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 당신은 부처님의 외동아들입니다

( 당신은 부처님의 외동아들입니다 )

– 능인선원 원장 지 광 스님 –

오늘 이 자리에는 부산불교계를 대표하는 분들이 모두 모이신듯합니다.

사실 제 고향이 부산 범일동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님들이 이곳으로 피난 오셨다가 저를 낳으셨습니다.

저는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했고, 해직 기자이기도 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산중으로 숨어 다니던 시절에

부처님 법을 만나 중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모태신앙의 가톨릭 신도였습니다.

오늘은 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생각·행동 몸에 입력 돼

80년대 한창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 가운데 물고문이 있었습니다.

그 물고문이라는 것이 머리 위에 링거 병 같은 것을 매달아 놓고

이마 위로 물을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지요.

처음엔 그냥 물 한 방울씩이 머리 위로 떨어질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한 5분쯤 지나고 나니 이마로 정신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물방울이 모래알처럼 느껴지고,

20분쯤 지나니 그 물 한 방울이 조약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30분쯤 되니까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물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가 깨질듯 한,

딱 죽을 것 같은 느낌에 비명이 나왔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확대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리차드 닉슨(1969~1974)이 졸업한 듀크 대학의 초심리연구소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물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접시 두개를 놓고 그중 하나를 향해서 ‘깨져버려’라며 계속 욕을 한 다음

그렇지 않은 보통 접시와 함께 일정한 높이에서 떨어뜨려

파손율을 비교한 실험이었습니다.

실험을 해보니 ‘깨져버려라’고 욕을 한 접시가

그렇지 않은 접시보다 훨씬 파손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실험 결과는 모든 미물중생뿐 아니라

심지어 접시와 같은 무생물에도 의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물리학자가 ‘계속 물질을 쪼개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가 궁금해

물질을 분해해 나가는 실험을 했습니다.

원자의 핵 속에 전자가 있었고

그 전자를 다시 쪼갰더니 여러 개의 광자(빛)가 튀어 나왔습니다.

날아가는 그 여러 개의 광자 가운데 하나를 편광판으로 막았더니

나머지 광자들이 모두 일제히 허공에 멈춰버린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 실험 결과를 놓고 결국 이 과학자는

가설을 통해 “광자와 광자들이 서로 통신한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이 성립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광자에 의식이 있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광자는 모든 물질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광자가 의식이 있다면 모든 물질이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접시에도 의식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기에 여러분의 말, 행동, 생각은 모두 내 몸의 광자에 입력됩니다.

부정적 말을 하면 내 몸에도 부정적인 자료가 입력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여러분이 바른말, 생각을 갖고 법문을 들으며 수행 한다면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여러분의 세포 속에 입력됩니다.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며 저는 한 없이 즐겁습니다.

이 몸 자체가 법의 덩어리이고 부처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부처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무명중생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무명이 모든 고통의 시발점입니다.

사바 중생 살피며 ‘노심초사’

사바세계는 고통스런 세계입니다.

철학자나 사상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상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봅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양사상, 부처님의 사상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남들과 싸우지 말고 네 자신과 싸워라.

정진으로 스스로 이겨 나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고통의 땅에서 경쟁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중생을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향해 ‘너희들은 나의 외동아들 같다’는 말을

모든 경전에서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사바세계에 외동아들을 보내놓은 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들은 나의 외동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노심초사 여러분을 생각하십니다.

그렇기에 ‘정진하라’는 부처님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닌 생명입니다.

부처님의 사랑 모르는게 무명

『화엄경』에 보면 ‘허공은 부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호흡에 있습니다.

내 생명의 원천은 호흡이고 호흡은 허공을 마시는 것인데

그 허공은 바로 부처님의 몸입니다.

내가 호흡을 통해 내 몸을 뜨겁게 달구고 토해낸

그 기운이 옆의 사람에게 흘러가 그 사람이 호흡하고

그 사람의 몸을 다시 뜨겁게 달굽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생명의 장에서 하나로 이어지고

부처님의 생명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임을 모르고 삽니다.

이것이 무명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이 허공에 가득 찬 부처님을 모르고 그 부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무명중생입니다.

『화엄경』 약찬계에 보면 허공에는

우리가 눈을 볼 수 없는 많은 성중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또 허공에는 여러분의 태를 빌어 사람으로 나고자하는 많은 영가들이 있습니다.

