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스님─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 /

지안스님

(조계종 고시위원장)

육조 혜능 선사가 출가 전에 가난한 나무꾼으로 살았다는 것은 선종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 저자에 팔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어느 날 나뭇짐을 지고 저자거리에 가서 팔았는데 마침 객주 집 주인이 사서 짐을 지고 따라가 짐을 내려놓고 나오게 되었다.

바로 그때 객사에 투숙해 지내던 어떤 사람이 책을 낭랑하게 읽고 있었다.

무심코 듣고 있던 육조 스님(당시 나무꾼 노씨)의 귀에 “응당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이 들려왔다.

그 순간 귀가 번쩍 뜨이면서 알 수 없는 강력한 느낌이 가슴 속에 와 닿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책을 읽던 사람에게 그 책이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이건 불경 가운데 (금강경)이라는 책이요.”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나무꾼 노씨는 드디어 출가를 단행하여 황매산으로 오조 홍인 스님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응당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은 금강경 ‘장엄정토분 제10’에 나오는 구절이다.

금강경이 중국 선종사에서 중요시 여겨진 동기는 바로 이 구절을 듣고 발심하여 출가한 육조스님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수보리와 부처님이 문답형식의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체 관념적인 고집을 없애라는 것이 핵심 대의이다.

경 본문에서는 관념적 고집을 상(相)이라는 말로 표현해 놓고 있다.

이 상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넷을 들고 또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이라는 말도 나온다.

육조스님 출가동기 금강경의 핵

마음이 없으면 ‘업의 충돌’도 없어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은 일체 상(相)을 벗어난 마음을 쓰라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함이 없는 마음 무위심(無爲心)이라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경우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무심하고 순수한 상태 그대로, 도와 줘도 도와준 것이 없는 마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말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이때 B라는 사람이 A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A를 도와주었다라고 자기가 한 일을 남에게 자랑을 하거나 자기의 선행을 고의적으로 업적을 삼으려 하면 도와준 행위야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걸 자랑하거나 과시하려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큰 도움을 주고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선행을 끝까지 숨긴다면 이것이 도와준 사람을 더 감동하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관념에 붙들리지 않는 상(相)이 없는 마음이라야 무구청정(無垢淸淨)한 본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어떤 관념에도 지배되지 않아야 이것이 바로 깨달음에 일치된 마음이다.

이 마음을 내면 중생세계에 업의 충돌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불교신문 2791호/ 2월15일자]

지안스님─마음속에 있는 세 개의 ‘밭(田)’

마음속에 있는 세 개의 ‘밭(田)’

-지안스님-

얼마 전에 오랜 만에 반야암을 찾아온 신도 한 사람이 있었다.

30여 년 전 울산에서 불교청년회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절을 매우 좋아 하면서 한 때 스님이 되는 출가를 할까 망설이다가 어떤 청년의 열렬한 사랑의 호소에 시집가는 출가를 해버린 사람이었다.

이제 50대 후반의 나이로 절에 와서도 30살이 된 아들과 28살이 된 딸의 결혼 걱정을 하는 평범한 어머니인 이 신도와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나를 감동하게 한 사연 하나를 들었다.

그것은 9순이 넘는 친정 부모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병 시중을 11년을 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환자이고 아버지는 앉고 일어설 수는 있으나, 보행을 할 수 없는 몸 가누기가 잘 안 되는 분이라 하였다.

이런 두 부모를 11년이나 곁을 지키면서 수족노릇을 해 왔다는 이야기를 눈물을 글썽이면서 하는 것을 보고, 보기 드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 효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도 여러 명 있고 언니 동생도 여러 명이 있음에도 자신이 간병을 도맡기 위해서 생계를 꾸리던 가게도 문을 닫고 부모 모시는 일이 가장 좋은 팔자라고 생각 했다 하였다.

마침 서울에 사는 언니가 내려와 동생의 간병 고생을 안타깝게 여겨, 이틀만 어디 가서 쉬다 오라 하여 절을 찾아 왔다 하였다.

나는 참으로 복을 많이 짓고 산다며 위로 겸 칭찬의 말을 해 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복전(福田)’이라 한다.

‘복을 심는 밭’이란 뜻이다.

마음을 땅이나 밭에 비유, ‘심지(心地)’니 ‘심전(心田)’이니 하는 말들이 경전에 자주 등장한다.

