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 차 스님의 ‘마음’

요즈음 나는 마음에 드는 책 한권을 얻어 수시로 읽고 있다. 어느 스님이 사 보내준 이 책을 처음에는 바빠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고 있다가 어느 날 새벽에 읽기를 시작해 이 책이 근래에 보기 드문 양서라는 것을 알았다. 심리학자이자 캘리포니아에서 명상센터를 개설하고 있는 잭 콘필드의 ‘마음의 양식’이라는 추천사가 붙어 있기도 한 이 책은 이미 작고한지 17년이 지난 태국의 고승 아잔 차 스님의 법문집이다.

“우리의 몸과 말, 마음에서 선을 개발하라. 훌륭한 행동, 훌륭한 말, 훌륭한 생각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보물이다.”

이 말은 책 장식지에 적혀 있는 아잔 차 스님의 말이다.

아잔 차 스님은 1918년 태국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9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한 스님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출가한 뒤 20살에 비구계를 받고 한때 고행승을 자처하며, 밀림과 동굴, 화장터 등지를 방랑하면서 수행하였다. 오로지 일념으로 수행정진에만 힘써 나중에는 태국 최고의 고승이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스님이다. 그가 숲속에 빠뽕사원을 세우고부터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혹은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아잔 차 스님은 또 너무나 청빈하게 무소유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하였다. 역자가 소개한 말에 의하면 조그만 숲속의 오두막에서 이슬처럼 투명한 삶을 살다간 수도자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너무나 맑고 순수하게 살다가 깃털처럼 가버린 스님이라 하였다.

아잔 차 스님의 ‘마음’은 삶의 평화와 행복에 대에 우리에게 전해 주는 많은 조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조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나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가? 인생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근본 주제인 마음, 불교에서는 이 마음이 본래 부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마음이 바로 본래 깨달음이었다는 것이다. 이 본래 깨달음인 마음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비워 고요하기만 하고 깨끗하기만 한 마음이다. 슬픔과 기쁨을 따라가지 않고 언제나 제 자리에 가만히 있는 이 마음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는 나뭇잎처럼 어떤 움직임도 일으키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덧없는 존재이고, 괴로운 존재이며, 실체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의 개념에서 본다면 이 세 가지 특징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고 한자 단어로 표현되는 이 세 말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깨달음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덧없는 것이 아니고 괴로운 것이 아니며, 자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지도 않고 저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는, 그 근본 본질에 있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것이 깨달음의 마음이다. 이 마음 그대로 살면 우리는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아잔 차 스님은 주로 이런 식으로 법문을 한다.

남방 스님들은 주로 위빠사나 위주의 명상 수행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잔 차 스님은 육조단경의 이야기도 인용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깃대에 걸어둔 깃발이 움직인다. 이걸 보고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또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바람이 부니까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펄럭이는 것은 깃발이라는 말이다.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 이는 우리 눈에 들어오는 객관경계이다. 그러나 깃발이 펄럭이는 움직임을 내 마음이 의식하지 않으면 본래 움직임은 없는 것이다. 마음이 바람을 따라 가고 깃발을 따라 갈 때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다. 육조 혜능 스님은 그래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였다.

이른 바 마음공부라는 것은 마음은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 마음을 지켜 경계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명상공부이고 이것이 또한 수행인 것이다. 사람의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욕망의 길과 해탈의 길이다. 욕망의 길은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어떤 감정이나 대상에 끌려가는 길이요, 해탈의 길은 자신의 마음을 지켜 모든 것을 초월해버리는 길이다. 내가 해탈했을 때 진정한 내 삶을 살 수 있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을 열심히 살아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고 후회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변호사가 고백한 말이라고 어느 신문에서 읽었다. 미국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한 번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마음에 드는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흑인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야외에 그림을 그리러 가려면 또 어머니가 못 가게 하였다. 그림 그리는데 너무 시간을 소비하면 일반 교과목 성적이 떨어져 명문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야구를 하고 싶어 야구부에 들러했으나 이번에도 어머니가 반대했다. 명문 법대를 가려면 운동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충실히 따라 명문 법대에 들어갔다. 대학재학중에 그는 여자를 사귀어 연애를 하였다. 그는 진실로 그 여자를 사랑했다 하였다. 대학을 졸업 변호사가 된 그는 사귀던 여자와 결혼을 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에 또 부딪쳤다. 서로 집안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들어 자기의 인생을 회상해 보았다. 아들을 일류로 키우려던 어머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자기 인생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기를 일류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자기 인생이 결코 일류가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러서 그가 내뱉은 말 한 마디는 내 인생을 살지 않고 남의 인생을 산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인생은 어쩌면 마음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내 마음을 잘못 지키면 내 인생이 얼마든지 엉뚱하게 살아지는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

