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스님─남을 욕하면 허물이 자기에게 돌아온다

***남을 욕하면 허물이 자기에게 돌아와***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지안스님

부처님이 사바티의 녹자모 강당에 계실 때의 일이다.

부처님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탁발을 하기 위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탁발이 끝날 무렵 곤란한 일이 하나 생겼다.

사바티에 사는 파라트피차라는 심술궂은 욕쟁이가 부처님을 따라다니며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파라트피차는 부처님이 자기의 위세에 눌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인 줄 알고 더욱 기세를 부리며 으스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체의 분노로부터 해탈한 부처님은 그런 일에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이러한 부처님의 반응에 약이 오른 파트라피차는 더욱 화가나 흙을 한 주먹 쥐고 부처님을 향해 뿌렸다.

그때 맞은편에서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가 오히려 파트라피차에게로 날아갔다.

파트라피차는 자기가 뿌린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부처님은 딱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욕을 하거나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설사 너를 화나게 한 사람이나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도 그래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이 청정해서 때가 없는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면 허물은 도리어 자기에게 돌아온다.

마치 바람을 거슬러 흙을 뿌리면 그 흙먼지가 되돌아와 자신을 더럽히는 것과 같으니라.” 이상은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이야기의 하나다.

50권에 게송 형식 짧은 이야기 수록 불교 핵심교의 ‘연기법’ 정의도 실려 사람을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감정에 의해 행동을 하다보면 절제되지 못한 그릇된 행동이 예사로 나오는 수가 많다.

수행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릇된 행동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말 한 마디가 잘못되면 서로 원한을 가지는 결과가 오게 되고 내가 남을 미워하는 눈치가 보이면 남도 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친목은 부드러운 말과 친절한 행동으로 두터워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또 이런 비유를 들기도 했다.

누가 남에게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을 때 그 욕설과 비방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손님을 맞이한 집에서 그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음식을 마련해 상을 차려 주었는데 그 손님이 이미 밥을 먹었다하여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은 결국 차려준 사람의 식구가 먹어야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잡아함경〉은 4아함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경으로 추정한다.

내용이 대개 짧은 이야기들을 수록하고 있고 모두 암송하기 좋은 게송형태로 되어 있다.

반면에 량은 4아함 중 가장 많아 전체 구성이 50권 1362개의 소경으로 되어 있다.

한역한 사람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393~468)이며 번역된 해는 435년으로 4아함 중 제일 늦게 번역되었다.

이 해에 구나발타라가 송(宋) 문제(文帝)의 청을 받아 건강(健康)으로 와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잡아함경〉도 그때 번역되었다 한다.

원본인 범본은 법현(法顯) 인도에 갔을 때 가져왔던 것이라 한다.

또 〈잡아함경〉에는 불교의 핵심 교의인 연기법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은 유명한 구절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 (此有故彼有 彼有故此有)”는 말이 설해져 있다.

-불교신문에서-

지안스님─나와 이웃의 불행 막는 불교신앙

***나와 이웃의 불행 막는 불교신앙***

지안스님

불교는 인간의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 법문에서 이를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을 가져 오는 원인이 번뇌이므로 이 번뇌를 없애서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다.

팔정도라는 수행 지침이 결국 번뇌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번뇌를 끊으면 해탈을 얻는다.

해탈을 얻고서 열반을 누린다는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해탈은 자유요, 열반은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로워졌을 대 평화가 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에서는 해탈중심의 수행가풍이 나왔다.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극기의 수행을 하여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수행의 단계를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로 구분하여 견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수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修惑) 혹은 사혹(思惑)이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번뇌를 없애야 수행이 되므로, 자리적인 데 치중되고 사회적 문제를 소홀히 하는 독선적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고부터는 이를 소승의 약점으로 보았다.

사실 불교일반에서 보면 번뇌를 극복하는 해탈사상이 대소승을 막론하고 근본대의가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고부터 번뇌는 꼭 끊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그대로 두고도 수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꼭 번뇌를 끊으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번뇌를 끊지 않고 수행을 한다고 한다.

잘못 들으면 큰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말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된다는 뜻에서다.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가 여러 가지 상품들이 진열된 것을 보았다.

