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스님─근심 걱정 이겨내는 힘 信心속에 준비 돼 있다

근심,걱정 이겨내는 힘, 信心속에 준비 돼 있다

-지안스님-

우리는 하루 세끼 밥을 지어 먹습니다.

요즘은 주방 시설이 좋아졌지만 예전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법을 지었습니다.

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열을 가해서 밥을 짓는 것입니다.

솥 안에 쌀을 안쳐 놓았다 해서 밥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불을 때서 열이 가해져서 솥 밑을 뜨겁게 데워야 밥이 된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설계를 갖고 있습니다.

나름의 사고방식,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데 자신의 설계, 인생관에 따른 여러 계획들이 이뤄지도록 정성을 다하며 잘되기를 바라는 원력을 갖지 않으면 계획이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누가 얼마만큼 정성을 기울이느냐, 즉 정성의 도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적 신앙심은 우리 인생에 정성의 도수를 높여가는, 말하자면 물을 끓일 때 열을 가하는 것, 밥을 지을 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과 같습니다.

우란분절을 맞아서 조상들에게 천도재, 예수재를 봉행하는 것도 불자들에게는 부처님 회상으로 가는 지중한 인연입니다.

인생에 얼마나 정성 기울였는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교리적으로 설명을 하라면 좋은 인연을 맺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인연 공덕을 성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인연공덕을 지어가면 우리도 언젠가 부처님 회상에서 안락을 누릴 시절인연이 옵니다.

인생은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불존자께서 남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사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죽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품팔이가 품삯을 기다리듯이 나는 내게 올 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나는 사는 것을 원하지도 안하고 죽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잘못 들으면 어려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

‘생사를 끊어야 된다’는 경전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곤 합니다.

나고 죽는 생사가 끊어져야 한다는 것이 생사해탈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우리의 이상, 향수는 생사가 없는 세계를 향합니다.

이곳이 부처님 세계인입니다.

사리불의 이 말씀도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를 벗어나야 된다는 이 취지에 입각해서 설해진 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도재, 예수재도 그 근본 의미는 생사를 여의게 하는데 있습니다.

억겁천생을 지나와 얻은 이 몸 선세로부터 심어온 종자임을 알라 이 몸을 이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불교는 중생이 생사윤회를 하며 생을 계속 이어온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밤낮이 계속 반복되듯 중생의 생사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 생사를 또한 괴로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은 이 생사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열반의 안락이 누려지는 세계, 해탈의 즐거움이 꽉차있는 세계를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깨닫도록 해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법을 설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누구나 숙생부터 지온 업이 있어 그 업에 끄달려 사는 존재입니다.

업은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몸, 말, 생각이 모두 행동입니다.

중생은 신구의 삼업을 자꾸 지어 생사의 고통을 받는 쪽으로만 살아가기에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중생이 가난하거나 출세를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불법을 모르고 세속적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간혹 ‘사람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은 뒤 일을 내가 알바는 없습니다.

공자의 제자가 스승에게 다음 생을 물으니 이번 생도 다 모르는데 다음 생을 어찌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또한 귀신에 대해 물으니 내가 사람일도 모르는데 귀신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공자는 어디까지나 현실문제, 현실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윤리도덕을 제공하고자 했기에 내생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사에 묶여있어 측은한 중생 그러나 불교에서는 육도를 설명합니다.

이 육도 가운데 아귀도가 있는데 배고픈 귀신들의 세상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이 아귀도에 빠졌지요.

효심이 깊었던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란분절 재를 지내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벗어나게 했지요.

이런 이야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은 업 때문에 사후에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부모가 있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로부터 받아 태어나는 육체 외에 다르게 생긴 몸이 있습니다.

생각에서 생기는 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업식에서 생기는 몸입니다.

이것을 생각에 의해 생겨난 ‘의생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들은 모두 의생신으로 있습니다.

귀신도 일종의 의생신입니다.

사람 사후에도 꿈속에 몸이 생기듯 의생신이 생깁니다.

꿈속에서도 악몽에 시달리면 괴롭지요.

살아생전에도 몸에 병이 들면 괴로우므로 병들지 않도록 해야 하듯이 사후에도 악몽에 시달리면 괴로우니 악몽과 같은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살아생전에 미리 재를 지내 놓는 것이 예수재입니다.

그래서 예수재는 불교의 전통 의식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을 불러옵니다.

우리 마음은 영성, 신령스러운 성질인데 이 영성을 무한히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쓰면 복이 됩니다.

기도하는 것의 목적이 내 소원을 비는데도 있지만 기도하면 내 마음이 잘 써집니다.

