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소나무의 철학

내가 사는 반야암 주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있다.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산등성이를 올라가면서 층층이 서 있는데, 처음 이 암자를 지었을 때 무엇보다도 이들 굵은 소나무들이 주위의 경치를 살려 주는데 매우 만족해했다. 암자 이름을 짓는데도 소나무를 넣어 송진암(松眞庵)이라 부를까 하다가 반야암(般若庵)으로 했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반사정(潘師正)이 소요곡(逍遙谷)에 은거하고 살 때 그의 고준한 인품을 들은 고종이 부른 적이 있었다. 나라의 중요한 소임을 맡겨 중용할 생각으로 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반사정은 “울창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있으면 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끔 이 고사를 생각하면서 소나무를 벗하여 사는 내가 무척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위한 적이 많았다.

금년 겨울을 지내면서 나는 소나무한테서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 소나무가 참으로 훌륭한 나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보통 소나무가 목재의 가치로써 훌륭하거나 정원용 관상수로써 훌륭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어떤 거사님은 반야암 마당가에 서 있는 우람한 소나무를 보고 “스님. 이 소나무가 부잣집 정원에 서 있는 나무라면 값이 수억 원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나무의 유용한 상업적 가치를 가지고 소나무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 세속적인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어쩌면 소나무에게 큰 실례가 될 것이다.

내가 소나무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밤중이 넘어선 시간이었다. 나는 가끔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서 사색을 즐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하루의 시간은 축시(丑時)의 시간이다. 물론 이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에 깨어 책을 보거나 명상 혹은 좌선을 할 때가 자주 있다. 예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이 깨어나는 시간이 각각 따로 있다고 하였다. 하늘이 자시(子時)에 깨고, 땅이 축시(丑時)에 깨어나며 사람은 인시(寅時)에 깬다고 하였다. 천(天)·지(地)·인(人)의 삼재(三才)차례로 깨어 세상이 운행된다는 것이다. 당나라 때 고승 규봉(圭峰)스님의 좌우명에도 “인시에 일어나 할 일을 챙긴다(寅時可辦事)”고 하였다.

산에는 밤중에도 산바람이 일어난다. 특히 겨울은 칼날 같은 바람이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때가 많다. 우우우 불어오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한기가 느껴진다. 이때 소나무에도 송뢰가 인다. 하지만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이 겨울의 찬바람이 소나무에겐 가장 반가운 소식이 된다.

사실 이 때를 당하여 소나무는 자기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말하자면 소나무의 몸 단련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소나무가 혹한에 시달리며 우는 줄 알았다. 우우우 가지가 흔들리며 차가운 밤하늘을 향해 함성을 지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여러 밤을 지켜본 나는 소나무는 결코 추위에 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의 마음이 추워져서 소나무가 춥다고 생각할 뿐 소나무에겐 추위가 없는 것이다. 또 소나무는 잠이 없이 언제나 깨어 있는 나무라는 사실도 나는 알았다. 삼라만상이 고요해진 정묵(靜默)을 두고 우리는 때로 산이 잠들고 땅이 잠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산은 잠들 때가 없으며 적어도 소나무는 겨울밤을 자지 않는다. 나무의 생태로 말하면 겨울을 나면서 나이테가 생기니 나무도 동면기가 있다고 식물학적으로는 말하겠지만, 소나무와 같이 살아본 나의 경험으로는 비록 소나무가 선잠을 자는지도 모르지만, 겨울의 밤을 소나무는 자지 않고 새는 산의 불침번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소유를 떠나 산지기가 산의 주인이라면 소나무는 확실한 산의 주인이다. 소나무가 산림의 왕격이라서 주인이 아니라, 소나무처럼 확실하게 산을 지켜주는 그 무엇도 없다. 소나무를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말해왔듯이, 소나무가 있어서 산이 살아나고 소나무의 정신이 산의 미학을 꾸미는 것이다.

