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끔 말에서 짜증을 느끼면서 “말 많은 세상”이라고 세상 흉을 보는 수가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방이 하는 말에 싫증이 나면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하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말이란 인간의 의사를 소통시키는 수단이지만 말 한마디가 잘못되면 큰 곤욕을 치르거나 엄청난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수도에 임하는 자들을 경책할 때 우선 말부터 조심하라고 이른다. “입이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문이니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口是禍門 必加嚴守)”고 하였다. 사실 말이란 순간의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내뱉어지는 수가 많기 때문에 자칫 에러를 범하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교양도 말씨에서부터 밖으로 나타난다. 물론 말의 필요성이 있으므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를 음성교체(音聲敎體)의 세계라 한다. 곧 말이 가르침의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고부터 자라면서 제일 먼저 말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언어에 길들여져야 문화수용도 잘 할 수 있다. 오늘날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쏟는 학습의 열이 말을 배우는데 있을 것이다. 자기 나라 말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여, 세계화를 따라가려면 외국어를 알아야 한다면서 제1외국어, 제2외국어 하면서 외국어에도 번호를 붙여가면서 공부하고 있다. 해마다 많은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한다고 외국으로 간다고 하지 않는가? 말 잘하고자 하는 공부에 인생의 태반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언론문화가 발달하여, 소위 매스컴이 사회의 여론을 주도해가는 판국에서는 매일 같이 언어의 홍수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고 사는 꼴이다. 때문에 침묵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말의 유용성에 의거하여 문화향상을 가져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한 사회의 공중성이 말로 인해 파열이 일어나는 것도 없지 않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말이 지나치게 많으면 세상이 시끄러워진다는 점이다. 시끄럽다는 것은 소음에 시달리는 고통을 유발하여, 물이 끓듯이 들끓어 고요한 안정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매스컴이 너무 발달한 탓인지 침묵의 공간이 부족한 것 같다. 언론에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정치 환경에서 나오는 온갖 말들이 식상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나노라 하는 사람들의 언행에서도 짜증나는 것이 많이 나온다.
두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참뜻은 소리의 발성에만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말 속에는 말없는 말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으며, 그것은 항상 진정한 의미로 마음속에 간직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업이라 하며 이 업이 표시되기도 하고 표시되지 않기도 한다. 표시되는 업은 말과 행동이며 표시되지 않는 업은 생각이다. 생각도 분명히 하나의 행위이지만 이는 밖으로 표시되지 않는다. 표시되는 업은 후발 업을 유발하여 남에게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쳐주지만, 표시되지 않는 업은 남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업을 좋게 가지기 위하여 자기의 업량을 줄이고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시된 업은 인과에 걸리는 반응이 사회적으로 미쳐져 연쇄적인 후유증이 남게 되므로 그 표시에 있어서 정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분명히 하여 남에게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다. 주장이 강하면 반대의 주장을 동시에 불러오면서 서로 부딪쳐 마찰을 가져오는 것이 외나무다리를 마주 건너려는 것과 같이 비켜갈 길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역설적인 말을 하였다. 또 사회는 언제나 침묵의 층이 있다. “깊은 강물이 고요히 흐른다””는 말처럼 말없는 침묵의 언어들이 표 나지 않게 숨어 있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만이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때론 민중의 앞에서 큰소리로 선동적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언젠가 변증법적인 논리에 걸려 무상 속으로 사라진다. 인류사회는 조용히 가슴이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스타가 되려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이야말로 모양내기를 좋아하는 상(相)에 집착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들은 흔히 말을 많이 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남을 곧잘 피로하게 만든다. 주장이 약한 사람을 바보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느 산중 깊은 곳에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다. 이곳은 참선수행을 하는 스님이 혼자 사는 곳이었는데 한 사람이 한 철씩 교대해 살았다. 어느 해 여름 안거를 하던 중 지붕이 낡아 비가 새었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부득이 아는 신도의 도움을 받아 기와를 갈고 지붕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들보 위에서 상량문을 대신하여 적어 넣은 글귀를 발견하였다. 그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口無說者當住 입으로 할 말이 없는 사람만 와 살아라.
夜有夢者不入 밤에 꿈이 꾸이는 사람은 들어오면 안 된다.
그 암자에 혼자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그 자격은 세상을 향하여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라야 하고, 또 아직 번뇌가 치성하여 잠잘 때 꿈이 꾸이는 사람도 자격 상실이라 그 암자에 혼자 와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할말이 많아도 말없이 참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 사는 것이 삶의 본질에서 볼 때 더 중요하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