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보다 진품을 찾는 세상이라야

산업사회가 시작되고부터 자본주의가 발달해 물품의 소유욕구가 대단히 높아진 나머지, 좋은 물품을 갖는 것이 명예 못잖은 자기만족 내지 자랑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ꡐ소유냐? 존재냐ꡑ하는 에리히 프롬의 책이 나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삶의 목적이 소유량을 늘려가는 데에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 되어버렸다. 상업주의에 있어서도 고급 메이커라야 상권(商圈)의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시 되고 있다. 물질이 고급화 된다는 것은 상품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므로 반기고 환영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물질의 고급화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비례적으로 볼 수 없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오히려 반대로 물질에 지나치게 탐착할 때 정신적 오염이 더욱 심해, 삶의 질은 그만큼 타락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소위 명품족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현대사회의 고급품 우선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나 아무리 명품을 쓰고 사는 세상이라도 정신 수준이 따라가지 못하면 명품족이 얼마든지 하품족이 되어버리는 결과가 올 것이다. 명품이란 글자 그대로 이름난 물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품이지만, 이를 통해 다분히 허세를 부리려는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숨어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사실 내사 쓰는 물건이 질이 좋고 실용적이면 그것으로 사용가치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을 선택하려는 선호도가 왜 그리 높은 것일까? 아마 그것은 소유했다는 자기 만족도가 자기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현대의 생리는 우상주의가 그 극을 이루어 어떻게 하면 사회적 지명도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데로 쏠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론에 나오는 바와 같이 종족의 우상에서 동굴의 우상으로, 다시 시장의 우상에서 극장의 우상으로 우상의 대상이 변해와 종교적이고 철학적이었던 고대나 근대의 우상과는 달리 사회적 우상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우상이란 대중에게 어필하여 인기를 얻어 유명해지고자 하는 지극히 속된 욕구이다. 이것 때문에 자기나 자기 소유의 주가를 어떻게 하면 올릴까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 필요이상의 선전과 홍보로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가고 있다. 신문지 마다 광고용 전단이 끼어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거리마다 선전용 플래카드와 벽보들이 어지럽게 나부끼고 있다.

과장되거나 거짓된 홍보용어에 속고 사는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천박한 상업주의가 너무나 판을 치고 있다. 불교의 용어를 빌려 해석하자면 너무나 상(相)을 내면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상없이 살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이 아예 무색해져 버린 판국이다.

이러한 폐단이 인간성 유린을 예사로 하고 물질적 이익추구에만 집중되어 물신론(物神論)을 만들어 내면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건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정말 허풍으로 사는 세상 같고 거품 같은 세상이 되었다. 자칫 자기중심을 잃고 허둥대기 일쑤며 가만히 있으면 뒤떨어지고 소외된다고 생각하고 정관할 여유를 잃어버린다.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이 없어지고 가식과 위선이 득실거리며 어디까지나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살려고 한다.

공자님도”교언영색은 어짊(仁)이 없다”는 말을 하였지만 어질지 못한 상태로 세상은 자꾸 조작만을 거듭하니 이것 또한 시대의 병이다. 사람이나 물건이 명품이 되려하고 명품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한번쯤 명품을 추방하고 차라리 진품을 찾으려는 사회적 운동이 일어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명품은 요란스럽고 시끄럽지만 별로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비록 흥에 도취된 박수를 받겠지만 인기가 내려가면 그만인 것이다. 진품은 소박하고 무심하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묵묵히 제할 일만 하고 있는 바보와 같다. 인기 떨어질 걱정은 아예 없다. 그러나 진품이라야 언젠가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유명하지 않아도 진품이 되면 언젠가 그 가치가 명품을 능가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도 진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찾아질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 55호

멀리 보고 살아야지

사람이 사는 한 생애의 기간을 일기무상(一期無常)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무상을 말할 때 찰나(刹那)무상과 일기무상의 둘로 설명을 한다. 이 무상이라는 말은 시간이 짧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순간의 일이란 의미에서 무상을 붙여 쓰기도 한다. ꡒ세상만사가 무상사다ꡓ고 할 때의 무상은 ꡐ덧없다ꡑ는 뜻과 함께 ꡐ순간에 불과한 일ꡑ이라는 뜻을 가진다.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없어지는 것, 이것이 모든 현상계를 단적으로 파악할 때 쓰는 수식어다.

그런데 무상이란 존재하던 사물이 없어진다든지 전성을 누리던 사람이 몰락한다든지 하는 상황퇴보에서 느끼는 감정의 표현으로 곧잘 쓰이는 말이지만, 원래는 생각이 움직이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염기염멸(念起念滅)의 생멸심을 말한다. 사념처(四念處)의 관법(觀法)에서 관심무상이 나온다. 마음을 무상한 것으로 보란 말이다. 특히 중생의 마음은 번뇌가 일어나 마음이 고요할 때가 없이 마치 파도치는 물결처럼 항상 출렁거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념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자꾸만 다른 생각으로 옮아가면서 생각과 생각이 상속된다. 그리하여 물이 흘러가면서 이어지듯이 의식의 흐름이 생겨 시간과 공간에 스며든다.

