏敎·通敎·別敎·圓敎의 네 化法과 頓敎·漸敎·秘密敎·不定敎의 네 化儀를 합쳐 부르는 천태종의 개념)을 포괄하네[一句彌陀, 我佛心要, 竪徹五時, 橫該八敎]”라고 찬탄하셨소.

정말로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하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그 궁극 경지를 알 수 있으며,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등각(等覺) 보살조차 다 알지 못하는 게 있다오. 그래서 보살도 조금밖에 모른다[菩薩少分知]고 말하는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야 더욱 더 믿고 실행해 나갈 일이오.

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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