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웃의 불행 막는 불교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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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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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인간의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 법문에서 이를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을 가져 오는 원인이 번뇌이므로 이 번뇌를 없애서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다.
팔정도라는 수행 지침이 결국 번뇌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번뇌를 끊으면 해탈을 얻는다.
해탈을 얻고서 열반을 누린다는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해탈은 자유요, 열반은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로워졌을 대 평화가 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에서는 해탈중심의 수행가풍이 나왔다.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극기의 수행을 하여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수행의 단계를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로 구분하여 견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수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修惑) 혹은 사혹(思惑)이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번뇌를 없애야 수행이 되므로, 자리적인 데 치중되고 사회적 문제를 소홀히 하는 독선적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고부터는 이를 소승의 약점으로 보았다.
사실 불교일반에서 보면 번뇌를 극복하는 해탈사상이 대소승을 막론하고 근본대의가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고부터 번뇌는 꼭 끊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그대로 두고도 수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꼭 번뇌를 끊으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번뇌를 끊지 않고 수행을 한다고 한다.
잘못 들으면 큰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말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된다는 뜻에서다.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가 여러 가지 상품들이 진열된 것을 보았다.
신상품을 위시한 물품들을 보고 그 상품들을 이건 뭐고 저건 뭐다 하고 보는 대로 아는 것이 번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 싶은 구매충동이 일어나고 돈이 부족해 살수 없을 때 안타깝고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면 이는 분명 번뇌다.
그래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견물생심(見物生心) 이라는 말처럼 사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객관상황 전체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욕심이 안생기면 괜찮다’고 말하듯이 ‘번뇌가 안생기면 열반이다’라는 말이 생겼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이 나오고부터 해탈 중심의 수행정신이 이타원력을 바탕으로 한 구세주의로 바뀐다.
대승에 해탈주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해탈 지상주의에서 대비 원력을 중시하는 구세사상으로 수행의 방향전환이 나왔다는 말이다.
(화엄경)에는 ‘내가 제도 받기 전에 남을 먼저 제도하자’는 슬로건이 경문 속에 나온다.
또 (법화경)이 나오고부터는 불탑신앙이나 관음신앙 등 불교의 신앙형태가 새롭게 형성되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신라시대부터 관음신앙이 민간에 자리 잡기 시작하여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또 지장보살을 받드는 지장신앙은 성불을 포기하는 대비천제의 거룩한 정신을 신앙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앙이 개인의 사적인 공명심을 앞세우는 경향도 있으나 나와 이웃의 불행을 막기 위한 구세주의 정신에 입각해 나온 것이다.
불교가 종교로서의 사회적인 이바지를 할 때는 반드시 비의 윤리가 실천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세주의는 바로 이러한 대비심에 입각한 비(悲)의 윤리를 실천하자는 사회적 운동인 것이다.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