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스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인연소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인연소치

-지안스님-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인연소치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서 없어진다”는 연기의 공식은 마치 1 더하기 1은 2고 2빼기 1은 1이라는 산수의 기본

이치와 같은 말입니다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인연을 빼면 이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인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것이고 인연 때문에 공동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인연이 시공을 장악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교직되면서 인연의 繡가 놓아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상의 형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작에서 보면 인연은 언제나 창조의 역할을 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새싹이 돋아나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인연은 자라서 성숙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꽃이 시드는 과정도 있지만 이는 차라리 인연의 퇴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연은 생성의 의미요 창조의 의미이므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름답고 축복 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내가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고 절망과 좌절을 맛보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태어난 것은 아름답고 축복 받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내 자신의 출생이 원인

무효가 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는지

그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 내가 홀로

가장 높다는 것은 모든 생명의 존재라면 누구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불우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바치면서 해야 할 그 일을 찾을 때 나의 인격은 하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육신의 생사를

초월해 있는 절대 생명으로 나의 참 생명 인 것입니다.

이것을 법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법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도 그릇된 집착으로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을 위하는 것은 법신을 위해서입니다.

금생의 일회적인 한 생은 내가 수용해야 하는 많은 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마치 오늘 하루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무수한 날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생의 인연을 동시에 가지고 삽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삼생의 인연을 평등하게 관찰하고

살라는 부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는 말처럼 끝나지 않는 영원한 미래를 향해서 내 마음속에 모든 시간을 담아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망은 곧 원력입니다.

이상을 동경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보현보살처럼 큰 행원을 싣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에 사는 사람의 소원이

평생을 화장실 청소를 하며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을 화장실 청소하는 청소부가

되겠다는 소원이나 또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소원 중에 어느 것이

좋은 소원이고 어느 것이 나쁜

소원이다 하는 우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지에서 먼 낙도에는 아직도

비행기나 기차는 고사하고 버스도 타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를 깊이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이 인과법으로 연결되어 무수한 인연이 그 속에서 맺어진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인연 속에 과거의 인연이 들어 있고 미래의 인연이 들어 있다는 것, 이것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강물도 함부로 쓰지 말라

일본의 유명한 도겐(道元:1200~1253)선사는 일본 조동종의 개조로 알려져 있다. 중국 조동종의 거장 천동정각의 법을 이어 일본으로 돌아와 조동종의 선법을 널리 선양하였다. 그가 영평永平寺에 회상을 차려 놓고 오래 머물었는데 그때 그의 상좌 한 사람이 원주院主 소임을 보고 있었다. 대중이 먹는 음식을 준비하며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소임을 원주라 부른다.

이 원주 스님이 매일 밤 자정이 되면 아무도 몰래 무엇을 끓여서 혼자 먹는 것이었다. 대중의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절이었는데 원주가 밤중에 몰래 자기만 별도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라고 누가 도겐 스님께 고자질을 하여 한 번은 도겐 선사가 직접 원주가 무엇을 혼자 해먹는지 숨어서 살펴보았다.

“무엇을 너 혼자만 그렇게 먹고 있느냐? 나도 좀 얻어먹자.”

당황한 원주가

“스님은 잡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하였다.

“나도 먹을 수 있으니 좀 다오.”

할 수 없이 원주가 그릇에 담아 먹던 쉰내가 나는 밥알로 쓴 죽을 보여 주었다.

“이게 쉬어 상한 것이 아니냐?”

“수채 구멍에 버려진 누룽지 찌꺼기와 밥알을 주어 내 끓여 본 것입니다.”

음식 찌꺼기를 함부로 버린 것을 제자가 주워내 남모르게 끓여 먹었던 것이다. 상좌의 행동에 크게 감동을 한 도겐 선사는 다음 날 대중을 모아 놓고 법문을 하였다.

“흘러가는 물이라도 쓸데없이 함부로 쓰지 말고 무엇이든지 아껴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복이 모아지느니라.”

경제수준이 높아진 현대사회는 한 마디로 비용이 많이 드는 고비용 시대이다. 생활비는 물론 개인이 소비하는 갖가지 물질에 낭비가 예사로 일어난다. 아낀다는 것은 인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물질이 아까워서 욕심을 부린다는 뜻이 아니다. 이른바 근검절약 정신이다. 근래에 우리나라 어느 큰 스님은 코를 풀고 난 휴지를 펴 햇빛에 말렸다가 다시 화장실 휴지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예로부터 과소비와 낭비는 내 복을 감하는 것이라 말해왔다. 선문의 규범에 말하기를 쌀 한 톨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내 살점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고 간장 한 방울이 버려지면 내 피 한 방울이 버려지는 것처럼 생각하라 하였다.

쓰다가 낡아진 헌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쓰다 헌것이라 버린 것이 남에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소중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과소비가 미덕이 될 수 없으며, 부의 능력을 나타내는 자기 자랑이 결코 될 수 없다.