신상품을 위시한 물품들을 보고 그 상품들을 이건 뭐고 저건 뭐다 하고 보는 대로 아는 것이 번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 싶은 구매충동이 일어나고 돈이 부족해 살수 없을 때 안타깝고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면 이는 분명 번뇌다.

그래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견물생심(見物生心) 이라는 말처럼 사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객관상황 전체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욕심이 안생기면 괜찮다’고 말하듯이 ‘번뇌가 안생기면 열반이다’라는 말이 생겼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이 나오고부터 해탈 중심의 수행정신이 이타원력을 바탕으로 한 구세주의로 바뀐다.

대승에 해탈주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해탈 지상주의에서 대비 원력을 중시하는 구세사상으로 수행의 방향전환이 나왔다는 말이다.

(화엄경)에는 ‘내가 제도 받기 전에 남을 먼저 제도하자’는 슬로건이 경문 속에 나온다.

또 (법화경)이 나오고부터는 불탑신앙이나 관음신앙 등 불교의 신앙형태가 새롭게 형성되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신라시대부터 관음신앙이 민간에 자리 잡기 시작하여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또 지장보살을 받드는 지장신앙은 성불을 포기하는 대비천제의 거룩한 정신을 신앙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앙이 개인의 사적인 공명심을 앞세우는 경향도 있으나 나와 이웃의 불행을 막기 위한 구세주의 정신에 입각해 나온 것이다.

불교가 종교로서의 사회적인 이바지를 할 때는 반드시 비의 윤리가 실천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세주의는 바로 이러한 대비심에 입각한 비(悲)의 윤리를 실천하자는 사회적 운동인 것이다.

[불교신문]

지안스님─근심 걱정 이겨내는 힘 신심 속에 준비돼 있다

근심 걱정 이겨내는 힘 신심 속에 준비돼 있다

-지안스님-

우리는 하루 세끼 밥을 지어 먹습니다.

요즘은 주방 시설이 좋아졌지만 예전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법을 지었습니다.

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열을 가해서 밥을 짓는 것입니다.

솥 안에 쌀을 안쳐 놓았다 해서 밥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불을 때서 열이 가해져서 솥 밑을 뜨겁게 데워야 밥이 된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설계를 갖고 있습니다.

나름의 사고방식,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데 자신의 설계, 인생관에 따른 여러 계획들이 이뤄지도록 정성을 다하며 잘되기를 바라는 원력을 갖지 않으면 계획이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누가 얼마만큼 정성을 기울이느냐, 즉 정성의 도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적 신앙심은 우리 인생에 정성의 도수를 높여가는, 말하자면 물을 끓일 때 열을 가하는 것, 밥을 지을 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과 같습니다.

우란분절을 맞아서 조상들에게 천도재, 예수재를 봉행하는 것도 불자들에게는 부처님 회상으로 가는 지중한 인연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교리적으로 설명을 하라면 좋은 인연을 맺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인연 공덕을 성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인연공덕을 지어가면 우리도 언젠가 부처님 회상에서 안락을 누릴 시절인연이 옵니다.

인생은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불존자께서 남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사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죽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품팔이가 품삯을 기다리듯이 나는 내게 올 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나는 사는 것을 원하지도 안하고 죽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잘못 들으면 어려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

‘생사를 끊어야 된다’는 경전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곤 합니다.

나고 죽는 생사가 끊어져야 한다는 것이 생사해탈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우리의 이상, 향수는 생사가 없는 세계를 향합니다.

이곳이 부처님 세계인입니다.

사리불의 이 말씀도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를 벗어나야 된다는 이 취지에 입각해서 설해진 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도재, 예수재도 그 근본 의미는 생사를 여의게 하는데 있습니다.

억겁천생을 지나와 얻은 이 몸 선세로부터 심어온 종자임을 알라 이 몸을 이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불교는 중생이 생사윤회를 하며 생을 계속 이어온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밤낮이 계속 반복되듯 중생의 생사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 생사를 또한 괴로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은 이 생사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열반의 안락이 누려지는 세계, 해탈의 즐거움이 꽉차있는 세계를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깨닫도록 해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법을 설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누구나 숙생부터 지온 업이 있어 그 업에 끄달려 사는 존재입니다.

