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복(熱福)과 청복(淸福)

사람이 살면서 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소망일 것이다. 남에게 복 받으라고 덕담을 해 주는 것도 복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소위 행복이라는 것이 복을 만나 다행하게 사는 것이다. 불우하지 않고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이다. 이 행복론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세속적인 가치 기준은 이미 예로부터 서 있었다. 동양에서는 오복(五福)을 들어 행복의 표준으로 삼았다. 첫째 장수를 누려야 복이 누려진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수복(壽福)을 맨 처음 두었다.

두 번째는 부자로 사는 것이 복이다. 가난이 고통을 가져오므로 의· 식· 주를 잘 갖추어 배고프지 않게 먹고 춥지 않게 입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강녕(康寧)으로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을 뜻한다. 몸이 병에 걸리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평화로운 것이 강녕이다. 넷째는 유호덕(攸好德)이라 하여 남으로부터 좋은 말을 듣고 어진 덕이 있어 사람 사이에 신뢰와 존경을 받는 것이다.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으로 임종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오복이라 하여 이 오복을 다 누리고 사는 것이 가장 복 받고 산 잘 산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 오복설은 다분히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내세운 것 같다. 아무튼 복을 타고 나기를 바라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이 복에 의존하여 있음을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불우한 자기 환경을 비관 팔자타령을 하는 것은 곧 박복함을 한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복이 꼭 인생을 올바르게 살게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복 많이 누리고 산 사람을 꼭 잘산 사람이라고 한쪽으로만 치우쳐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류 역사상 유명한 위인들 가운데 전혀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 많다. 위대한 발명가가 인류에 이바지 할 큰 발명을 하고도 요절한 사람이 있으며,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도 불우한 생애를 산 예술가들도 많다. 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의 생애를 보면 고난 속에 살았을 뿐 전혀 복을 누리지 못한 이들도 많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속적 복이란 내가 남보다 잘 되는 이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일신의 영달이란 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인륜적인 큰 덕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벼슬이 높아도 청백리 정신으로 산 고관들이 옛날에도 있었는데 이들은 치부를 누리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스스로 안빈낙도를 즐긴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누리는 복을 청복(淸福)이라 하였다. 맑고 깨끗한 복이라는 말이다. 사실 청복은 치부 등의 복이 없는 경우인데 이 청복이 더 귀한 복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어록에 청복과 열복(熱福)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삶을 연장하여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세상에 온갖 복락이 있어도 장수하지 않고는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란 것에는 대저 두 가지가 있다. 깊은 산속에 살며 거친 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으며 노송에 기대 휘파람을 분다. 집안에는 거문고와 고경(古磬)을 놓아두고 바둑판 하나와 책 한 다락을 갖추어 둔다. 마당에는 백학 한 쌍을 기르고, 기이한 꽃과 나무 및 수명을 늘이고 기운을 북돋우는 약초를 심는다. 이따금 산승이나 우객(羽客)과 서로 왕래하며 소요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세월이 오고 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조야(朝野)가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에 대해서도 듣지 않는다. 이런 것을 청복이라 한다. 외직에 나가서는 대장군의 깃발을 세우고 관인(官印)을 허리에 두르며 노랫소리와 음악소리를 벌여놓고 어여쁜 아가씨를 끼고 논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높은 수레를 타고 비단 옷을 입고 대궐 문으로 들어가 묘당에 앉아 사방을 다스릴 계책을 듣는다. 이런 것을 열복이라 한다. 사람이 열복과 청복 가운데서 택하는 것은 다만 그 성품에 따른다. 하지만 하늘이 몹시 아껴 잘 주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청복이다. 그래서 열복을 얻은 사람은 아주 많지만 청복을 얻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다산의 열복과 청복은 매우 대조적이다. 화끈하게 뜨겁게 산다 해서 열복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세속의 오욕락 곧 재물, 여색, 음식, 명예, 수면을 탁복(濁福)이라한다. 복을 누리면서 정신이 탁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가치로 말하면 탁한 것보다 맑은 것이 나은 것이다. 탁복에 도취되어 자신의 인생을 흐리게만 해서는 잘살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열복은 남과의 경쟁을 하면서 때로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수가 있지만 청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복은 나쁜 업이 만들어져 그 과보가 내게 괴로움을 느끼게 해 주지만 청복은 열복처럼 나쁜 과보가 오지 않는다. 때문에 알고 보면 사람이 청복에 대한 향수도 누구나 가지고 사는 것이다. 다만 세속의 인습에 의해 열복 쪽으로 기울어져 사는 것이 아닐까?