아미쉬 빌리지를 둘러보고

지난 주 미국을 다녀왔다. 이민 가 있는 옛 친구가 비행기표를 보내주면서 꼭 한번 들어오라고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죽마고우였던 그 친구는 10여 년간 경찰관 생활을 하다가 81년도엔가 이민을 갔었다. 내가 출가를 하기 전에 시골에 있던 그의 집에서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도와준 것을 그는 못내 고맙게 생각했다. 그는 옛날의 우정도 생각나고, 또 나이가 드니 향수도 일어나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가 경찰관 시험에 합격하여 경찰학교에 들어갈 때 나를 만나 기쁜 표정을 지으며 “네 덕분에 시험에 합격해 정말 고맙다”고 하였다. 나는 “훌륭한 경찰관이 되거래이”라고 말해 주면서 그의 입교를 축하해 주고 헤어진 다음 얼마 후 산사를 찾았다가 출가를 결심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그가 서울시경에서 아주 유능한 형사가 되어 범죄 수사나 범인 체포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고, 어느 해 휴가 때엔 그가 나를 만나기 위해 절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지난 봄에는 그가 자서전을 펴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놓은 것을 보고 잠시 옛 추억에 잠기기도 하였다.

이번 친구 방문에서 우리는 자연히 옛날의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기억나는 옛 친구들의 근황이 어떤가 하고 서로 안부를 물어 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이미 타계한 이도 있었고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불행한 소문이 난 친구들도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는 40여 년 전의 1960년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친구가 사는 곳은 미국의 중부 지역에 있는 캔사스 시티(Kansas City)라는 곳이었다. 시카고에서 미국 국내선 비행기로 1시간 반을 더 날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캔사스 시티는 큰 도시가 아니고 곡창지대의 한쪽에 있었는데 도시가 날로 발전하며 외지에서 인구가 유입되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 친구 집에서 나는 1주일을 머물렀다. 친구의 집은 전원주택처럼 크고 아담하였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초원 같은 언덕에 집 뒤로는 숲이 있었고 야생 사슴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었다. 친구는 다운타운에 큰 도장을 열어 태권도를 가르치는 관장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9단이라는 태권도의 명인이 되어 2천 개가 넘는 미국 전역의 도장 가운데 10대 도장에 드는 훌륭한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도장 안에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좌우에 걸어 놓고 드나드는 수련생들이 출입 시에 반드시 경례를 하게 하는 이색적인 풍경도 목격할 수 있었다. 친구는 농담으로 미국인을 위시한 외국인들을 태극기 앞에 절을 하게 하는 애국과 외교의 선봉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친구가 드라이버를 가자고 했다. 어디 좋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문명을 거부하고 사는 이색적인 곳이 있다고 하였다. 차를 운전하여 두어 시간을 달렸더니 세계 최고로 도로망이 잘 되어 있는 미국인데도 비포장 길이 나타나는 곳이 었다. 산이 없어 벽촌이라 할 수 없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운치가 넘치는 지역에 아미쉬 빌리지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주민들이 농사나 목축을 하면서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을 바탕으로 자체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특이한 풍습이 남아 있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고 우리나라 마을로 말하면 한 마을에 한 집이 있을 정도였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자동차 이용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며, 전기 공급을 받지 않고 밤에 촛불을 켜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갔을 때 아이들을 두어 명씩 태우고 말이 끄는 마차를 몰고 가는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또 한 곳에 가니 농산물 경매를 하는지 수박 감자 등과 각종 채소류를 모아 놓고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웅성웅성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보였다. 도시의 문명을 벗어나 시골의 넓은 땅에 삶의 터전을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양식에 삶의 훌륭한 정신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외쳤지만 문명에 중독된 도시 문화는 어쩌면 자연을 잃고 사는지도 모른다. 기계 문명이 들려주는 온갖 혼음 속에 언제 자연을 관조할 여유나 있었던가?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고 오늘도 유흥의 거리를 기웃거리며 관능적인 자극을 바라며 호기심의 눈을 번뜩이는 오늘의 문명에 중독된 현대인들에게 아미쉬 빌리지의 사람들은 말없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삶이란 무엇인가?’ 가 꼭 철학자의 사변적인 질문만은 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서 이 질문을 회피하고 남 따라 장에 가는 식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 역시 죽어 가는 존재이고 사랑받는 너 역시 죽어 가는 존재임을 의식할 때 삶의 또 다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가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인 것은 길가는 행인의 첫걸음의 발자국이나 마지막 걸음의 발자국이 똑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9월 제82호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꽃은 핀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꽃이 피듯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눈먼 중생들 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혜의 꽃을 찬란하게 피운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세상을 비추는 자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지혜로써 살고 지혜로써 죽는다. 삶과 죽음의 덧없는 세계에서 범부들은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나고 죽음을 벗어나 꽃의 향기처럼 지혜를 풍기며 깨달음의 길을 묵묵히 간다.