인간의 의식이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경계를 접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에 와서는 신경이 예민해져,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염력 곧 생각의 힘이 약해진다. 다분히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1차신경의 피상적인 생각만으로 현실의 제반사항을 안이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짙다. 때문에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이 많이 일어난다. 더구나 모든 것이 스피드 위주로 가속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물리적 기능이 인간의식의 템포를 빠르게 하므로 인스턴트의 찰나주의가 횡행한다. 급기야 순간에 죽고 순간에 산다는 즉흥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내일은 내일 가서 보자며 오늘의 원인이 초래할 내일의 결과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자포자기하는 성미를 부리며 될 대로 되라고 채근을 한다. 이러므로 감정을 순화시키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심리적 상황으로 볼 때 현대의 불행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사람은 멀리 보려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환경이 좋건 나쁘건 멀리 보고 생각하면 모든 상대적 차별이 좁혀지게 된다. 행복과 불행의 대차도 멀리 보고 생각하면 줄어든다. 아무리 한 평생 호의호식하는 부의 복이 있다 해도 일회적인 한정된 생의 것이며, 그것이 세세로 이어지려면 우선은 다음 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언제나 삼세를 함께 관찰한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똑같이 본다고 한다.

기실 모든 존재는 삼세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오늘을 산다는 것이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는 많아지는 것이며 나이가 많아지면 그 속에 많은 과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장수왕(長壽王)의 이야기가 있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다 망한 장수왕이 다른 나라로 도망을 하여 광대처럼 악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아들 장생동자를 낳았다. 이 아들이 매우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 장차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역량이 엿보였다. 장수왕을 멸망시킨 이웃나라 가사국왕이 후환이 두려워 장수왕을 죽인다. 임종 순간에 장수왕이 아들 장생 동자에게 이 말을 남긴다.

“원수를 갚지 말라. 멀리보고 살아라.”

원한은 복수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다. 복수는 또 복수를 불러오는 것, 세월이 흘러 멀리 멀리 지나가면 사랑도 미움도 함께 용해되어 나중에는 증발되어 사라진다. 다만 한 생각에 마음을 안정시키면 일념이 만년이 되어 간다. 한 생각 일념이 만년이 되어 가면 무심에 합해진다. 무심은 무상을 뛰어 넘어 영원을 기약한다. 멀리 보고 사는 것이 오래 오래 사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0월 제 47호

망두석에 곤장을 치다

옛날에 비단 장수가 있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다니며 비단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 봄 그는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외딴 마을 뒷산으로 길을 넘어 가던 중 누구의 묘소 잔디 위에 앉아서 잠시 쉬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자신의 비단 봇짐을 내려놓고 춘곤증에 시달리다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큰 일이 났다. 깨어 보니 그의 비단 봇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 잠든 사이에 누가 비단 봇짐을 통째로 훔쳐 가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비단 장수는 관가에 가 사또에게 진정을 올려, 이 사실을 말하고 자기의 비단 봇짐을 훔쳐간 도둑을 잡아 주기를 청했다.

사또가 물었다

“누군가 그대가 잠든 사이에 비단을 훔쳐 갔다면 오가던 사람 중에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본 사람이 있을 터인데 졸기 전이나 후에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생각해 보아라. 목격자라도 있어야 훔쳐간 사람을 잡을 단서가 생길게 아닌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묘소에 서 있던 망두석이나 보았을까?”

비단 장수는 본 사람을 생각해 말해보라는 사또의 재촉에 엉뚱하게 무덤가에 서 있던 망두석을 들먹였던 것이다.

이때 사또가 이방을 보고 추상같은 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 비단 장수가 비단 잃은 곳에 가 망두석을 잡아 오너라.”

이리하여 동원 마당에 이상한 진풍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사또가 망두석을 눕혀 놓고 곤장을 치면서 비단 장수의 비단 봇짐 훔쳐간 사람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 하였다. 아니 사람도 아닌 망두석을 취조하면서 곤장을 치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인가? 동원 안의 관속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이 사또의 어처구니없는 망두석 곤장 치는 일에 대하여 영문을 몰라 하다가 급기야 사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또는 이 취조를 다음날까지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 저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동원 마당으로 몰려와 빙 둘러서 구경을 하면서 해괴한 희극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또를 비웃는 조소의 말을 하면서 사또가 미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을 벌이느냐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또를 흉보았다.

이때 사또가 또 한 번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나를 조소하고 미쳤다 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들여라. 본관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죄로 다스리겠다.”

이 명 한마디에 그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원의 옥방에 갇히게 되었다. 사또의 망두석 곤장 치는 것을 어이없다고 조소하던 많은 사람들이 옥방에 구속되어 버린 것이다.

사또는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방을 시켜 찾아가서 각자 가족이 있는 집에 연락하여 비단 한 필씩을 구해오면 풀어주겠다 하라 하였다. 다음 날 갇혀 있는 사람들의 가족이 비단 한 필씩을 가져와 갇혀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사또는 비단 장수에게 도둑맞은 자기의 비단을 고르라 하여 그 비단 사온 곳을 추적하여 비단 훔쳐간 도둑을 결국에는 잡아내게 되었다. 망두석을 곤장을 쳐 때린 일이 도둑을 잡는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이었다.

사람의 일이 때로는 지혜를 감추고 있을 때는 어리석게 보이는 수가 있다. 사또는 처음부터 도둑을 찾아낼 방도를 찾기 위하여 망두석을 때리는 어리석은 일을 고의로 한 것이었다.

불교의 수행이나 신앙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숨어 있는 수가 있다.

방편으로 실시하는 여러 가지 행위 자체가 망두석 곤장 때리는 일과 같은 것처럼 어리석게 보이고 조소당할 일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참뜻을 안다면 어리석을 것이 아니고 조소당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진리를 찾는 방편과 법을 쓰는 방편에 있어서 상황에 따른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하늘이 개이면 햇빛이 나고 비가 내리면 대지가 젖는 것처럼 인연을 따르다보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연 속에서 내가 찾아 얻어내야 할 것은 지혜와 복덕이 갖춰진 공덕이라 할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3월 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