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씨앗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속담은 말 한 마디의 공덕이 크고 내가 한 말은 비밀이 되지 않고 누구에겐가 전해진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천사람 만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를 음성교체라고 말한다. 말로써 의사소통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쓰는 언어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소리로써 신호를 보내 의사를 전달한다고 한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을 엿보게 되고 또한 말로써 그 사람의 지식을 알 수 있다.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는 서로의 가슴을 열고 많은 의미를 나누는 기쁨이 있기도 하다. 또한 밖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행위 가운데 말이 항상 먼저 나온다. 불교의 교리에서는 생각도 하나의 행위로 보지만 이것은 남에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현이 되지 않는 무표업(無表業)이라 하고, 입으로 하는 말과 신체적 행위는 표업(表業)이라 한다. 특히 말은 주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신체적 행위는 남과 관계없이도 일어나지만 말이란 언제나 남과 관계된 상황에서 나온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가 되고 결국 남의 말을 이러쿵저러쿵 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말로 인해 좋아지고 말로 인해 나빠지는 수가 너무나 자주 있다. 말 한마디가 원인이 되어 원수처럼 되어버리고 말 한마디에 은혜를 입어 은인이 되기도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말의 실수에서 남의 미움을 받게 되고 두고두고 원망을 듣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내가 뱉은 말 한마디가 그대로 업종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흔히 말이 씨가 된다고 하듯이 음성의 소리가 사라져도 한마디 말이 싣고 있는 업감(業感)의 씨앗은 없어지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천년도 가고 만년도 간다. 가령 우리가 기원전에 한 누구의 말을 역사를 통해서 오늘도 알 고 있는 것처럼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전파된다. 더구나 정보사회에서 내가 한 말은 그것이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되든 말든 하나의 정보 소스가 된다. 그런데 이 정보가 남에게 전달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정확성이다.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가 틀리면 그것은 당연히 사람들을 오해하게 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하거나 사실인 것을 사실이 아니라 하여 틀린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짓말을 가지고 참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 사회는 불신이 조장되고, 설사 누가 진실한 말을 한다 하여도 믿을 수 있는가에 의문이 생겨 반신반의하면서 확신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고 넌센스적인 사태가 되어버린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오히려 모르는 것만 못하다. 틀린 정보를 주는 것은 남의 생각을 잘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병을 옮기는 것과 같다.

『논어』에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ꡒ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면 아는 것이다ꡓ라는 말을 했다. 남에게 잘못된 것을 전하여 오해의 소지를 주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물론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해서도 안 되지만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해서도 안 된다. 사람 사이에 믿음을 주는 것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한자의 믿을 ‘신(信)’ 자를 자해(字解)하면 사람 ‘인(人)’변에 말씀 ‘언(言)’이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사실대로 말을 할 때 믿어진다는 뜻이다. 믿지 못하는 불신(不信)이란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언어도 생명이 있다면 참말이라야 생명이 있는 것이며 거짓말은 죽은 말이 된다. 말을 살리는 것이 바로 사회도덕을 세우는 일이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목하 줄기세포에 관한 과학계의 이야기가 나라 안팎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 같다. 연일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하여 전대미문의 설왕설래를 초래한다. 안타까운 것은 같이 공동연구를 했다는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면서 하는 말이 다르다는 점이다. 국민들을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세포의 실험에 앞서 말을 바로 하는 언어의 실험부터 해야 할 것이라는 핀잔을 하는 사람도 있다. 윤리적 가치 부재 속에서의 과학 만능은 병을 주고 약을 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말의 진실성이 그 사람의 인격이요 마음씨이다. 사람은 씨가 좋아야 한다. 마음씨에서 말씨, 솜씨 등 우리말의 씨가 결국 업종자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월 제62호

