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인생을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고 비유해 말한 것은 예로부터 자주 써온 말이다. 때로는 세월을 강물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불교에서는 윤회를 강물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는 윤회라는 말의 어원인 범어 삼사라(samsara)에 ‘함께 달러간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모여 줄기를 이루어 흘러가듯이 생사의 흐름이 언제나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것이다.

강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 진행의 상태가 계속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과 함께 변해가는 무상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사바세계를 고해라 하고 중생을 괴로움의 강물 속에 빠져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불교의 종교적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말고 강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제도(濟度)라 한다. 제도라는 말은 ‘강을 건넜다’는 뜻이다. 불교의 이상을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이르는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며 범어로는 바라밀다(paramita)라 한다. 『반야심경』의 끝에 반야바라밀다주가 설해져 있는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어원의 뜻을 풀이해 보면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저 언덕으로 함께 가세. 어서 생사의 강을 건너 깨달음 이루세’의 뜻이다.

지구상의 육지에는 많은 강이 있다. 물이 모여 흐르는 강, 이 강변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 있는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강변이다. 중국에는 황하문명이 있었고 인도에는 인더스문명이 있었다.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모두 강가에서 시작된 문명이라고 역사가들이 기술해 왔다. 문명의 발상지인 강이 건너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강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강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문화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강도 다리 없는 강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은 시내에도 다리가 놓이며, 옛날에는 물을 건너기 위하여 징검다리를 놓기도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는 것처럼 인생도 건너야할 강이 있으며, 또 놓아야할 다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운명적 삶이다. 우리는 강 건너는 것을 싫어하거나 회피할 수가 없으며, 다리를 놓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인생이 갖는 모든 사연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통과 과정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인연자체도 통과하는 의식(儀式)에 불과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통과의식이요, 태어나고 죽는 것도 하나의 통과의식이다. 그리고 통과는 결국 무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달리듯이 무상 속으로 들어가 달린다는 것은 머무를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는 불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때문에 인간은 원초적인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상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영원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동정이 되며, 즐거움에 대한 소망이 된다. 이 소망 하나로 인간은 영원을 바라보게 된다.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먼 수평선을 바라보듯이 인간은 자신의 그리움을 멀리 멀리 보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아스라한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그리움이 있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도 그리움이 있다. 이 그리움이 다른 게 아니다. 강을 건너고 싶은 마음이다. 바다를 건너 수평선 너머 멀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내 존재를 엮어 흐르는 운명의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애절한 그리움, 이것이 바로 때로는 천부의 고독이 되기도 하고 몸살 나게 슬픈 눈물이 되기도 한다.

바라밀다의 정신이라는 게 있다.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성숙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이상적인 인간형인 보살들은 바라밀다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강을 건너 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로 자처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때로는 그저 사람 사이에서 강이 막혀 건너지 못하는 사이가 있을 때 다리를 놓아 준다. 어떤 때는 스스로가 다리가 된다. 자신을 밟고 강을 건너도록 다리가 되어 사람들을 저 언덕에 가게 해 준다.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강을 건너 존재의 평화를 성취시켜 주는 다리와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세기의 다리요, 세상의 다리다.

한 때 유행하던 팝송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있었다. 지금도 애창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가 지치고 힘없이 느껴질 때나

그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일 때,

내 눈물 닦아 주며 그대 곁에 있으리.

고통이 몰려와 친구마저 찾을 길 없을 때

거친 물결 위의 다리가 되어

내 그대 지켜 주리라.”

연인 사이의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참 아름답다. 인생은 모름지기 다리와 같고 나룻배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함께 고난의 강을 건너갈 수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0월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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