마음의 번뇌 망상이 쉬어지므로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이 마음엔 나쁜 생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업을 짓는 기운이 없어지니 마음이 밝아지고 이렇게 마음이 잘 써지는 것이 불교이고 곧 불교수행입니다.

탐진치 삼독이 나쁜 업이 됩니다.

밝은 마음은 성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신도라면 평소에 좋은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행위 하나를 좋게 하면 반드시 복이 옵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 때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업관에서 살펴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행동 한번 잘못하면 지옥에 가는 원인이 되고 행동 한번 잘하면 천상에 가는 인연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일을 인연이라고 합니다.

이 인연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시절인연, 때입니다.

옛 사람들은 하늘이 주는 운수와 연관 지어서 천운이 라고도 했습니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가을에는 가을꽃이 피듯이 사람마다 시절인연이 다릅니다.

다음은 지연, 땅과의 인연입니다.

즉 장소와의 인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사람과의 인연입니다.

佛緣은 좋은 인연 만드는 토대 사람이 일생을 다복하게 살려면 시절, 장소, 사람을 잘 만나야합니다.

이것을 운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운은 선택이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인연을 잘 맺는 것이 세속적으로는 복이 되고 운이 좋은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인연을 불연이라 합니다.

이 불연은 앞에 말한 세 가지 인연을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연이 성숙되면 사람 만나는 인연이 좋아져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게 이익이 되고 유리한 곳, 좋은 장소를 만나게 되고 좋은 시절을 만나게 됩니다.

불연을 통해 인연을 좋게 만들어 가면 그것이 내 인생의 복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밭에 작은 씨앗 하나 뿌리더라도 때가되면 열매를 맺듯이 가장 소중한 인연은 불연입니다.

내가 짓는 행위로 내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의 대의입니다.

여기에 인과, 인연, 일심의 이치가 있습니다.

인연 공덕이 성숙되어 복을 누리시고 항상 밝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밝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가 사랑해야할 세상입니다.

세상에 미운 것이 있어도 내가 마음을 잘 쓰면 예뻐 보입니다.

그래서 불심은 항상 우리 마음을 밝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근심걱정을 이겨내는 힘이 우리의 부처님 법 믿는 신심 안에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을 잘 써서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조계종10교구본사 은해사에서 9월 3일까지 마련한 ‘큰스님과 함께하는 생전예수재 및 백중 영가천도대법회’ 가운데 8월 2일 봉행된 제2재에서 지안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지안 스님 은 194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1970년 고려대 법대를 중퇴하고 출가,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운허 스님에서 월운 스님으로 이어진 강맥을 이었으며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강주, 마산포교당 정법사 주지, 통도사 승가대학 강주 등을 역임하고 현재 조계종립 승가대학원장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대승기신론 강의』, 『신심명 강의』, 『기초경전 해설』, 『보현행원품 강의』, 『금강경 이야기』 등을 저술했다.

지안스님─下心하심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

下心하심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

-지안스님-

나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도와준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금강경에는 사람이 相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상이란 나를 남에게 과시하고 나의 장점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我慢心아만심 따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행에 있어 금물이며 일반사람의 교양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놓아도 그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면 오히려 남에게 미움을 사는 법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한 선행을 스스로 숨기는 것이 더 큰 미덕이 됩니다.

이것을 밀행이라 하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도와주는 것을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보체계로 움직여지는 현대사회는 각종의 알림인 선전과 광고의 홍수의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위 PR(Public Relation)시대라고 말하듯이 갖가지 상업광고를 위시하여, 업소나 단체의 이름을 스스로 선전하는 소문내기가 너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매스컴의 발달에 의한 당연한 추세이긴 하지만 어쩐지 찜찜할 때가 있습니다.

이 PR시대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보면 개인이나 단체를 대중에게 알리고 보자는 相내기 운동에 열중합니다.

그리하여 相 을 내지 못할 때는 스스로 소외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져버립니다.

소외와 열등의식은 생활의 기를 꺾어 인간의 의지를 나약하게 하고 어떤 패배주의에 빠져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또 남의 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져서 남과 동화되지 못하는 사태를 낳기도 합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기 자존심은 높이고자 함과 세상의 명예를 탐할 때 더욱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하기야 사람에게는 자기의 입장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지는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소신껏 살아가는 주체의식이야말로 인간승리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이 相 을 내는 자기 과시가 되어 사람 사이의 충돌과 마찰을 빚어내는 불화의 요인이 되는 수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경쟁사회에서 자기주장을 세우고 관철하기 위해서 입장대결이 생길 때,한 판 승부를 겨루자고 벼르는 독선과 아집은 인간의 착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이기고 보자는 승부근성이 개인의 생존에 필요할 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승리를 얻어내는 방법이 좋아야 합니다.

