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비단 장수가 있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다니며 비단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 봄 그는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외딴 마을 뒷산으로 길을 넘어 가던 중 누구의 묘소 잔디 위에 앉아서 잠시 쉬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자신의 비단 봇짐을 내려놓고 춘곤증에 시달리다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큰 일이 났다. 깨어 보니 그의 비단 봇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 잠든 사이에 누가 비단 봇짐을 통째로 훔쳐 가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비단 장수는 관가에 가 사또에게 진정을 올려, 이 사실을 말하고 자기의 비단 봇짐을 훔쳐간 도둑을 잡아 주기를 청했다.
사또가 물었다
“누군가 그대가 잠든 사이에 비단을 훔쳐 갔다면 오가던 사람 중에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본 사람이 있을 터인데 졸기 전이나 후에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생각해 보아라. 목격자라도 있어야 훔쳐간 사람을 잡을 단서가 생길게 아닌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묘소에 서 있던 망두석이나 보았을까?”
비단 장수는 본 사람을 생각해 말해보라는 사또의 재촉에 엉뚱하게 무덤가에 서 있던 망두석을 들먹였던 것이다.
이때 사또가 이방을 보고 추상같은 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 비단 장수가 비단 잃은 곳에 가 망두석을 잡아 오너라.”
이리하여 동원 마당에 이상한 진풍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사또가 망두석을 눕혀 놓고 곤장을 치면서 비단 장수의 비단 봇짐 훔쳐간 사람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 하였다. 아니 사람도 아닌 망두석을 취조하면서 곤장을 치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인가? 동원 안의 관속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이 사또의 어처구니없는 망두석 곤장 치는 일에 대하여 영문을 몰라 하다가 급기야 사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또는 이 취조를 다음날까지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 저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동원 마당으로 몰려와 빙 둘러서 구경을 하면서 해괴한 희극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또를 비웃는 조소의 말을 하면서 사또가 미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을 벌이느냐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또를 흉보았다.
이때 사또가 또 한 번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나를 조소하고 미쳤다 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들여라. 본관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죄로 다스리겠다.”
이 명 한마디에 그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원의 옥방에 갇히게 되었다. 사또의 망두석 곤장 치는 것을 어이없다고 조소하던 많은 사람들이 옥방에 구속되어 버린 것이다.
사또는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방을 시켜 찾아가서 각자 가족이 있는 집에 연락하여 비단 한 필씩을 구해오면 풀어주겠다 하라 하였다. 다음 날 갇혀 있는 사람들의 가족이 비단 한 필씩을 가져와 갇혀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사또는 비단 장수에게 도둑맞은 자기의 비단을 고르라 하여 그 비단 사온 곳을 추적하여 비단 훔쳐간 도둑을 결국에는 잡아내게 되었다. 망두석을 곤장을 쳐 때린 일이 도둑을 잡는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이었다.
사람의 일이 때로는 지혜를 감추고 있을 때는 어리석게 보이는 수가 있다. 사또는 처음부터 도둑을 찾아낼 방도를 찾기 위하여 망두석을 때리는 어리석은 일을 고의로 한 것이었다.
불교의 수행이나 신앙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숨어 있는 수가 있다.
방편으로 실시하는 여러 가지 행위 자체가 망두석 곤장 때리는 일과 같은 것처럼 어리석게 보이고 조소당할 일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참뜻을 안다면 어리석을 것이 아니고 조소당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진리를 찾는 방편과 법을 쓰는 방편에 있어서 상황에 따른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하늘이 개이면 햇빛이 나고 비가 내리면 대지가 젖는 것처럼 인연을 따르다보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연 속에서 내가 찾아 얻어내야 할 것은 지혜와 복덕이 갖춰진 공덕이라 할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3월 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