수도자들의 정신을 서리를 견디는 소나무에 비유해서 상송결조(霜松潔操)라 하였다. 서리를 견디는 소나무의 청결한 지조,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다. 이 소나무의 정신을 본받아 소나무처럼 살아가는 철학을 배워야 하겠다. 세상을 지조 있게 살고 고난에 물러나는 약한 의지가 아닌 추위를 모르고 사는 소나무처럼, 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기 신념을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소나무에게도 슬픔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무려 33%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곧 아열대성의 기후변화 탓에 침엽수인 소나무가 서서히 줄어들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소나무야! 어떻든 살아남아 이 강산을 끝까지 지켜다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2월 제39호

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인생을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고 비유해 말한 것은 예로부터 자주 써온 말이다. 때로는 세월을 강물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불교에서는 윤회를 강물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는 윤회라는 말의 어원인 범어 삼사라(samsara)에 ‘함께 달러간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모여 줄기를 이루어 흘러가듯이 생사의 흐름이 언제나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것이다.

강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 진행의 상태가 계속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과 함께 변해가는 무상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사바세계를 고해라 하고 중생을 괴로움의 강물 속에 빠져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불교의 종교적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말고 강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제도(濟度)라 한다. 제도라는 말은 ‘강을 건넜다’는 뜻이다. 불교의 이상을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이르는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며 범어로는 바라밀다(paramita)라 한다. 『반야심경』의 끝에 반야바라밀다주가 설해져 있는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어원의 뜻을 풀이해 보면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저 언덕으로 함께 가세. 어서 생사의 강을 건너 깨달음 이루세’의 뜻이다.

지구상의 육지에는 많은 강이 있다. 물이 모여 흐르는 강, 이 강변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 있는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강변이다. 중국에는 황하문명이 있었고 인도에는 인더스문명이 있었다.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모두 강가에서 시작된 문명이라고 역사가들이 기술해 왔다. 문명의 발상지인 강이 건너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강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강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문화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강도 다리 없는 강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은 시내에도 다리가 놓이며, 옛날에는 물을 건너기 위하여 징검다리를 놓기도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는 것처럼 인생도 건너야할 강이 있으며, 또 놓아야할 다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운명적 삶이다. 우리는 강 건너는 것을 싫어하거나 회피할 수가 없으며, 다리를 놓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인생이 갖는 모든 사연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통과 과정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인연자체도 통과하는 의식(儀式)에 불과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통과의식이요, 태어나고 죽는 것도 하나의 통과의식이다. 그리고 통과는 결국 무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달리듯이 무상 속으로 들어가 달린다는 것은 머무를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는 불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때문에 인간은 원초적인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상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영원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동정이 되며, 즐거움에 대한 소망이 된다. 이 소망 하나로 인간은 영원을 바라보게 된다.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먼 수평선을 바라보듯이 인간은 자신의 그리움을 멀리 멀리 보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아스라한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그리움이 있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도 그리움이 있다. 이 그리움이 다른 게 아니다. 강을 건너고 싶은 마음이다. 바다를 건너 수평선 너머 멀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내 존재를 엮어 흐르는 운명의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애절한 그리움, 이것이 바로 때로는 천부의 고독이 되기도 하고 몸살 나게 슬픈 눈물이 되기도 한다.

바라밀다의 정신이라는 게 있다.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성숙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이상적인 인간형인 보살들은 바라밀다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강을 건너 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로 자처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때로는 그저 사람 사이에서 강이 막혀 건너지 못하는 사이가 있을 때 다리를 놓아 준다. 어떤 때는 스스로가 다리가 된다. 자신을 밟고 강을 건너도록 다리가 되어 사람들을 저 언덕에 가게 해 준다.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강을 건너 존재의 평화를 성취시켜 주는 다리와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세기의 다리요, 세상의 다리다.

한 때 유행하던 팝송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있었다. 지금도 애창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가 지치고 힘없이 느껴질 때나

그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일 때,

내 눈물 닦아 주며 그대 곁에 있으리.

고통이 몰려와 친구마저 찾을 길 없을 때

거친 물결 위의 다리가 되어

내 그대 지켜 주리라.”

연인 사이의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참 아름답다. 인생은 모름지기 다리와 같고 나룻배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함께 고난의 강을 건너갈 수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0월 제71호

갓끈을 끊게 한 이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각 나라가 영토를 넓히기 위하여 전쟁을 많이 했던 시절이었다. 초(楚)나라 역시 많은 전쟁을 겪었다. 22대 장왕(莊王)은 나중에 춘추5패의 한 사람이 된 뛰어난 임금이었는데 한 번은 그가 궁중 안에 있는 누각에서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문무제관이 참석하여 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주흥을 즐기도록 한 것이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바람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갑자기 연회장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궁녀가 비명에 찬 목소리로 왕에게 아뢰었다.