무량한 존재들이 있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고 기도하면

주위의 모든 영가들이 편안해지고 고마워하며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는 이 모든 말씀은

곧 ‘내 마음이 하늘에 통해 있고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통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존재는 부처님 안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팔만사천법문을 하신 것은

이 땅에 있는 존재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마음 가운데로 법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진리 가운데서 하나라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삶 속에서 부처님의 이 진리,

그 힘을 증명해야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증명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말 한마디,

생각 한 번, 행동 한 번 할 때마다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깨우치고 깨우치다 보면 정말 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이 뭐꼬’를 하십시오.

참선은 선방에만 있고,

산중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성도는 이뤄집니다.

기도하면 모든 불보살 기뻐해

오늘부터 삶의 모든 현장에서 ‘관세음보살을 염송 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것이 모든 허공에 있는 존재들과 불보살님들에게 지극히 공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부처님과 하나 되는 작용이고,

자신의 모든 악업을 녹이는 지름길이며,

성불의 길이고, 참회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대화입니다.

항상 부처님과 더불어 산다면 그 사람은 더욱 크나큰 가피를 입을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나무관세음보살’ 일곱 글자를 보물이라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살면서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십시오.

법은, 진리는 무적입니다.

온몸으로 부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지정스님─하심(下心)과 안심(安心)

하심(下心)과 안심(安心)

지정스님

(봉암사 선원) 보살은 이렇게 서원한다.

“모든 중생의 집이 되어서 그들의 선근을 키워주고, 귀의처가 되어서 해탈을 이루게 하고, 스승이 되어서 정법에 들게 하며 등불이 되어서 업보를 환희 보게 하며 빛이 되어서 깊고 묘한 법을 비추리라” 이글은 80화엄경 10행품 가운데 선법행(善法行)에 나오는 구절로 보살마하살은 오로지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서 수행하고 설법한다는 내용이다.

‘나’라는 생각이나 ‘나의 이익’을 위한다는 개념은 철저히 버리고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자신을 낮추고 중생의 뜻을 따르고 공경할 때 진리의 문에 들어설 수 있고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공경하고 받드는 것이 곧 여래를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화엄경은 말해준다.

지리한 장마철에 잠깐이나마 화창한 날씨다.

100여명 스님들이 삭발을 끝내고 산행도 가고 한담도 나누며 저마다 수행일기를 챙긴다.

고독을 제대로 체험했다면 우담바라의 위대함을 보았을 것이건만 지극히 혼자인적이 별로 없었던 탓에 고독의 심연에 들어가지 못했었구나.

참선하는 스님들의 얼굴모습은 일반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세상의 욕락에 대해서 나름대로 한 꺼풀 벗은 감이 있다.

비장한 모습, 나한상처럼 기이한 모습, 초연한 모습, 정갈한 모습, 소탈한 모습, 늙수그레한 모습, 만고풍상을 격은 듯한 모습, 처절히 지친 모습, 넉넉한 모습, 소담하지만 결의에 찬 모습, 저마다 업(業)과 수행의 길이 다르기에 각자 특색 있는 모습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렇게 준열하게 살다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모두 사라지겠지.

각자 개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로 화엄(華嚴)이리라.

거기에 무슨 가식이 붙을 것이며, 위선이 있겠는가? 권위나 의례의식을 중요시하는 유교문화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주위사람들의 신망, 비난, 칭찬, 험담 등 이러한 것에 무척이나 가치를 두고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솔직한 감정토로나 의사표현이 지극히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주위환경에 맞추려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다.

객관적인 안목으로는 모범생일지 모르나 한 꺼풀만 벗겨내면 왕 내숭이거나 위선덩어리의 자신과 마주치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삶이 아닌 주위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구체적인 방향성이 모호해지고 목적내지 목표의식이 애매해 질 수밖에 없다.

목표가 불명확하니까 방황하고, 판단이 흐려지며, 반듯한 일처리가 안 되니까 괴로워한다.

대저 주위환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삶의 함정이 이런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사람들일수록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려거나 윗사람에 대한 권위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게는 철저히 권위로 다가선다.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에게서 배척받기 쉽고 한편 배척당하고 소외된다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심하면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 날수가 없게 된다.

자기의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의 잣대로 단체의 질서나 어른에 대한 권위나 공경심을 팽개치므로써 그나마 조그마한 명분이나 정당성마저 저버리고 만다.

단체의 질서를 존중하고 윗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했을 때 행동거지가 당당해 질 수 있고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자신을 물처럼 철저히 낮추고 타인의 권위을 십분 존중해 줄때 굳이 원하지 않아도 대중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호감을 주는 이치다.

자칫 전체적인 틀을 보지 못하고 작은 선(善)에 집착하다보면 자신의 삶도 고달프고 주위사람들도 피곤하게 하고 만다.

