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영국의 데이빗이라는 시인은 “인생은 세월의 강물 속에 꿈을 낚는 낚시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잠을 자다 꾸는 꿈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사는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찾아 얻으려는 끈질긴 노력을 쉬지 않는다. 설사 육체적 능력이 부족해 물리적 힘을 쓸 수 없을 때에도 마음속에는 누군가의 도움으로라도 자기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 없이 사람의 마음은 항상 소원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다. 비록 당장에 실현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언잰가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두고두고 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듯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만족시켜 줄 좋은 일들이 내게 나타나기를 바란다.

물론 이러한 것을 욕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기본적인 다섯 가지 욕망이 있다. 첫째 음식에 대한 욕망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배가 고프면 결국 생존의 위협마저 느끼게 된다. 먹어야 하는 것은 본능 중의 본능인 것으로 모든 생명체의 일차적인 욕구이다. 두 번째는 이성간에 정을 나누고자 하는 성적인 욕망이 있다. 이는 생식을 전제로 한 본능이지만 때로는 생식과 관계없는 맹목적 욕망으로 본능적 쾌락을 느끼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는 수면에 대한 욕망이다. 몸이 피로할 때 잠을 자야하는 생리적 체질을 몸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면을 취하는 시간길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육체는 잠을 통해 신진대사의 신체적 컨디션을 조절한다. 넷째는 재물에 대한 욕구이다. 물질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생활의 발달과 비례해 나타난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입고 삶의 터를 마련해 주거지를 정해 집을 짓고 사는 것에서부터 문화가 발달될수록 재물에 대한 소유욕은 점점 커져가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의 세태에서 볼 때 소유의 문제가 존재의 문제를 앞지르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다섯째는 명예의 욕망이 있다. 내가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은 남의 의식하는 상대적 비교에서 열등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천대받고 싶지 않고 존중 받고 싶어 하는 사적인 입장확보를 위해 남과의 경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세속적 삶의 목표가 설정된다. 또한 이것을 추구해 얻어가는 쾌락을 사람은 몹시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속의 오욕락(五慾樂)이 인생을 만족시켜 주는 영원한 가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무상한 것이라 나중에 허무하게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하는 것이다. 순간의 쾌락은 그 이후의 쾌락을 상실해 버린다. 인생에는 영원을 기약해 가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래된 사과나무에서 잘 익은 사과가 자란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사과나무 옆에 떨어졌다. 어린 사과나무가 잘 익은 사과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과님. 당신도 하루 빨리 썩어서 나처럼 싹을 틔어 나무로 자랐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잘 익은 사과가 말했다.

“이 바보야. 썩는 게 좋으면 너나 썩어. 그래 네 눈에는 내가 얼마나 빨갛고 곱고 단단하고 싱싱한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난 썩기 싫어. 즐겁게 살고 싶어.”

“하지만 당신의 그 젊고 싱싱한 몸은 잠시 빌려 입은 옷에 불과해요. 거기에는 생명이 없어요. 당신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생명은 오직 당신 안에 있는 씨 속에 있어요.”

“씨는 무슨 씨가 있다는 거야. 바보같이!” 잘 익은 사과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기의 내부에 영적인 생명이 깃들여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동물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잘 익은 사과와 같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사람도 사과와 마찬가지로 나이와 함께 시들어, 자신의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육체가 쇠약해지면, 진실이 쉬지 않고 성장하는 씨앗과 같은 참된 생명의 존재가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예 처음부터 언젠가는 사멸해버리는 생명이 아니라 쉬지 않고 성장하며 소멸하는 일이 없는 생명에 의지하여 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진실한 삶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기 때문에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의 현상을 바꿀 뿐, 결코 삶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당나라 때 사대부였던 이고(李翶)라는 사람이 약산유엄(藥山惟儼)선사를 찾아와 도를 물었다. 약산이 대답하기를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다 (雲在靑天 水在甁)”고 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6월 제67호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같이

사람 사는 기분이 날씨처럼 변한다고 한다. 맑게 개인 청명한 날이 있는가 하면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는 날이 있다. 바람이 몹시 불거나 황사가 끼는 날도 더러 있다. 물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날도 있다. 이처럼 오늘은 즐겁다가 내일은 슬프고 또 다른 날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일이 생겨 하루하루의 생활 감정에 변화가 오면서 살아가는 세월이 엮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 사는 일에는 언제나 애환이 섞인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신이 날 때도 있고 의기소침하여 매사에 의욕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노래에 박자와 리듬이 있는 것처럼 사람 사는 생활에도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리듬과 박자가 있다. 이것을 잘 조절하고 맞춰가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이다.