땅이 모든 식물의 씨앗을 흙속에 묻어 싹을 트게 해주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땅이나 밭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그때그때 일으키는 행위를 현재 일으키는 행동이라 하여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이 말과 상대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종자(種子)’이다.

흙속에 묻혀 있던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처럼 마음속에 들어 있던 종자에서 현행의 행동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행위를 일으킬 수 있는 업종자(業種子)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 종자를 싹을 틔어 자라게 하므로 ‘밭’이라 한다.

농사를 짓는 밭에 재배하는 농작물의 이름을 따라 밭 이름을 붙이는 수가 있다.

가령 배추를 심었으면 ‘배추밭’이라 하고 고구마를 심었으면 ‘고구마밭’이라 한다.

콩을 심으면 ‘콩밭’이요 보리를 심었으면 ‘보리밭’, 밀을 심었으면 ‘밀밭’이다.

마음의 밭에는 무엇을 심어 이름을 부르는가? 물론 업이 심어져 있으면 ‘업밭’이라 하겠지만 그러나 마음의 밭을 가장 아름답게 부르는 말이 바로 ‘복전(福田)’이라는 말이다.

복을 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근본 주제이다.

복전인 사람의 마음에는 세 개의 밭이 있다.

‘경전(敬田)’과 ‘은전(恩田)’과 ‘비전(悲田)’이다.

‘경전’은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복을 짓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삼보를 공경하거나 공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면 한량없는 복을 얻는다 하였다.

‘은전’은 은혜를 베풀거나 갚으면 복이 지어진다는 뜻이다.

특히 은혜를 입고 은혜를 갚지 않으면 감복(減福)이 된다하여 불교에서는 부모나 스승 등의 은혜를 갚을 것을 강조 한다.

원한은 갚으려 하지 말고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비전’은 자비를 베풀 대상으로서 가난 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연민의 정을 보내 주는 것을 말한다.

부모는 ‘은전’이면서 동시에 ‘경전’이다.

공경하고 은혜를 보답 하려는 마음, 이 마음에는 언젠가 반드시 복이 온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환경이 건조해지고 황폐화 된다고 염려하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복전사상’ 곧 ‘삼전사상’이 널리 퍼져, 사람마다 ‘복밭’을 일구려는 노력으로 새로운 사회의 규범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공경할 줄 모르고 은혜를 갚을 줄 모르고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비정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밭을 잘 경작하는 것이 내 인생의 풍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이것이 잘 실천되면 거기에서 오는 수확이 복의 열매가 된다.

이기적 아만 때문에 삼전을 잃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활동의 공적도 삼전의 실천지수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조선 후기의 만덕(1739~1812) 비구니는 제주도에 대 기근이 닥쳐왔을 때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제주도민을 구휼하였으며, 서울 봉은사의 학밀(學密) 스님은 1925년 한강이 범람하여 큰 수해가 일어났을 때 절의 양식을 죄다 꺼내 수재민을 구제하였다.

비전공덕을 실천한 사례들이지만 하루하루의 생활이 ‘삼전의 밭’을 잘 가꾸며 사는 것이 인생의 바른 자세며 올바른 도리라 할 것이다.

지안스님─마음 속 불화 극복이 인생 잘 사는 지름길

마음 속 불화 극복이 인생 잘 사는 지름길

-지안스님-

불교는 가장 인간적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서

자기의 마음을 건사해 가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주제는 바로 마음이고, 이 마음은 또한 세상살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망념을 주제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갖고 수행함으로써 삶을 바로 알고 바로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곧 불교를 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는 불자들의 신행과 수행은 모두

마음 문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불교의 근본 대의가 됩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신앙적 정서를 말할 때는

흔히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불교를 만난 인연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부처님 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과거 숙세로부터 쌓아온

업장을 알아 이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것도 바로 이 네 가지 마음을

다시 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행하는 자세가 갖춰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삶이 좀더 성숙된 단계로

향상되기를 바라는데, 불교를 신행함으로써 성숙되고

향상된 방향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계율에 불살생계가 있고,

대승경전인 『범망경』에서 분명하게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목을 설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계율정신에서 볼 때 사람이

소를 잡아먹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처럼 본질적으로 문제를 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진리를 통해서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연기설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다는 것이 연기인데,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인 것이지요.