요산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2월 제85호

연꽃처럼 때묻지 않는 마음

대구에 사는 부용스님이 연꽃 사진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웠다. 평소 틈틈이 여가를 내어 연꽃을 찾아 사진 찍기를 취미로 삼아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새 사진작가의 실력을 발휘해 전시회를 연다고 하니 연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연꽃은 우리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의 각성(覺性)을 흔히 연꽃에 비유해 설명한 말들이 경전 속에 자주 나온다. 저 유명한 『법화경』의 본래 이름이 『묘법연화경』인 것처럼 불법의 심오한 진리를 연꽃에 비유해 묘사하고 있다.

연꽃은 그 생태가 다른 꽃들과는 사뭇 다르다. 물에서 피는 꽃으로 자라는 환경이 깨끗하고 맑은 물이 아닌 진흙 뻘물의 연못이다. 말하자면 흐리고 탁한 오염된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꽃이 물에 젖지 않는다. 연잎에도 떨어진 물이 퍼지지 않고 구슬처럼 물방울이 맺혀 잎을 적시지 않는다. 이는 연꽃 자체는 환경의 오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뜻을 숙어로 만들어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한다.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언제나 깨끗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속적 환경에 처해 있는 중생들이 가지가지 업을 지으며 사는 처지이지만, 자신의 본래 마음은 누구나 청정한 것으로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는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 연꽃이 가지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갖춰지는 점이다. 이를 인과동시(因果同時)라 한다. 어떤 원인이 만들어질 때 이 원인이 가져 올 결과가 함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일이든 시간을 따르는 진행의 과정이 있고 다음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시간을 뛰어넘고 보면 선후가 없이 원인이 언제나 결과를 가지고 있으며 결과가 항상 원인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시작과 끝이 함께 같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생이 나고 죽는 생사를 두고도 생사가 동시라는 말을 쓴다. 신라시대 의상스님이 지은 『법성게』에도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말과 ‘생사열반상공화’라는 말이 있다. 처음 발심할 때가 정각을 이루는 순간이라는 말이며, 생사와 열반이 항상 같이 어우러져 있다는 말이다. 나무에 열린 열매가 씨앗이 되면서 동시에 다시 자라서 열릴 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파악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릇된 행위를 하면서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랄 수는 없다. 연꽃 같은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의 본래 각성인 연꽃 같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연꽃 같은 마음은 똑같다. 선악이 나눠지지 않고 귀천이 구분되지 않는 이 마음이 본래 자기의 참 마음이다. 일체 차별을 떠난 절대적 지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마음에서 세상은 하나가 되고 화합과 통일이 이루어진다.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깨끗이 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살라(如蓮花不着水 心淸淨超於彼)”고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사찰마다 연등을 만들어 봉축을 준비하고 있다. 연등은 연꽃의 청정과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지혜를 닦고 자비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또한 연화대에 앉은 부처님들이 본래 연꽃 속에서 탄생하시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5월 제54호

업경대(業鏡臺) 이야기

은해사 박물관에는 진귀한 유물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꼬리를 치켜든 사자상 위에 불꽃을 위로 달고 있는 타원형의 유물이 있는데 이를 업경대라 한다. 업을 비춰본다는 이 거울은 원래 염라대왕이 있는 명부에 있다는 거울이다. 때로는 거울이 돌면서 비춘다 하여 업경륜(業鏡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갔을 때 염라대왕이 이승에서 지은 인간의 죄업을 심판한다고 하는 설은 중국의 도교사상에서 있어온 사후의 이야기로 이것이 불교에 흡수, 지장신앙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 인도에서도 이미 업경대의 이야기는 있었다. 중국의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 있을 때 바라나국의 어느 절에서 돌기둥으로 되어 있는 업경대를 보았다는 기록이 [대당서역기]에 나온다.

