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천송반야경 03. 집착함이 없는 마음

03. 집착함이 없는 마음

그때 수보리 장로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보살의 경지라고 하는 것을 얻은 바도 없고, 마음에 둔 바도 없습니다. 이러한 제가 어떤 보살에게 무슨 반야바라밀을 가르쳐 볼일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보살의 경지라고 하는 것이 어느 곳에서 일어나, 어느 곳으로 소멸해 가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보살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설한다면, 저는 이 일로 인하여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 같사옵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거기에 마음을 집착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보살이 이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고, 마음에 걸리지도 않는다면, 그 보살은 이미 ‘뒤로 물러섬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 있는 분으로서,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그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둔다면, 보살은 그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마음속에 관념을 만들어 내고, 또, 그 관념 위에 서서 불도를 실천한다면, 그 사람은 반야바라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몸에 젖게 할 수 없습니다. 또 반야바라밀을 원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원만하게 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 작용하는 장(場)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포착할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포착할 수 없다면, 거기에는 그 어떠한 것도 실체를 가지고 존재해 있지 않습니다.

반야바라밀 자체조차도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포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보살은 반야바라밀 위에 서서 불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 ‘어떤 것도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포착하지 않는 명상’이라고 일컫는 광대하고, 무한한 보살의 명상으로서 모든 성문과 독각의 경지에 있는 자는 감히 가까이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상은 형상으로서는 포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명상이 형상이 있는 것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라면, 편력 수행자인 슈레니카도 ‘모든 것을 아는 지혜’에 도달한다는 확신을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편력 수행자인 슈레니카는 자질이 떨어지고 지혜가 결핍된 몸으로 불도의 실천에 들어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도의 실천적 수행에 들어와서,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포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편력 수행자인 슈레니카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확연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에 어떠한 존재에도 집착하지 않고어떠한 존재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열반에조차도 집착하지 않고 또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존재는 색(色)이라고 일컫는 물질적 요소와 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고 일컫는 정신적 요소로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살의 반야바라밀繭遮?것은 색·수·상·행·식 곧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에 대하여 실체가 있는 것으로 포착하는 일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또 보살이 반야바라밀 위에 서서 도를 실천하고자 할 때에는 마땅히 이렇게 고찰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즉, 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인가? 라고. 그리고 이 반야바라밀은 누구의 것인가? 라고.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하고 고찰한다면, 그는 반야바라밀에서 떠나있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천송반야경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