이를 바꿔 말하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를 하는 쪽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언론을 통해 보면 우리사회가 좌우대결을 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대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보면 역사적인 과정이

모두 좌우대결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아전인수격 해석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불교 역사를 놓고 볼 때 불교정신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는 불교가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최고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중도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서 배불숭유 정책를 펴고

유교를 국시로 채택한 이후부터

불교의 중도정신이 유교정신에 밀려났고,

그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시대에 좌우대결의 관념이

심하게 남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통일이 되지 않은 나라도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역사가 깊고, 산사가 많고,

도시마다 사찰이 있어도 형식적인 과거 역사에 의존해서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까, 골동품적 가치만 내세우고 있습니다.

골동품은 실용적이지 못합니다.

불교의 실용정신, 이러한 것을 우리시대에 와서

다시 한번 챙겨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들이 불자들의 의식 개혁을 통해 나와야 할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를 통해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정신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주장하는 어떤 분은 30년만에

문맹을 퇴치하고 산업화를 이뤄내고 민주화를 이뤄낸

세 가지를 예로 들어 우리나라의 우수성을 설명했습니다.

일본이 100년을 걸려서 이뤄낸 일을 불과

30년만에 이뤄냈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이 말에 수긍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단점을 보자면 화합을 못합니다.

어디를 가나 서로 파벌 위주로 나눠집니다.

수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보니 뉴욕에서 한인회장 선거를 하는데,

유세를 하면서 서로 상대를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느 스님의 초청을 받아서 뉴질랜드 절에 가서

법회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신도님 댁에 가서 보니

교민들에게 알리는 두 개의 소식지가

서로를 비방하는 기사를 싣고 있었습니다.

이거 참 부끄러운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이 바로 화합을 잘 못하는 점입니다.

불교는 화합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불법승 삼보를 말하는데 승보가 범어의

상가라는 말을 번역해서 나온 말이고,

이 말이 바로 화합하는 단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불법승 삼보는 한가지 바탕에서

세 가지가 갖춰졌다고 해서 동체삼보라고 합니다.

빛과 빛이 화해서 어우러짐으로써 어떤 공간이나

지역을 밝혀주는 것, 이것이 삼보입니다.

동체삼보와 승가정신 이것이 불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화합이 안되니까 그렇지요.

우리시대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바로 화합입니다.

화합을 요청하는 시대입니다.

화합을 요청한다는 것은 바로 승가정신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내 마음에서 불화정신을 제거하는 것이고,

이 불화정신을 제거하는 것이 번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흔히 거창하게 생각해서

평생 선방에 다니면서 열심히 정진해 화두를 타파하고

성품 자리를 보는 견성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내는 것으로

깨달음을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속 그릇된 생각을 밖으로 들어내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에서 옳지 못한 생각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은 인생을 바로 살게 하는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 받아 태어난 것이고,

사바세계에서의 생을 마치고 떠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무상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죽는 것이 아니고, 본래 생사를 초월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청정제불공덕해(淸淨諸佛功德海)

보현명등조세간(普賢明燈照世間)

중생함몽불구호(衆生咸佛口號)

소제진구성최승(掃除塵垢成最承)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바다 같아

보현보살의 밝은 등이 세간을 비춤이라

중생이 모두 함께 부처님을 부르니

더러운 티끌이 사라져 최상을 성취한다.

『화엄경』 사구게 게송입니다.

청정제불공덕해(淸淨諸佛功德海).

부처님이 중생과 다른 점을 깨달았다거나

깨닫지 못했다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본래 마음에는 잘못된 생각이 없어서 심체일념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청정하다고 해서 정법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연기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지는데

연기하는 방향이 깨끗한 쪽으로 나가는 연기를

정연기라고 합니다.

반대로 오염되고 더러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연기를 염연기라고 하는데,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이것이 모두 염연기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은 훈습되는 마음입니다.

향을 피우면 냄새가 스며드는데,

이렇게 스며드는 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진여가 훈습하는 마음이 있고 무명이 훈습하는 마음이 있는데,

여기서 진여가 훈습하는 마음은 정연기로 발전하고

무명이 훈습하는 마음은 염연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개인과 사회, 나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법을 다시 현실에서 응용하고 적용할 때는 인과법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법을 인과법,

인연법, 일심법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고,

인과법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서 발아하고 열매를 맺어 수확하게 됩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조건이 항상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이 인연의 소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과법과 인연법은 결국 중생의 일심을 의지해서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일심법이라고 합니다.