수행자를 경책하는 말에 ‘바람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순간의 기분에 치우쳐 자기중심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또 외부의 자극에 초연해지라는 뜻이 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바깥 경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8가지가 있다고 한다. 내게 이익이 돌아올 때와 반대로 손해가 돌아올 때가 내 마음이 흔들리는 2가지 경우이다. 또 남이 나를 직접적으로 칭찬을 하거나 비방을 할 때가 2가지가 된다. 우쭐거려지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경우로 면전에서 직접 당하는 수가 있고 내가 없는데서 칭찬하고 비방한 것이 제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올 때도 우리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리고 괴롭고 즐거운 경우에도 마음은 흔들려 깊은 고민을 하거나 들떠버리는 수가 생긴다. 이를 팔풍(八風)이라 하여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마음이 되라고 하였다. 감정의 동물인 사람이 어찌 상황에 따른 느낌이나 기분이 없으랴마는 마음의 정중(正中)함을 잃지 말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꽃바람 물결 속에 일난풍화(日暖風和)의 계절이 되어 한동안 상춘의 인파가 명산대찰을 비롯한 명승지로 몰리고 있더니 어느새 초여름의 기온이 되어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신록이 번지는 산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 내가 살아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사람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괴로워 할 일이 없고 고민할 것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긴 제나라 경공(景公)은 우산(牛山)에 올라갔다가 지는 해를 보고 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연의 심미(深味) 속에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나는 없어지고 물아가 하나가 된 자연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다만 경공은 우산에서 바라본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 보지 못하고 언젠가 죽어 이 세상을 떠날 것이 슬퍼 울었다는 것이다.

무문(無門)선사는 사시송(四時頌)을 읊어서 사람들을 달랬다.

“봄에는 온갖 꽃 피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가을에는 달이 좋고 겨울엔 흰 눈이 있다. 부질없는 생각 가슴에 담아 두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인생은 올 수 없다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문제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번뇌에 물들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느덧 사람의 마음은 중생의 업 속으로 들어와 잘못된 생각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는 일에 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면서 근심 걱정을 일부러 하고 탐 진 치 삼독을 이기지 못하여 불만에 빠져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시절 인연이 있다. 한 해에 사계의 순환이 있는 것처럼 삶에도 굴곡이 교차되는 시간의 내왕이 있다. 해가 뜨면 낮이 오고 해가 지면 밤이 오는 이치가 시절인연이다. 배휴(裵休)가 쓴 청량국사의 비명(碑銘)에 “태양도 밤의 어둠은 없애지 못하고 자모(慈母)도 죽은 자식의 시신을 곁에 두지 못한다 (大明不能破長夜之昏 慈母不能保身後之子)”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절인연을 관찰하라는 말씀을 남겼다. 하루 세끼 때를 맞추어 밥을 먹듯이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온다는 것이다. 밝은 시간이 오고 어두운 시간이 오는 것처럼 좋은 일이 오는 수도 있고 궂은 일이 오는 수도 있다. 궂은 일은 장애를 만나 시련을 겪는 것이다. 이때를 부처님은 달이 구름에 가려 빛을 비추지 못하는 때라 하였다. 동시에 내 마음에 어둠이 깃들어 심지가 밝지를 못하는 때이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나쁜 상태가 되어 구름 낀 하늘처럼 되어 버린다. 화창한 생기가 사라지고 풀이 죽어 회색의 얼굴빛이 되기가 일쑤다. 가장 불행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처럼 염세적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이리하여 행복을 불행으로 보는 전도된 착각이 마음을 지배해 버리는 것이다.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 살아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아라.”