말없는 말

사람이 가끔 말에서 짜증을 느끼면서 “말 많은 세상”이라고 세상 흉을 보는 수가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방이 하는 말에 싫증이 나면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하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말이란 인간의 의사를 소통시키는 수단이지만 말 한마디가 잘못되면 큰 곤욕을 치르거나 엄청난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수도에 임하는 자들을 경책할 때 우선 말부터 조심하라고 이른다. “입이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문이니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口是禍門 必加嚴守)”고 하였다. 사실 말이란 순간의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내뱉어지는 수가 많기 때문에 자칫 에러를 범하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교양도 말씨에서부터 밖으로 나타난다. 물론 말의 필요성이 있으므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를 음성교체(音聲敎體)의 세계라 한다. 곧 말이 가르침의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고부터 자라면서 제일 먼저 말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언어에 길들여져야 문화수용도 잘 할 수 있다. 오늘날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쏟는 학습의 열이 말을 배우는데 있을 것이다. 자기 나라 말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여, 세계화를 따라가려면 외국어를 알아야 한다면서 제1외국어, 제2외국어 하면서 외국어에도 번호를 붙여가면서 공부하고 있다. 해마다 많은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한다고 외국으로 간다고 하지 않는가? 말 잘하고자 하는 공부에 인생의 태반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언론문화가 발달하여, 소위 매스컴이 사회의 여론을 주도해가는 판국에서는 매일 같이 언어의 홍수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고 사는 꼴이다. 때문에 침묵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말의 유용성에 의거하여 문화향상을 가져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한 사회의 공중성이 말로 인해 파열이 일어나는 것도 없지 않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말이 지나치게 많으면 세상이 시끄러워진다는 점이다. 시끄럽다는 것은 소음에 시달리는 고통을 유발하여, 물이 끓듯이 들끓어 고요한 안정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매스컴이 너무 발달한 탓인지 침묵의 공간이 부족한 것 같다. 언론에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정치 환경에서 나오는 온갖 말들이 식상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나노라 하는 사람들의 언행에서도 짜증나는 것이 많이 나온다.

두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참뜻은 소리의 발성에만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말 속에는 말없는 말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으며, 그것은 항상 진정한 의미로 마음속에 간직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업이라 하며 이 업이 표시되기도 하고 표시되지 않기도 한다. 표시되는 업은 말과 행동이며 표시되지 않는 업은 생각이다. 생각도 분명히 하나의 행위이지만 이는 밖으로 표시되지 않는다. 표시되는 업은 후발 업을 유발하여 남에게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쳐주지만, 표시되지 않는 업은 남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업을 좋게 가지기 위하여 자기의 업량을 줄이고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시된 업은 인과에 걸리는 반응이 사회적으로 미쳐져 연쇄적인 후유증이 남게 되므로 그 표시에 있어서 정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분명히 하여 남에게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다. 주장이 강하면 반대의 주장을 동시에 불러오면서 서로 부딪쳐 마찰을 가져오는 것이 외나무다리를 마주 건너려는 것과 같이 비켜갈 길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역설적인 말을 하였다. 또 사회는 언제나 침묵의 층이 있다. “깊은 강물이 고요히 흐른다””는 말처럼 말없는 침묵의 언어들이 표 나지 않게 숨어 있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만이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때론 민중의 앞에서 큰소리로 선동적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언젠가 변증법적인 논리에 걸려 무상 속으로 사라진다. 인류사회는 조용히 가슴이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스타가 되려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이야말로 모양내기를 좋아하는 상(相)에 집착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들은 흔히 말을 많이 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남을 곧잘 피로하게 만든다. 주장이 약한 사람을 바보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느 산중 깊은 곳에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다. 이곳은 참선수행을 하는 스님이 혼자 사는 곳이었는데 한 사람이 한 철씩 교대해 살았다. 어느 해 여름 안거를 하던 중 지붕이 낡아 비가 새었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부득이 아는 신도의 도움을 받아 기와를 갈고 지붕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들보 위에서 상량문을 대신하여 적어 넣은 글귀를 발견하였다. 그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口無說者當住 입으로 할 말이 없는 사람만 와 살아라.

夜有夢者不入 밤에 꿈이 꾸이는 사람은 들어오면 안 된다.

그 암자에 혼자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그 자격은 세상을 향하여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라야 하고, 또 아직 번뇌가 치성하여 잠잘 때 꿈이 꾸이는 사람도 자격 상실이라 그 암자에 혼자 와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할말이 많아도 말없이 참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 사는 것이 삶의 본질에서 볼 때 더 중요하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3월.

만장(輓章)을 쓰면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도 미학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죽음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미의 본질적 의미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사실 상여를 메고 선소리꾼의 선창에 따라 사설을 읊으며 시신을 운구하여 묘지로 가는 풍경에도 미학적 관점은 충분히 있다. 애도의 행렬 그 속에도 왜 아름다움이 없겠는가?