불법 인연은 결국 이 세 가지 법을 배움으로써 성숙하게 됩니다.

법회라는 게 무엇입니까.

물이 지상에 흐를 때는 한강, 낙동강, 압록강,

두만강 등으로 부르지만,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법회는 남녀노소가 부처님 법을 듣기 위해 모인 장소이고,

지상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불법의 바다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불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불자들은 불교를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마치 텔레비전을 시청하듯 구경하고 있는데,

불교는 구경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이 있으면 손을 씻던지, 얼굴을 씻던지,

물 속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던지 해야

구체적으로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법의 바다로 들어와서

지혜를 얻어 건너가야 합니다.

보현명등조세간(普賢明燈照世間)이라.

보현보살의 밝은 등불을 보현명등이라고 하는데요,

불교는 대승불교에 오면서 보살승 불교를 강조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 보살이지요.

보살은 삶의 의미를 항상 내 자신과 남의 입장에서

똑같이 생각해주는 분입니다.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 사상(四相)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결국 인간은 항상 이기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남은 항상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뒤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살은 내 입장과 남의 입장을 똑같이 생각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이타 원력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원력을 중요시합니다.

대승불교 경전에 설해진 부처님은 모두 법신불이고,

법신불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자체를 의인화시켜서

사람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법신불의 설법은 불가사의해서 인간의 분별지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이 법신입니다.

『열반경』에 불신상주(佛身常主)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화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신을 말하기 때문에

부처의 몸이 항상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근본불교에서 생사해탈을 말합니다.

생사해탈이라고 하니까 당장 사는 문제가 급급한데

어떻게 생사해탈을 하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나고 죽는 생사를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고 죽는 생사는 잠들고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생사경계는 잠자고 깨어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불교의 연기법에서는 이 세상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오늘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치에서 보면 태어나는 것도 통과 과정이고,

죽는 것도 통과 과정입니다.

차를 타고 길을 지나가듯이 가는 것인데

이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입니다.

불행해도 아무렇지 않아야 하고,

행복해도 아무렇지 않아야 합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기쁨에 빠질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가 망념이 떠나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화엄대의에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 하여,

본래 모든 일에 아무 장애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기에 세상은 장애가 되지요.

하지만 텅 비어서 고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누구나 자기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비어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문제를 팽개친 것이 아닙니다.

비어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때 바로 내 고민은 끝나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절망을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최악의 절망상태에서도

최고의 희망을 찾아서 살아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명심하세요.

최악의 절망상태에서 최대의 희망을 찾아 살라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문입니다.

불법과의 인연은 아주 좋은 인연입니다.

가정 생활에서 아들·딸이 자라면 좋은 배필을 만나

인연 맺기를 바라는데, 사람과의 인연은 유위법의 인연입니다.

한정된 범위에서 제한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부처님 법은 무위법이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맺는 인연보다 부처님 법을 더 지중하고

소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절에 다니면서 신심을 닦아

그것이 훈습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처음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 그것을 결심하고,

결심한 것이 의지가 되고 행동이 일어나면서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습관을 갖습니다.

그 사람의 습관에서 성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면서 중생을

현재의 생물학적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생이란 태어날 때 수많은 인연이

모아져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그냥 그저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해서는 조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인연이 연결돼 있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처럼 중생의 생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신체는 이렇듯 역사적인 물건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역사적인 물건이 아니어서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체라는 역사적인 물건이 초역사적인

마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서양의 학자들이 불교를 접하면서 유럽에서

초기에 불교를 받아들였다면 세계의 역사는

더욱 평화롭고 전쟁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 상가 정신을 화합이라고 하는데,

우리시대에 극복해야 할 중요한 일이

바로 불화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불화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럼 어디에서부터 불화를 극복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마음속 갈등과 불화부터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야 합니다.

내 감정 잘 다스리고 편안한 마음이 되면 가족끼리

이웃끼리 불화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인생 잘 사는 것은 쉽게 말해서 생각 잘하고 사는 것입니다.

생각이 응고되거나 잘못되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자신이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져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심의 계기도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해 나갈 수 있는

돌파구도 만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