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망초인생

옛날 시골 어느 마을에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었다. 농사짓고 살던 가난한 시절이라 어느 집 아래채 방에 세를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달포쯤 지낸 뒤 뜻밖의 사건이 생겼다. 새신랑 되는 사람이 이웃사람과 싸움이 벌어져 치고받고 격투를 벌이다 그만 힘센 이웃 남자에게 맞아 죽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시집 온지 두 달 만에 남편을 잃은 신부가 충격으로 실성을 해 미친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신이 이상해져버린 이 신부가 매일 남편을 죽게 한 이웃 남자 집 앞에 나타나 두 손을 치켜들어 손톱을 세우고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노려보는 표정을 짓고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실성한 신부가 남편 잃은 원한을 품고 저러는 것이라고 모두들 혀를 차며 동정을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다.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노려보던 젊었던 신부가 늙어 60대가 되고 70대가 되었다. 4〜5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실성한 채로 살아온 노파가 다 된 신부가 간간이 남편을 때려죽인 사람 집 앞에 나타나 또 손톱을 세우고 성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고 앉는 일이 있는 것이었다. 이미 남편과 싸움을 했던 사람은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버려 없는데도 한 맺혀 실성한 할머니가 된 신부가 죽을 때까지 간혹 그 자리에 찾아와 앉아 원한을 품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더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흔히 평생을 잊지 못하는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니 대개의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은혜이든 원한이든 평생을 잊지 못하고 절절히 사무치는 가슴으로 있다면 인생은 분명히 물망초 같은 인생이다. 이는 내게 남아 있는 추억의 기억을 두고 하는 말일수도 있지만 인간 상호끼리 감정에 얽힌 인과의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남에게 자기에 대한 기억을 좋게 남겨 놓아야 한다. 이것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잘못된 행동이나 부도덕한 처신을 하면 스스로의 이미지를 손상하여 남으로부터 모멸과 냉소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옛말에 “만고에 흐르는 긴 강의 물로도 한 번 더럽혀진 이름은 씻지를 못한다(萬古長江水 汚名洗不去)”고 하였다.

내가 남에게 베푼 은혜도 그렇거니와 반대로 내가 남을 해롭게 한 잘못을 상대는 길이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편을 죽인 상대에게 평생을 실성을 해 살면서도 그 원한을 잊지 않고 나타나더라는 노파의 비극적 이야기가 뜻하는 것은 한이 맺힌 것은 결코 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도 하나의 행위며 또한 업의 종자가 된다. 마음속에 심어진 생각의 씨앗이 언젠가 때가 되면 싹이 나온다. 그래서 나와 남의 생각도 서로 교환되면서 인과관계를 이룬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나를 좋게 생각하듯이 남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여야 한다. 생각 하나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을 통한 왕래가 생기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를 오고 가며 산다.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시공을 자유자재하게 내왕하므로 동서고금을 생각대로 드나드는 것이다. 또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연속적 흐름이기 때문에 삼세의 진행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기억들은 곧잘 과거를 향해 역류하여 흐를 때가 있다.

지나간 세월 그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들을 누구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서 오늘의 시름을 달래가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다. 숱한 사연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러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 때문에 자꾸 마음은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에 있었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수가 많다. “잊어버려라” 라는 충고를 스스로 하면서도 잊지 못하고 번뇌만 키워가는 경우가 허다히 많다.

우리의 기억에 떠오르지 않고 망각된 것들을 때로는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과거의 불행했던 일이나 좋지 못했던 한스러운 일을 이제는 잊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기억에 사라진 일이라 해서 없어진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업종자는 영원히 남는 것이다. 내가 내 업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중생의 일이다. 그림자 되어 따라오는 업의 자취 그것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또 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물망초의 전설처럼 누군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날 잊지 말아줘.” 물론 그 말 속에는 사랑의 씨앗이 들어 있는 수도 있고 원한의 씨앗도 들어있는 수도 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3월 제76호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하는가

옛말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다 돌아간 다음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일까? 물론 생전의 업적이 남을 것이고, 작가나 예술가들은 불후의 명작을 남겨 만고에 그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이름을 남기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도 있다.

옛날 어느 스님은 친한 도반에게 “내가 보이지 않으면 죽은 줄 알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 후 영영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친한 도반 몇 사람만 그가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죽었다고 여겨지는 그 스님의 살아생전에 남긴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난 이렇게 죽었으면 하네. 아무도 보지 않는 한 밤중에 걸망에 돌을 가득 넣어 지고 몸에 벗겨지지 않게 단단히 묶어 강의 다리를 지나다 강물 속으로 뛰어내려, 이 육신은 고기들에게 보시를 하고, 내 죽음으로 인해 아무에게도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고 싶네.”

이 말 때문에 몇몇 도반들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설사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하더라도 시신이 남아 결국에는 그 신원이 밝혀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사후에 누가 죽었다는 것이 누구에게든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죽으면서도 죽음을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어느 신도님이 죽었다는 부음을 들었다. 갑자기 거사 한 분이 돌아갔고 칠순이 넘은 보살님 한 분이 돌아갔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본래 없는 일이라는 경전 속의 말씀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은 태어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므로 누구의 부음을 듣는 것도 순간적으로 덧없는 무상을 느끼는 작은 감정의 편린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만 이번에 돌아간 한 분의 죽음은 많은 여운을 내게 안겨 주었다.