사람의 죽음이 슬픔으로만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죽는 것이나 태어나는 것이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열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번뇌의 불길 욕망의 불길이 다 꺼져버린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경지를 열반이라 한다.

지난 주 우리 종단의 원로이셨던 활산당(活山堂) 성수(性壽) 대종사께서 열반에 들었다. 큰절 통도사에서 5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마지막 영결식을 하는 날 수천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종사의 유훈을 기리며 애도하였다. 세수 90에 법랍 69세로 생애를 마친 노사의 영결식에서 나는 많은 감회를 느꼈다.

운구 행렬이 다비대에 가는 동안 수백 개의 만장행렬이 줄을 이었고 극락암 수좌 스님들이 메고 가는 상여의 이동을 보면서 꼭 불가의 전통 장례의식의 시범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외국인들마저 나타나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화두이자 인생의 근본 향수가 담겨 있는 이 말을 속으로 되뇌고 죽음의 미학을 생각하며, 화장막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의 허무감에 엄습당해 보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두고 인생을 정의하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인생이 공동묘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도보의 행진이라 하였다. 시간의 진행을 두고 여기서 저기로 가는 과정으로 보아 한 말이겠지만, 생멸현상의 한쪽을 가지고 말한 것 같다.

또 누구는 안개가 자욱이 낀 다리 위를 건너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앞이 잘 안보이고 뒤가 잘 안 보인다는 뜻으로 한 이 말은 삼세의 생을 두고 말할 때 확실히 전생을 모르고 내생을 모르는 무명 속의 인생이라 그 자초지종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하긴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던 달마의 선어로 보면, 모를 때 모든 것에서 쉬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는 것이 남아 있으면 업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결식 전날에는 큰절 설선당(說禪堂)에 내려가 영정에 참배하고 만장(輓章)을 몇 개 썼다. 비단 천에 조의를 표하고 애도의 글을 써는 것이 만장이다. 자작시를 쓰기도 하지만 불가에서는 주로 역대 고승들이 남긴 송구(頌句) 등을 쓰기도 한다. 내가 쓴 만장의 글귀 가운데 동진 때 승조법사가 남긴 임종게(臨終偈)의 송구가 있다.

인간의 육신은 원래 주인이 없고 四大元無主(사대원무주)

오온은 본래 공한 것이네.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

번쩍이는 칼날이 내 목을 내리칠 것이지만 將頭臨白刃(장독임백인)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으리라. 恰似斬春風(흠사창춘풍)

승조는 왕이 내린 벼슬을 거절해 왕의 노여움의 사 형장에서 처형이 되었다. 그때 그가 이런 시를 읊었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을 이렇게 여유 있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미학이 아닐까?

중국의 방온(龐蘊) 거사가 어느 날 방안에서 좌선을 하다가 그냥 좌탈(坐脫). 앉아서 돌아가는 것을 하고 싶었다. 정오가 되면 떠나려 했다. 마침 딸 영조가 산에서 나물을 캐 와 마당가에서 다듬고 있었다. 방거사가 밖을 향해 물었다.

“얘, 영조야, 해가 중천에 와 정오가 되었느냐?”

딸이 대답하기를

“일식을 하는지 해가 잘 안보입니다.”

방거사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구름이 조금 하늘을 덮었으나 해는 중천에 닿아 있었다.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딸 영조가 방안에 들어와 아버지가 앉아 있던 방석에 앉아 있었다. 딸을 불렀다.

“얘, 영조야!”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순간 아차하고 방거사의 머리에 섬광처럼 일어나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좌탈 하려던 방석에 딸이 먼저 들어와 선수를 쳐 좌탈을 해버린 것이었다. 딸의 기민한 솜씨(?)에 아버지는 감탄을 했다.

할 수 없이 방거사는 자신의 입적을 며칠 미루기로 했다. 1주일이 지난 뒤 방거사가 입적을 하던 날에는 마침 양주 태수를 역임한 우적于頔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그도 선에 심취하여 가끔 방거사를 찾아와 법담을 나누곤 했다. 우적과 이야기를 나누던 방거사가 좀 눕겠다며 방바닥에 드러누워 우적의 무릎을 베더니 그만 스스로 숨을 거두어 입적을 하였다.

“허공 꽃 그림자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아지랑이 파도가 거칠게 이는구나.”

방거사가 남긴 임종의 말이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5월 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