인간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소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허영이 많다는 사실이다. 하긴 있으니까 사치를 즐기고, 필요이상으로 치장을 하고 산다 하여도 누가 흉보거나 나무랄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러한 허영과 사치가 자기의 다음 인생에 감복이 된다는 사실은 알아 두어야 한다. 때문에 건전한 생활 태도에는 반드시 소비절제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이 사니까 따라 사고 남이 먹으니까 따라 먹고 남이 입어니까 따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부자라도 가난했던 시절 조상이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조상들의 시절을 한 번쯤 생각해 보고 내 분에 넘치는 과잉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積善之家必有餘慶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의 덕택에 의식주의 고급화를 이루어 살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물질의 고급화에서 채워지지 않는다. 고비용으로 살수록 사는 게 더 힘들어 지고 번뇌와 고민이 더 많아지는 법이다. 고급화 될수록 더욱 복잡화지며 신경 쓰이는 데가 더 많아진다. 내 몸의 유지에 비용을 줄이고 내 집의 유지에도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 되리라 생각된다. 줄인비용을 모아 남에게 적선이라도 하면 내 복은 점점 더 자라나게 될 것이다. 선을 쌓는 이에게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게 될 것이라 하였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3월 124호

흐르는 물은 썪지 않는다

문제는 피서에 들떠 마음이 시끄러워 지는 것이다. 물론 여름의 낭만이 피서의 여흥에서 느껴지겠지만, 자칫 오버액션을 하다가 낭패나 사고를 당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뜻이다.

어제였다. 죽은 아들의 사진을 들고 우리 반야암 절에 재를 부치러 찾아온 부모가 있었다. 울산서 온 분이었는데, 며칠 전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한 아들이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익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연신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사람 생활에는 반드시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물이 흐를 때도 알맞게 흘러야 안정감이 있다. 너무 세차게 흐르는 급류에는 위험이 있고 그 흐름에 의해서 수해가 발생할 소지가 높다. 사람의 생각도 의식의 강물이 되어 흐른다. 이 흐름이 우리들 존재의 활력일 수 있고 생명자체의 파동일 수도 있지만, 자기 근기에 맞게 흐름의 템포가 따라야 한다. 노래를 부를 때 그 곡이 작곡될 때 맞춰진 박자에 맞게 불러야 되듯이 내 자신에게 걸맞은 행동이라야 자기다운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된다. 사람 행동에도 물론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수를 점수 쳐주는 일은 없다. 어떤 실수든 그것은 우리의 점수를 마이너스시킨다.

오늘날 인구가 불어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사소한 실수가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주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예방되어야 할 일이다. 장마철이 끝나면 병이 번질까봐 소독약품을 뿌리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정신적 공간에 자기 실수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예방도 해야 한다. 가끔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차량이 한참 정체하여 빠지지 않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누구한 사람의 실수에 의해 사고가 났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진행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어디 교통사고에만 적용되는 문제이겠는가? 나 한 사람의 실수가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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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실수는 어떤 행위를 진행해 가는 동적인 상태에서 생기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반대의 경우가 있다. 쉽게 말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큰 실수에 속한다. 사람은 자기 신분에 따라 인연 닿아 있는 어느 누군가에게 꼭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이것은 사실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것을 마다하고 일부러 거부하는 것은 비인간적 고집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쁜 업장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써야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높은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인생이 되지 않고 세상이 되지 않는다. 선의에 입각한 마음은 쓰면 쓸수록 지혜가 생긴다.

우리 사회에는 해 주어야 되는 일을 안 해 주는 실수가 너무나 많이 숨어 있다. 어떤 사람이 꽃모종을 사 와 화분에 심어 놓고 며칠 동안 물을 주지 않아 그 꽃이 말라 죽어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에 이 실수를 엄중히 문책한다면 꽃을 죽인 책임을 져야 하고 꽃을 사 온 일이 허탕이 되어버린 결과가 되어, 자기 행에 많은 감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좋은 일에 대해 마음을 빨리 내어야 한다. 좋은 일을 찾아 생각을 바르게 일으키는 것, 이것이 우리들 삶 자체의 본래 의무이다. 이것을 불교에서 발심이라고 한다. 관능에 떨어지고 유흥에 도취되어 발심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탄식들을 하지만, 그래도 사회는 언제나 발심할 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 사랑을 이룬다’는 말처럼 마음가는 길이 열려서, 막히고 체한 기(氣)를 뚫어주는 정신적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 혈액순환이 멈추면 죽게 되는 것처럼 마음이 고집에 막히어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실수만 거듭한다면 사람의 정신은 죽어버린다. 그때는 사람이라는 인격도 인간의 자리를 떠나버린다. 마음은 솟아나는 샘물처럼 착한 의지를 일으켜 자꾸 자꾸 써야 한다. 고인 물은 썩을 수 있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는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