바다가 지극히 낮으니 백천(百千)강물을 수용할 수 있고, 남을 공경할 때 어떠한 수모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고 청량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수 만년 캄캄하던 동굴도 불이 켜지면 금방 밝아지듯, 아만(我慢)의 틀을 깨고 하심(下心)할 때 운명처럼 느껴지던 소외의 공포심이나 인정받으려고 안달하는 소인(小人)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마가 지나가면 7월의 불볕더위는 기승을 부리겠지만, 내 마음은 한결 청량해 질 것이다

틱낫한스님─귀향 중에서___(1)

틱낫한스님

─귀향 중에서…(1) 앙드레 지드라는 프랑스 작가는, “신은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루 온종일 우리와 같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신은 행복이요, 평화입니다.

우리가 신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빵 한 조각에는 햇빛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그 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빵 한 조각에는 구름도 있습니다.

구름이 없으면 밀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빵 한 조각을 먹을 때 우리는 구름도 먹고, 햇빛도 먹고, 광물질, 시간, 공간, 모든 것을 다 먹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물이 모든 것이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재의 깊이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을 버려야 합니다.

물결은 높다 낮다, 아름답다 덜 아름답다, 온다 간다, 태어난다 죽는다 따위의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런 개념들을 물자체에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격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따지는 데 그런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소모해야 할까요? 언어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실재에 깊이 접하고 언어를 뛰어넘읍시다.

인격체는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무상’과 ‘무아’ 때문에 인격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영국의 어느 신사분이 불교를 공부하면서 만사가 무상하다는 가르침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이 바뀌어서 안타깝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딸이 “아빠,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제가 어떻게 자랄 수 있겠어요?”하는 말을 했습니다.

매우 똑똑한 딸입니다.

그 딸이 자라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헝겊 조각 하나를 태우더라도 그것은 그저 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속의 열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기로 바뀌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은 재가 되어 땅에 떨어졌다가 내일 다시 나뭇잎이나 풀잎이나 꽃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처럼 연속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말입니다.

바람은 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바람이란 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냥 ‘바람’이라고만 해도 됩니다.

바람이란 무엇인가요? 바람은 여러분의 知覺, 여러분의 意識입니다.

여러분의 지각 때문에 바람이 있습니다.

향을 피울 때도, 그것은 부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향을 피우고, 깊이 절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건전한 씨앗에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수행입니다.

만일 불행을 느끼면 그 불행이 자기 주위로 퍼져나갑니다.

이 이해와 관용을 배양하고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면 고통은 훨씬 줄어듭니다.

주위의 중생들을 자비의 눈으로 보면 놀라운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우선 그를 이해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가 배운 것들 중 하나는 이해가 없으면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부인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으면 서로를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는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우리에게 삶 속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은 마음을 다해 걷는 것, 마음을 다해 앉는 것,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 어디에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이렇게 고통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여러 날 여러 달 우리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고통이 덜어질 수 있습니다.

들어라, 들어라.

이 놀라운 소리, 내 참된 고향으로 날 보내주노니.“ 부처님의 목소리, 종소리, 햇빛 등 모든 것이 참된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고향에선 여러분은 진정한 평화의 기쁨을 누릴 실 수 있습니다.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속에 있는 구름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햇빛, 나무, 흙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요소들이 없다면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생에서 나무였을 뿐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이 바로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는 곳에서 공동체를 만드십시오.

이런 공동체는 우리의 귀의처(피난처)입니다.

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실천의 문제입니다.

공동체의 세울 필요성을 아들과, 배우자들, 길벗들에게 이야기 하십시오.

공동체가 있으면 안전합니다.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들어가 살 데는 있을지 모르나 그들 마음속에는 집도, 고향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들에게 집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집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집이 되어야 합니다.

법신은 다른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서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걸으면서 하는 명상법을 실행하면 분노와 슬픔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사물의 실상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나아가 허상과 집착과 욕망을 벗을 수가 있습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두 가지는 별개의 것입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 아래쪽 디딤목을 버리지 않으면 더 놓은 곳으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지식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도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무 앞에 서면 나무에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나무에 대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매일의 삶을 살아 갈 때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먹을 때도 마음을 다해서 먹고, 마실 때도 마음을 집중해서 마십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더욱 심각해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귀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집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우리의 집이요, 돌아갈 고향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혼란에 빠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면 그야말로 정처 없이 떠도는 혼이 됩니다.

어디에 갈까, 무엇을 할까 알지 못합니다.

스승은, 자신이 알게 된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을 전할 수는 없고 오직 생각을 전할 뿐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그 생각을 가지고 애를 써야 합니다.

문제는 체험이 생각이나 관념을 통해서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로 행복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입니다.

행복에 대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불행하게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행복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