“폐하 어서 불을 밝혀 제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잡아 주십시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제게 추행을 했습니다. 제가 그 자의 갓끈을 끊어버렸으니 어서 불을 밝혀 갓끈이 끊어진 사람을 잡아내 주십시오.”

장왕이 총애하던 애첩인 궁녀 하나가 이렇게 왕에게 고했던 것이다.

이 때 장왕은 뜻밖의 영을 내렸다. “불을 켜지 말라. 그리고 이 자리에 갓을 쓰고 참석한 제관들은 모두 갓끈을 끊으시오. 갓끈을 끊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불을 밝혀 문책하겠소.”

의외의 영을 내린 장왕은 애첩의 하소연을 듣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도량 넓은 마음으로 덕을 발휘해 애첩을 희롱한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해버렸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생겨난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절영지연(絶纓之宴)’이다. ‘갓끈을 끊게 했던 연회’라는 뜻이다. 왕의 너그러운 아량에 의해 누군가가 신변의 위기를 모면하였던 것이다.

3년의 세월이 지났다. 초의 장왕은 이웃 진(陣)나라와 다시 큰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세가 크게 불리해져 장왕은 드디어 적군에 포위되어 패망직전에 몰려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 때였다. 적진을 뚫고 비호처럼 달려 나오는 장수 하나가 있었다. 휘하의 병졸을 이끌고 사력을 다하여 왕을 구출하고 적을 격파하는 신출귀몰의 용맹을 떨치는 장수의 덕으로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서 전쟁은 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장왕은 이 장수가 너무나 고마웠다. 친히 장수를 불러 치하를 하였다. 평소에 왕이 가까이 자주 보던 장수가 아닌 낯이 설은 장수였다. “그대 덕분에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내가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고 치하하자 장수는 고개를 숙이며 조아렸다. “3년 전 저를 살려 준 은혜에 보답코자 했을 뿐입니다.”

이 장수가 바로 3년 전 절영지연에서 왕의 애첩을 희롱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름이 장웅(張雄)으로 알려진 장수였다.

세상이 야박하게 돌아가 관용과 용서가 없어지는 오늘의 세태에 큰 귀감이 될 수 있는 옛 이야기이다. 사람이 마음을 잘 쓰면 반드시 남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감동을 받은 마음은 의리를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덕을 베풀 때 자신의 인간성이 성숙되고 타인에 대한 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며느리가 나귀를 탔는데 시어머니가 고삐를 끈다”는 중국 수산성념(首山省念 : 926~993)선사의 공안이 있다. 어른인 시어머니를 태우고 젊은 며느리가 고삐를 잡아야 옳은 일인데 반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본래의 성품에서 볼 때 부처나 중생이 똑같아 높고 낮은 차이가 없다는 뜻을 드러낸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숨은 뜻이 있다. 그것은 상식에 안주한 윤리적 질서보다 누가 감동을 주는 마음을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당연히 시어머니를 나귀에 태우고 며느리가 고삐를 잡고 나귀를 몰고 가야 하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몸이 좋지 않아 아픈 기색을 하고 있는 임산부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가 걱정을 해서 며느리를 나귀 등에 태우고 의원 집에 진찰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일이 된다. 며느리를 걱정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장면이라면 분명 젊은 며느리를 나귀에 태운 시어머니가 고맙기만 한 것이다. 감동을 주는 이 마음이 보배가 되는 것이지 나쁜 업을 짓는 마음이 어찌 보배가 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보배가 되도록 쓰는 일 이것이 바로 부처라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을 잘 쓰는데 있어서는 때로는 도식적이고 상식적인 관념을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상(相), 곧 관념적 고집에서 벗어나야 마음을 넉넉하게 쓸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마음을 넉넉하게 쓰고 살아야 한다. 언제나 마음의 여유를 두고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막히지 않는 시야처럼 그릇된 생각에 막히지 않고 살아야 한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2월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