몸이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망인은 몰래 이것저것을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공부방에 나와서 하직 인사처럼 앞으로는 공부방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기 시작했다.

재산이 많지도 않았고 별로 유식하지도 않았던 망인은 전해 들은 바로는 죽음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고 한다. 조금도 슬퍼하거나 외로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담담하게 평소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점점 느껴지는 육신의 통증을 남모르게 참아내며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자하는 가족들의 청을 끝내 거절하며 오히려 식구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갈 준비를 다 했다. 몇 년 더 살다 가나 지금 가나 똑같은 것이다. 내 병원에 입원시킬 돈이 있거든 차라리 손자들 학비에 보태 쓰도록 해라.”

망인은 입원을 사양하며 자녀들을 이렇게 타이르며 달랬다. 마치 동산양개(洞山良介: 807~869) 선사가 입적하기 전 우치재(愚癡齋)를 지내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갔다는 이야기처럼 망인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죽음에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무심히 죽고 싶어 했다. 생에 대한 미련이 왜 없을 수 있을까만 모든 걸 초월하여 무심삼매에 들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후에 아무 것도 남기지 말라.”

이 말은 절대 무(無)의 세계에 들어가 죽음 자체를 초월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말하자면 웰다잉(well- dying)이 되는 것이다. 사실 웰빙(well-being)의 끝은 웰다잉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철저히 살다가 철저히 죽어라.”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25) 선사의 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나고 죽는 생사를 벗어난 해탈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생사를 등치시킨 말이기도 하다. 시성(詩聖) 타고르는 죽음을 미화하여 손님으로 표현하면서 죽음의 손님에게 줄 선물 이야기를 하였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올 때 그대는 죽음의 손님에게 무슨 선물을 바칠 것입니까?”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것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 죽음의 손님 손에 들려 보낼 것입니다.”

무엇이 죽음의 손님에게 바칠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선물이 될까. 재산일까, 명예일까, 권력일까. 또 하나의 인생 화두(話頭)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6월 127호

무엇때문에 이러는가

며칠 전 밤늦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분이 몹시 불쾌해져버린 적이 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술 취한 음성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받자마자 다짜고짜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누구시요? 전화 잘못 걸었소.” 하고 끊었는데도 재차 걸어와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방의 실수로 인한 잘못 걸려온 전화사건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하나의 피해사건이다. 문화가 발달하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예외로 생활 피해사건이 많다. 특히 전화에 시달리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단체 이름을 대면서 성금을 보내달라는 전화가 있는가 하면 약이나 책을 사달라고 전화판촉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작은 사찰이나 암자마다 이런 전화가 쇄도한다고 한다. 어쩌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취하자는 발버둥에 가까운 사람들의 몸부림이라고 생각될 때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런 식으로 아무에게나 무작위 호출을 하여 동냥을 보태달라는 식은 곤란한 일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경우 그 일은 결코 옳은 일이 될 수 없다. 물론 숨은 뜻이 무엇인지 진의를 몰라 오해를 해서 남의 일을 잘못 판단하는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일이든지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남이 수긍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은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왜 이러는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가?”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도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은 다름 아닌 자기 정체의 확인이다. 자기 아이덴티티를 바로 파악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세워 두고 거기에 이유를 붙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한다는 식의 자기 변을 가지고 자신을 합리화 시켜 자기 입장을 세운다. 그러면서 남과의 입장 차이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입장이 달라 남과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공동관계에서 개인의 입장이 난처해지거나 곤란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때 남으로부터 자기 입장에 대한 지지와 배려를 받고 싶어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서로 상충된 입장이 있을 때 내 입장은 지지와 배려를 받고 싶으면서도 남의 입장을 지지하고 배려해 주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자기주장만 내 세우면서 남의 주장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의 충돌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의 세계는 항상 아상과 인상이 난무하는 세계가 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한 자를 보살이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이치를 터득하여 어떤 관념적 고집에서 벗어나 자타의 대립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여 살아가는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보인 것이다. 사실 사람이 사는 생활방식이 저마다 다르다. 직업의 선택에 따른 생활이 다를 뿐만 아니라 습관에 의한 차이도 얼마든지 있다. 옛말에 창을 만드는 사람은 방패를 뚫지 못할까 걱정하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창을 막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하였다.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의 걱정에 아랑곳없이, 결과는 창이 강하고 날카로우면 방패를 뚫고, 방패가 튼튼하면 창이 뚫지 못하게 된다.

인연에 따라서 결과의 상황은 어떻게든지 나타나게 된다. 이 결과의 상황을 무심히 수용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바라는 어떤 결과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하면서 자기 입장을 끝까지 지키려고 할 필요가 어떤 면에서 볼 때 전혀 없는 것이다. 무아란 자기 입장을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남의 입장이 되어 내 원력을 키운다. 내 원력 속에 내 입장과 남의 입장이 함께 일치되어 있다. 불만에 허덕이거나 욕망에 허덕이는 경우 그 불만과 욕망에 자꾸 ‘왜’라는 의문을 갖다 붙이면, 불만도 없어지고 욕망도 없어지는 법이다. 삶이란 이유 없이 사는 것이고 조건 없이 사는 것이다. 나고 죽는 생사의 반복을 두고 말할 때 산다는 것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살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9월 제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