업이란 사람이 하는 행위를 두고 하는 말로 범어 까르마(karma)를 번역한 말이다. 사람의 행위를 세 가지로 구분 신체적 행위를 신업(身業)이라 하고 언어적 행위를 구업(口業)이라 하며 사고적 행위를 의업(意業)이라 하여 3업이라 말하기도 한다. 의업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뜻하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생각도 하나의 행위로 본다.

이 업이 다시 선악으로 구분되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맺고 있어 현생에 지은 업이 원인이 되어 다음생의 과보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악업을 많이 지은 중생이 있을 때 그는 사후의 고통이 가장 극심한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업경대 앞에 서서 생전에 지은 죄를 염라대왕 앞에 자술하게 되고 이것을 두루마리에 적어 자술한 죄목에 대한 량을 저울에 달아 어떤 지옥의 고통을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분히 권선징악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말로 사람이 살면서 나쁜 죄업을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생사의 반복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불교의 교리에 육도윤회설이 있다. 인간세상에서 지은 업이 기준이 되어 선업이 많을 때는 천상으로 가거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며 악업이 많을 때는 그 경중에 따라 지옥이나 아귀 축생도에 가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설을 통하여 생각해 볼 때 인간의 한 생애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의 하루의 시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이 내 한 생애의 전부가 아니듯이 금생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전생, 금생, 내생으로 이어지는 생이 세세생생으로 계속되므로 이 윤회를 끊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적이다. 해탈이나 열반으로 설명되는 수행이 완성된 경지는 윤회를 벗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윤회를 하는 것은 업에 의한 과보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 과보가 가장 고통스러운 곳이 지옥이다. 살생의 업을 많이 짓거나 반윤리적인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다음 생의 과보가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지옥은 죄업이 많은 중생이 모이는 곳이다. 중생이 생사를 윤회하면서 가장 절망적이고 불행한 상태가 되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이다. 이 지옥의 고통을 소멸시키고 지옥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이 있다. 바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을 포기하고 지옥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일념으로 무한 대비를 실천하는 보살이다. 이를 대비천제(大悲闡提)라 하여 남을 먼저 제도하겠다는 지극한 대비심 때문에 자신의 성불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전에서 지옥에 들어가는 중생들이 불쌍하여 슬피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지옥을 중생들을 죄다 건저 내고서야 바야흐로 깨달음을 이루겠다. 지옥의 중생들을 제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으리.” _ 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除 誓不成佛

이러한 서원을 가진 지장보살은 죽은 망자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죽은 망자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지장보살에게 기도를 하며 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이 지장신앙에는 극락세계와 같은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정토발원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업경대는 지장신앙과 관계된, 업의 심판에서 업의 소멸로 중생을 이고득락(離苦得樂)케 하는 불교신앙의 근본 메시지가 들어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기의 얼굴을 보고자 할 때는 거울을 본다. 여성들이 화장을 할 때 거울을 보듯이 거울을 보는 것은 용모의 단정함을 확인하거나 얼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중생이 사바세계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은 업을 짓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짓는 업이 좋은 업인가 나쁜 업인가를 살펴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업경대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내 업이 거울에 비치어 파노라마처럼 나타난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과학적인 이야기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의 행동을 계속 관찰하면서 카메라나 비디오로 찍어 둔다면 내가 한 행위의 장면들이 틀림없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종교 신앙인들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생각 하나는 내 행위는 기록되고 있으며 나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 업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며 거울에 나타나는 형상처럼 명확하여 지은 업에서 도망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0월 130호