『법구경』에 나오는 이 말은 수행자의 정신을 꽃에 비유하고 등불에 비유하여 읊어 놓은 말이다. 세상의 혼탁이 쓰레기 더미 같다하여도 그 더미 속에서 꽃이 핀다는 말은 상징성이 매우 높게 들린다. 꽃처럼 향기롭게 살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이 법문이 새삼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 주는 청량제처럼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점점 오염된 분위기가 가중돼 청정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촌의 환경이 매우 불우하다. 평화롭게 사는 온화한 모습보다는 사람들의 패싸움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국제적인 세계 전체의 사정이나 나라 안의 사정이나 정말 안녕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사바세계를 고해라고 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속성이 으레 그런 것이라고 보고 말면 그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있어야 하고 우리들 마음을 맑게 해 주는 희망적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푸른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 먼지 낀 땅이 비록 우리들 삶의 현장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보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요즈음 “당신은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고 사느냐?”하고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말은 정신적으로 맑은 심성의 공간을 폐쇄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 원초적 물음을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던져 보아야 한다.

서양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이란 결국 무덤으로 가는 행진’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범속한 세속경계에서 너무 숨막히는 생활에 빠져 마음의 여유와 지혜를 상실해 가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찾아야 할 돌파구는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 지혜로운 용심을 하는데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방안에 날아 들어온 벌이 열려 있는 문을 찾지 못하고 닫힌 창에 몸을 부딪치는 어리석음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로에 지친 자에게 갈 길이 멀 듯이 어리석은 자에게는 나고 죽는 생사의 길이 멀다. 바른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에 대한 향수, 진리에 대한 동경을 가진다. 타향살이하는 사람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처럼 영혼의 눈을 뜨는 사람에겐 영혼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을 발심하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시그널이다. 이 길을 가서 생사의 강물을 건넌다.

끝없이 윤회하는 업보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한 줄기 빛이 되고 향기가 되어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듯 승화해 가는 곳이 부처님의 세계다. 아우렐리우스도 이렇게 말했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여 흔들림없이 최선을 다해 살라. 그것이 바로 그대의 인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삶의 의미가 더 깊어지는 법이다.

지안스님 글 / 월간반야 2003년11월 (제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