업은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몸, 말, 생각이 모두 행동입니다.

중생은 신구의 삼업을 자꾸 지어 생사의 고통을 받는 쪽으로만 살아가기에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중생이 가난하거나 출세를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불법을 모르고 세속적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간혹 ‘사람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은 뒤 일을 내가 알바는 없습니다.

공자의 제자가 스승에게 다음 생을 물으니 이번 생도 다 모르는데 다음 생을 어찌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또한 귀신에 대해 물으니 내가 사람일도 모르는데 귀신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공자는 어디까지나 현실문제, 현실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윤리도덕을 제공하고자 했기에 내생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육도를 설명합니다.

이 육도 가운데 아귀도가 있는데 배고픈 귀신들의 세상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이 아귀도에 빠졌지요.

효심이 깊었던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란분절 재를 지내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벗어나게 했지요.

이런 이야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은 업 때문에 사후에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부모가 있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로부터 받아 태어나는 육체 외에 다르게 생긴 몸이 있습니다.

생각에서 생기는 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업식에서 생기는 몸입니다.

이것을 생각에 의해 생겨난 ‘의생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들은 모두 의생신으로 있습니다.

귀신도 일종의 의생신입니다.

사람 사후에도 꿈속에 몸이 생기듯 의생신이 생깁니다.

꿈속에서도 악몽에 시달리면 괴롭지요.

살아생전에도 몸에 병이 들면 괴로우므로 병들지 않도록 해야 하듯이 사후에도 악몽에 시달리면 괴로우니 악몽과 같은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살아생전에 미리 재를 지내 놓는 것이 예수재입니다.

그래서 예수재는 불교의 전통 의식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을 불러옵니다.

우리 마음은 영성, 신령스러운 성질인데 이 영성을 무한히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쓰면 복이 됩니다.

기도하는 것의 목적이 내 소원을 비는데도 있지만 기도하면 내 마음이 잘 써집니다.

마음의 번뇌 망상이 쉬어지므로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이 마음엔 나쁜 생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업을 짓는 기운이 없어지니 마음이 밝아지고 이렇게 마음이 잘 써지는 것이 불교이고 곧 불교수행입니다.

탐진치 삼독이 나쁜 업이 됩니다.

밝은 마음은 성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신도라면 평소에 좋은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행위 하나를 좋게 하면 반드시 복이 옵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 때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업관에서 살펴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행동 한번 잘못하면 지옥에 가는 원인이 되고 행동 한번 잘하면 천상에 가는 인연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일을 인연이라고 합니다.

이 인연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시절인연, 때입니다.

옛 사람들은 하늘이 주는 운수와 연관 지어서 천운이라고도 했습니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가을에는 가을꽃이 피듯이 사람마다 시절인연이 다릅니다.

다음은 지연, 땅과의 인연입니다.

즉 장소와의 인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사람과의 인연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다복하게 살려면 시절, 장소, 사람을 잘 만나야합니다.

이것을 운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운은 선택이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인연을 잘 맺는 것이 세속적으로는 복이 되고 운이 좋은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인연을 불연이라 합니다.

이 불연은 앞에 말한 세 가지 인연을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연이 성숙되면 사람 만나는 인연이 좋아져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게 이익이 되고 유리한 곳, 좋은 장소를 만나게 되고 좋은 시절을 만나게 됩니다.

불연을 통해 인연을 좋게 만들어 가면 그것이 내 인생의 복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밭에 작은 씨앗 하나 뿌리더라도 때가되면 열매를 맺듯이 가장 소중한 인연은 불연입니다.

내가 짓는 행위로 내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의 대의입니다.

여기에 인과, 인연, 일심의 이치가 있습니다.

예수재에 동참한 인연으로 인연 공덕이 성숙되어 복을 누리시고 항상 밝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밝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가 사랑해야할 세상입니다.

세상에 미운 것이 있어도 내가 마음을 잘 쓰면 예뻐 보입니다.

그래서 불심은 항상 우리 마음을 밝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근심걱정을 이겨내는 힘이 우리의 부처님 법 믿는 신심 안에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을 잘 써서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