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피서에 들떠 마음이 시끄러워 지는 것이다. 물론 여름의 낭만이 피서의 여흥에서 느껴지겠지만, 자칫 오버액션을 하다가 낭패나 사고를 당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뜻이다.
어제였다. 죽은 아들의 사진을 들고 우리 반야암 절에 재를 부치러 찾아온 부모가 있었다. 울산서 온 분이었는데, 며칠 전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한 아들이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익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연신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사람 생활에는 반드시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물이 흐를 때도 알맞게 흘러야 안정감이 있다. 너무 세차게 흐르는 급류에는 위험이 있고 그 흐름에 의해서 수해가 발생할 소지가 높다. 사람의 생각도 의식의 강물이 되어 흐른다. 이 흐름이 우리들 존재의 활력일 수 있고 생명자체의 파동일 수도 있지만, 자기 근기에 맞게 흐름의 템포가 따라야 한다. 노래를 부를 때 그 곡이 작곡될 때 맞춰진 박자에 맞게 불러야 되듯이 내 자신에게 걸맞은 행동이라야 자기다운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된다. 사람 행동에도 물론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수를 점수 쳐주는 일은 없다. 어떤 실수든 그것은 우리의 점수를 마이너스시킨다.
오늘날 인구가 불어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사소한 실수가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주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예방되어야 할 일이다. 장마철이 끝나면 병이 번질까봐 소독약품을 뿌리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정신적 공간에 자기 실수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예방도 해야 한다. 가끔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차량이 한참 정체하여 빠지지 않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누구한 사람의 실수에 의해 사고가 났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진행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어디 교통사고에만 적용되는 문제이겠는가? 나 한 사람의 실수가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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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실수는 어떤 행위를 진행해 가는 동적인 상태에서 생기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반대의 경우가 있다. 쉽게 말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큰 실수에 속한다. 사람은 자기 신분에 따라 인연 닿아 있는 어느 누군가에게 꼭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이것은 사실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것을 마다하고 일부러 거부하는 것은 비인간적 고집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쁜 업장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써야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높은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인생이 되지 않고 세상이 되지 않는다. 선의에 입각한 마음은 쓰면 쓸수록 지혜가 생긴다.
우리 사회에는 해 주어야 되는 일을 안 해 주는 실수가 너무나 많이 숨어 있다. 어떤 사람이 꽃모종을 사 와 화분에 심어 놓고 며칠 동안 물을 주지 않아 그 꽃이 말라 죽어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에 이 실수를 엄중히 문책한다면 꽃을 죽인 책임을 져야 하고 꽃을 사 온 일이 허탕이 되어버린 결과가 되어, 자기 행에 많은 감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좋은 일에 대해 마음을 빨리 내어야 한다. 좋은 일을 찾아 생각을 바르게 일으키는 것, 이것이 우리들 삶 자체의 본래 의무이다. 이것을 불교에서 발심이라고 한다. 관능에 떨어지고 유흥에 도취되어 발심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탄식들을 하지만, 그래도 사회는 언제나 발심할 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 사랑을 이룬다’는 말처럼 마음가는 길이 열려서, 막히고 체한 기(氣)를 뚫어주는 정신적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 혈액순환이 멈추면 죽게 되는 것처럼 마음이 고집에 막히어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실수만 거듭한다면 사람의 정신은 죽어버린다. 그때는 사람이라는 인격도 인간의 자리를 떠나버린다. 마음은 솟아나는 샘물처럼 착한 의지를 일으켜 자꾸 자꾸 써야 한다. 고인 물은 썩을 수 있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는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