모두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말씀들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

고향을 찾는 마음

민속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 귀성 인파가 전국의 고속도로를 꽉 메우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잠시 고향에 대한 추억을 생각해 본다. 우리 같은 출가한 사람에게는 고향을 찾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고향은 가슴 속에 언제나 남아 있다. 사람에게 고향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태어나서 처음 이 세상의 빛을 본 곳이 고향이다. 부모의 품에 안겨 돌을 지내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올리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던 고향. 지구가 넓고 도처에 사람 사는 곳이 많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한 것이 어디에 있던가. 인간은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라는 것은 중생세계에 있어 인연이 맺히는 자리이며, 고향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자리이다. 말하자면 내 인연이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된 곳이 고향이 갖는 의미이다. 시간이 갖는 의미의 시작은 결과의 성취를 이룬 근본인연이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게 된 것은 고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지리적 근본배경이 되어준 고향의 은혜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내 정서의 보금자리인 고향이 있기 때문에 외로움도 달랠 수 있고 슬픔도 달랠 수가 있다. 고향이 있다는 생각만 하여도 스스로 위안이 되고도 남는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지리적 장소인 고향이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쓰는 예가 있다. ‘능엄경(楞嚴經)’에는 중생이 나고 죽는 생사의 윤회를 고향을 떠난 ‘객지 생활’로 비유한다. 즉, 사람의 일생은 여행자가 여로 중에 하루를 묵는 숙박과 같다는 것이다. 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나간 사람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해가 져 밤이 되었을 때 여관 같은 곳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는 시간이 한 생애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은 저기서 묵고 하는 것이 금생과 내생의 생애라는 말이다. 세세생생을 계속하는 것은 객지 생활을 전전한다는 뜻이 된다.

‘가향로(家鄕路)’라는 말이 있다.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란 뜻이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길처럼 윤회를 벗어나 해탈, 열반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 고향길이다. 가슴 속에 일어나는 영원한 향수는 이 고향길을 찾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세 개의 고향을 말하기도 한다. 하나는 내가 태어난 곳으로 명절 때 찾아가는 어릴 때 살던 정든 곳이다. 언덕이 그립고, 산고개가 그립고, ‘남쪽바다 파란 물’이 그리운 내가 태어난 아름다운 곳, 그렇게 고향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공간 다음에는 천륜의 고향을 이야기 하는데, 나를 낳아준 부모를 고향이라 한다. 부모가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고향이 되어버린다. 고향은 부모의 품과 같은 것이며, 부모의 품은 언제나 효의 본고장이 되어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고향이 있다. 세 번째 고향인 이 고향은 문학적으로 말하면 영혼의 고향이다. 이 세상 인연이 맺어지기 전의 시공을 초월해 있는 생명실상의 고향이다. 곧 내 마음의 성품, 불성佛性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정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고향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자리다. 영원을 잉태하고 무한을 잉태해 있는 진여眞如의 그 자리가 우리들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 생각은 이 세 가지 고향의 개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고향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이 고향생각이 나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는 생각의 샘물이다. 생각의 원천이 고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한 번쯤 깨달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향 찾아 가는 명절의 길처럼 내 인생의 길도 고향 길을 향하는 여로이다. 언제 쯤 영혼의 고향에 도착할 것인가?

君自故鄕來(군자고향래)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

應知故鄕事(응지고향사) 고향의 일 잘 알고 있겠군요.

來日綺窓前(내일기창전) 떠나오던 날 우리 집 비단 커턴 쳐진 창 앞에

寒梅着花未(한매착화미) 추위 겪던 매화가 피었던가요.

시의 부처(詩佛)라고 불리던 왕유(王維)의 시이다. 이 시에서의 고향은 무한한 뜻을 상징하고 있다. 고향 소식을 묻는 말이 ‘매화가 피었더냐?’는 말이다. 매화는 고향 소식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매화꽃이 필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0월 1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