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한 생애의 기간을 일기무상(一期無常)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무상을 말할 때 찰나(刹那)무상과 일기무상의 둘로 설명을 한다. 이 무상이라는 말은 시간이 짧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순간의 일이란 의미에서 무상을 붙여 쓰기도 한다. ꡒ세상만사가 무상사다ꡓ고 할 때의 무상은 ꡐ덧없다ꡑ는 뜻과 함께 ꡐ순간에 불과한 일ꡑ이라는 뜻을 가진다.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없어지는 것, 이것이 모든 현상계를 단적으로 파악할 때 쓰는 수식어다.
그런데 무상이란 존재하던 사물이 없어진다든지 전성을 누리던 사람이 몰락한다든지 하는 상황퇴보에서 느끼는 감정의 표현으로 곧잘 쓰이는 말이지만, 원래는 생각이 움직이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염기염멸(念起念滅)의 생멸심을 말한다. 사념처(四念處)의 관법(觀法)에서 관심무상이 나온다. 마음을 무상한 것으로 보란 말이다. 특히 중생의 마음은 번뇌가 일어나 마음이 고요할 때가 없이 마치 파도치는 물결처럼 항상 출렁거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념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자꾸만 다른 생각으로 옮아가면서 생각과 생각이 상속된다. 그리하여 물이 흘러가면서 이어지듯이 의식의 흐름이 생겨 시간과 공간에 스며든다.
인간의 의식이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경계를 접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에 와서는 신경이 예민해져,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염력 곧 생각의 힘이 약해진다. 다분히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1차신경의 피상적인 생각만으로 현실의 제반사항을 안이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짙다. 때문에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이 많이 일어난다. 더구나 모든 것이 스피드 위주로 가속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물리적 기능이 인간의식의 템포를 빠르게 하므로 인스턴트의 찰나주의가 횡행한다. 급기야 순간에 죽고 순간에 산다는 즉흥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내일은 내일 가서 보자며 오늘의 원인이 초래할 내일의 결과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자포자기하는 성미를 부리며 될 대로 되라고 채근을 한다. 이러므로 감정을 순화시키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심리적 상황으로 볼 때 현대의 불행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사람은 멀리 보려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환경이 좋건 나쁘건 멀리 보고 생각하면 모든 상대적 차별이 좁혀지게 된다. 행복과 불행의 대차도 멀리 보고 생각하면 줄어든다. 아무리 한 평생 호의호식하는 부의 복이 있다 해도 일회적인 한정된 생의 것이며, 그것이 세세로 이어지려면 우선은 다음 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언제나 삼세를 함께 관찰한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똑같이 본다고 한다.
기실 모든 존재는 삼세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오늘을 산다는 것이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는 많아지는 것이며 나이가 많아지면 그 속에 많은 과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장수왕(長壽王)의 이야기가 있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다 망한 장수왕이 다른 나라로 도망을 하여 광대처럼 악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아들 장생동자를 낳았다. 이 아들이 매우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 장차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역량이 엿보였다. 장수왕을 멸망시킨 이웃나라 가사국왕이 후환이 두려워 장수왕을 죽인다. 임종 순간에 장수왕이 아들 장생 동자에게 이 말을 남긴다.
“원수를 갚지 말라. 멀리보고 살아라.”
원한은 복수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다. 복수는 또 복수를 불러오는 것, 세월이 흘러 멀리 멀리 지나가면 사랑도 미움도 함께 용해되어 나중에는 증발되어 사라진다. 다만 한 생각에 마음을 안정시키면 일념이 만년이 되어 간다. 한 생각 일념이 만년이 되어 가면 무심에 합해진다. 무심은 무상을 뛰어 넘어 영원을 기약한다. 멀리 보고 사는 것이 오래 오래 사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0월 제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