비겁하고 야만적인 수단을 써서 이기는 것은 승리 자체가 비겁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모여 사는 공동사회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下心입니다.

모든 도덕적 가치를 세우는 근본도 물론 하심에서 비롯됩니다.

불가에서 대중처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법[入衆五法입중오법]이 있는데, 제일 먼저 하심下心이 나옵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남에게 겸손하고 상대를 더욱 존중해 주는 하심의 정신은 진정한 인격 수양으로 아만을 꺾어 자신을 착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인간상호의 이해타산이 맞물려 움직이는 사회생활 속에서 가끔 자존심 상하는 불쾌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사람이 남에게 무시당하고 기분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존심의 상처는 손가락을 다친 것보다 더 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존심을 치료해 주는 약은 하심下心 밖에 없습니다.

육바라밀에도 인욕바라밀이 나오지만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는 인욕에서 사람의 정신적 무게가 커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자존심은 도덕적 윤리의식과 義의와 勇용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입니다.

아만을 내세우는 것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공자는 학문에 있어서 자존심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논어에서 말한 불치하문(不恥下問)이란 말은 배움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자주 상하곤 합니다.

과민한 신경으로 매사를 대하다 보니 한 생각 감정의 실수가 쉽게 터집니다.

예와 의를 잃고 부지불식간에 남의 기분을 해쳐버리는 수가 빈번합니다.

극기의 수양부족 현상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좀 더 下心을 배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안스님─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는 염주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는 염주 -지안 스님- 시내에 나가 택시를 타다보면 운전석 위의 거울에 염주를 걸어 놓은 차를 가끔 보게 된다.

스님인 나로서는 이 사람이 불교신자인가 보다 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왜 염주를 걸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무사고를 비는 뜻에서 건다고 했다.

말하자면, 액운을 물리친다는 뜻에서 염주를 걸고 다닌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복을 맞이하고 액을 물리치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을 위안하고자 몸에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행운을 상징하는 어떤 마스코트를 지니기도 한다.

또 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상징하는 염주나 묵주, 혹은 십자가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염주는 불교의 수행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글자 그대로 ‘생각을 맑게 해 영롱한 구슬처럼 한다’는 뜻이다.

생각이 맑다는 것은 곧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이다.

번뇌와 망상 속에서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 있는 수가 많다.

그래서 염주를 굴리면서 자기 생각을 정화하여 삶의 의미를 바르게 생각해 가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듣는 시청각 속에서 곧잘 번뇌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백팔번뇌를 안고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감각기관이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기억 되어지는 것의 여섯 가지 경계를 대하여 좋다(好), 싫다(惡), 좋지도 싫지도 않다(平等)는 세 가지 감정과 이것이 지속되어 즐겁다(樂), 괴롭다(苦),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捨)는 세 가지 느낌을 만들어 36가지 번뇌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다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관계되어 다시 3을 곱하면 108 번뇌가 산출되어 나온다.

이리하여 번뇌를 가라앉게 하기 위하여 염주를 굴리며 염불을 하는 수행법도 나오게 된 것이다.

번뇌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갈등 따위를 유발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번뇌가 없으면 편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상태일 텐데, 번뇌 때문에 불편하고 괴로워진다.

똑같은 음식이 사람의 입맛에 따라 맛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맛없게 느껴지기도 하듯이 번뇌의 경중에 따라 생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

흐린 생각, 탁한 마음이 되지 말고 맑은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이 세상이 곧 맑아지고 깨끗해질 것이다.

(원각경)에 “한 마음이 청정하면 곧 온 세상이 청정하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염주를 굴리는 것은 개인의 생각을 맑게 하고 사회의 정신 공기를 순화하는 하나의 작업이다.

공해에 찌든 도시의 하늘보다 산 속의 맑은 공기가 그립듯이, 혼탁한 문명의 배기가스를 정화하는 것은 염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온 산에 무성한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이는 싱싱함이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시절, 살아서 이를 보고 있다는 것만도 은혜롭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염주를 손에 쥐고 포행을 하다가 문득 산봉우리에 걸려 있는 흰 구름을 보았다.

아련한 먼 곳의 소식이 하늘을 통해 전해 오는 것 같다.

하늘의 향기를 맡으며, 염주 한 알을 굴리며 한없이 순수해지고 싶어진다.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